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자본 재생산의 비밀과 사회적 책임
[오늘, 대학을 말한다-20]
대학자본 재생산의 비밀 두 가지
원래 교육은 자본이 아니다. 교육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태도와 역량을 북돋우는 일이다. 따라서 교육이란 삶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은 상품이 되었고 마침내 자본이 되었다. 한 사람이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P. 부르디외가 말했듯, 일종의 자본, 즉 문화적 자본이 된다. 또 그 사람이 맺는 다양한 인간관계들도 일종의 자본이 되는데 그것이 곧 사회적 자본이다. 나아가 대학을 졸업한 사람, 특히 일류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그 구체적 내용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상징적 자본을 획득하게 된다. 대학 학위를 통해 다양한 자본을 많이 획득할수록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사다리(피라밋) 질서’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더 많은 기득권(떡고물)을 누릴 수 있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대학이 돈벌이의 기본 바탕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경제적 자본이 없는 가정의 자녀도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갈수록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학 공부는 어렵게 된다. 이른바 일류대학 진학은 더욱 멀어진다. 요컨대, 경제적 자본 없이는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을 획득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P. 부르디외가 계급지배의 재생산과정에 있어 그 중심에 학교가 있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대학도 엄연히 자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자본이 된 대학, 즉 대학자본은 자신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어떤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는가? 그 비밀의 메커니즘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첫째로, 대학이 자본 일반의 재생산에 봉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일부(‘자본의 인프라’)가 되는 것, 둘째로, 대학 스스로 자본 증식 기관으로 활동함으로써 그 자체가 ‘교육 자본’이 되는 것이다.
자본의 인프라로서의 대학
대학이 자본 일반의 재생산에 봉사한다는 것은 대학이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옹호, 지탱, 발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헌신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이란 한 마디로 상품 생산을 통한 이윤 추구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 대학이 봉사하는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대학이 자본주의 이윤 시스템, 상품 시스템, 시장 시스템을 옹호하는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부단히 재생산함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혁은 그러한 헌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나 분야를 없애도록 촉진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수나 연구자들도 전형적인 영미 식 경쟁주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입장에 비판적인 교수나 연구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비주류’로 머물러 별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는 한에서만 암묵적으로 허용될 뿐이다. 따라서 어떤 학생이 사회경제 시스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고 제대로 된 변화를 갈구하며 ‘경제학 원론’을 수백 번 수강해봐야 대개 허탈하게 헛고생만 실컷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다음으로, 대학이 해마다 생산해내는 고급 노동력이다. 한국의 200여 개 대학에서는 해마다 약 50만 명 내외의 노동력이 방출된다. 개별 자본들은 이 엄청난 노동력, 즉 인적 자원의 창고로부터 입맛에 맞는 노동력을 골라잡으면 된다. 이미 이 인적 자원은 각종 시험을 통해 A급에서부터 E급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갈수록 자본의 입장에서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대학생들은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봉사 같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른바 ‘스펙’ 쌓기에 바쁘다.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예비 노동력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도록 만들기 위해 대학생 스스로 착실히 준비를 해서 갖다 바치려는 것이다. 그렇게 준비해도 자본은 쉽게 선택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대학(大學)에는 큰 공부(大學)는 별로 없고 오로지 작은 공부(小學)만 있다. 이렇게 해서 대학은 자본이 요구하는 ‘인재’를 만들어 노동력으로 공급하기 위해 물심양면, 불철주야 노력 중이다.
또한 대학은 개별 자본이 필요로 하는 원료나 부품, 아이디어, 지적 재산 따위를 부단히 공급한다. 예컨대 인문학에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성찰을 하게 하는 것이 옳은 방향임에도 그런 것보다는 세계 시장에서 써먹기 좋은 영어 실력이나 자기 계발, 가족 이데올로기 증진에 신경을 쏟기 쉽다. 또 사회과학에서는 사회 구조가 야기하는 근본 문제를 진단하고 분석하여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돈벌이에 눈이 먼 경제경영인, 돈과 권력에 눈먼 정치가나 법률인 등을 기르는 데 이바지하기 쉽다. 자연과학에서는 공장에서 요구되는 원료나 상품을 직접 만들거나 아이디어를 주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모든 일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자본과 대학이 협력하여 연구자에게 물심양면 지원을 해야 한다. 대학마다 ‘산학협력실’이나 유사한 팀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육 자본으