문규현 신부 "2009년 1월 20일 용산은.. 하느님의 다급한 음성"
-명동성당 들머리, 전국사제시국기도회 문규현 신부 강론 전문
"우리 모두는 생존에 허덕이고, 미래를 박탈당한 망루 예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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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사람이 있어요!”
며느리가 외쳤습니다. 아들들이 외쳤습니다.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 제발 죽음의 진압을 멈추라고.
“저기 사람이 있어요!”
아내들이 외쳤습니다. 친구들과 이웃들이 외쳤습니다.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 제발 살인과 만행을 멈추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하느님께서 외치셨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
하느님께선 그렇게 애타게 강도 떼에게 당해 다 털리고 피 흘리는,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대리인이라는 거룩한 사제는 저 멀리 길 반대쪽으로 피해갔습니다.
똑똑하고 잘났다는 레위인도 저 멀리 길 반대쪽으로 피해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멈춰버린 시간과 만들어가는 시간,
죽음의 시간과 생명의 시간 두 차원을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대한민국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에서 세입자 5인과 경찰 1인이
참극 속에 사망한 그날에 시간은 멈춰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손길이 철저하게 배신당한 그날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사제처럼, 레위인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외침, 하느님의 비명, 하느님의 통곡을 외면하고
길 반대편으로 피해간 날입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사계절이 순리처럼 한 바퀴를 돌아가고,
설을 지내고 추석을 보내며, 달력을 넘기고 날짜를 지워가도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습니다.
그 추운 겨울 새벽, 물대포 세례를 받으며
두들겨 맞고 불타 죽은 그 불쌍하고 억울한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여전히 더 춥게 냉동고 속에 있습니다.
유가족들의 검은 상복은 그날처럼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유가족들의 고통과 피눈물은 그날처럼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매일이 지옥인
며느리와 아들들, 아내들은 오늘도 여전히 “여기 사람이 있다!”고 울부짖습니다.
하느님께선 오늘도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제발 눈길 좀, 손길 좀 주라고 애원하십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고
전직 대통령이 눈물겨워하고, 현직 총리가 시늉이라도 하며 다녀갔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서울 용산에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참으로 세상은 천연덕스럽고 무심합니다.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대한민국, 그 야만성과 후진성이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냈던 그날,
돈과 투기에 미쳐 사람도 생명도 안중에 없던 그날,
연민도 동정심도, 사랑도 자비도 다 위선이고 사기였던 그날에 시간이 멈춰 있는 한,
이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의 사회요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심장이 있는 인간들이 숨을 쉬고, 이성과 지성이 존재하는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춰버린 시간을 딛고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왔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만 같았던 그 비극과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뤄졌습니다.
특히 유가족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유가족들은 그 죽음의 시간에 주저 않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노와 절망의 시간을 딛고, 생명과 자존의 시간을 만들어오셨습니다.
온갖 박해와 피눈물 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숯검정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마음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아 오셨습니다.
유가족들께서 “여기 사람이 있다!”고 한결같이 외치며
생명의 길, 사람의 길, 평화의 길을 놓지 않아오셨기에,
저희들은 그나마 우리 양심의 소리를 듣고 미력이라도 구실 할 수 있는 귀한 시간,
은총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은,
강도 떼를 알아보라는, 강도 떼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느님의 다급한 음성,
간절한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아듣게 해주었습니다.
이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선, 생존과 생명, 정의와 평화를 구하기 위해선,
소수 부자독재 정권을 향해, 우리 안의 탐욕을 향해
절대 “아니오.” 해야만 함을 절절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진짜 강도 떼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저 자기 길을 가던 사람을 때려눕히고 발가벗기고 가진 것 다 털어가며,
목숨까지 위협하는 이 시대의 진짜 날강도들 말입니다.
날강도들의 공범자들이 과연 누구인지도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돈만 되면, 아니 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먹잇감을 쫓아다니는
개발주의자들, 투기꾼들, 건설자본들입니다.
재벌공화국 부자공화국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그들의 방패막이요 보호자요, 전투력이 되어주는 정권, 법원, 언론, 검찰, 경찰입니다.
죽어가는 이웃을 피해 돌아가고선,
다시 목에 힘주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비겁한 종교인들입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이웃이 죽어가도 내 일이 아니라고,
내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외면하는 우리들의 탐욕과 이기주의, 무관심입니다.
현재까지 용산참사에는 맞아죽고 불타죽은 이들은 있는데
특정한 가해자, 공격자가 없습니다.
결국 돌아가신 분들이 분신자살했다는 논리입니다.
살인진압 책임자 무죄, 살인진압 희생자 유죄’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세상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가 공범임을 말해줍니다.
강도 떼들에게 권력과 칼자루를 쥐어주고,
그 날강도들이 떼를 지어 이 사회에 무슨 행패를 부리고 포악질을 해대도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버리는 우리들이 진짜 범인이라는 것입니다.
2009년 1월 20일부터 우리가 만들어온 시간은 반전의 시간입니다.
아프디 아픈 성찰과 참회, 회개와 낮춤의 시간이었습니다.
죽음 위에 생명을, 불의 위에 정의를, 어둠 속에 빛을 만들어온 이 모든 시간은
곧 새로운 역사를 뜻합니다.
세계적인 독일 신학자 몰트만 교수가 올해 한국에 왔습니다.
소위 ‘희망의 신학’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참혹한 유대인 대학살을 겪은 뒤
그 학살과 절망의 현장 속에 함께 하신 하느님,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건져 올리며 ‘희망의 신학’을 주장하던
몰트만 교수가 이번 방한 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고통은 생명의 지표지만 체념은 죽음입니다. 희망의 용기를 가지십시오.
모든 종말에는 새로운 시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나치 시대에는 희망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생명과 사회적 정의에 대해 얘기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생명과 사회적 정의에 대해 큰 소리로 얘기할 때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강도 떼들이 오직 돈을 위해 금수강산 다 파헤치고 난도질하며,
사람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위해서 불법 탈법 위법도 서슴지 않고,
가진 자는 더 가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사제도 레위인도 강도를 당해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길 반대쪽으로 가버렸다고 전합니다.
길 반대쪽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과는 반대쪽으로 치닫고 있으며
우리 교회와 우리 신앙이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나 레위인 등이 업신여기는 사마리아인이 하느님의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천대받고 이류라고 놀림 받던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선과 의를 행했습니다.
이웃의 참상에 가슴 아파하고 연민과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하여,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저는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의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께선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길 반대편입니까?
아니면 나약함과 두려움, 비겁함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가리키시는 길 쪽으로 나서서,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를 다시 새깁니다.
우리도 가서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나누고 돌봄과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몰트만 교수가 말했듯이 ‘생명과 사회적 정의의 시대’에 대해 말해야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탐욕과 부자독재정권에 약탈당하고 있는 이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들,
서민 빈민 모두 망루 위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생존에 허덕이고, 미래를 박탈당하고 있는 망루 예비자들입니다.
그러나 강도떼들에게 몰려서 망루 위로 오르지 말고, 우리 스스로 망루를 세워야 합니다.
생명과 정의의 망루를 세워야 합니다.
대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방 돌아보며 늘 깨어 있기 위한 망루,
깊은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걸 지켜보고,
절망을 딛고 희망이 몰려오는 걸 힘차게 노래할 망루를 세워야 합니다.
나누고 연대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용산참사, 그 비극의 본질과 진실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참사 배경과 그 처참했던 시간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이 사회의 야만적이고 수치스러우며 반인간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계속해서 함께 기도하고 마음 모아야 합니다.
이 정권은 아직도 우리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지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그 수 십 년을 다 겪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었고 더 혹독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명박 정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다만 인내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질 뿐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자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을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셨던 하느님께서는
어느덧 하느님을 외면하고 욕심만을 챙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물로써 벌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로 흥한 자, 물로 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의 자리, 절망의 자리, 피눈물의 자리 용산에서
새로이 생명과 정의의 대한민국, 사회적 공동체가 태어나길 염원합니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공동체성이 회복되길 기원합니다.
없는 사람들도, 이 사회의 약자들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주인임을,
사회적 약자들도 스스로 자존과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선포하는 자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상식과 도리를 회복하고, 양심과 지성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현장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과 부르심에,
하느님이 가리키시는 길의 반대쪽이 아니라, “너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
그 길을 가고자 애쓰고 있음을 고백하는 참신앙의 자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야만적이고 후안무치한 세력에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임을
또한 증거 하는 자리가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그리도 애써 쌓아온 소중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이 용산을 통해서 계속 말하고 드러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총리께 호소합니다.
다시금 바람 차갑고 추운 계절이 왔습니다.
이제 그만 냉동고의 망자들을 저 세상으로 편히 보내드리고
시늉과 위장이 아니라 진실한 정책으로 유가족들과 서민들을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이 유가족들의 고통과 피눈물 맺힌 아우성을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사제나 레위인처럼 고통 받는 자들을 외면하며 길 반대편으로 돌아가지 마시고,
이제라도 하느님의 길로 돌아와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처럼 이 분들의 요구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길 바랍니다.
대통령의 불행은 국민 모두의 불행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진정 새로운 반전의 시간, 새로운 역사를 쓰며,
국민도 대통령도 모두 행복해지는 길을 택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진심으로 그 선택에 박수치고 응원할 것입니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구하고자 했던
오체투지 기도순례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모양과 장소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용산참사의 진실이 드러나고 유가족들의 아픔이 진정으로 위로받는 그날까지,
또 다른 아픔과 시련의 현장에서, 도움과 나눔이 필요한 모든 곳에서
우리의 기도 순례는 계속됩니다.
더 낮은 자리에 더 낮은 자세로,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며,
단 한 명, 한 하나의 생명도 외롭고 억울하게 울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계속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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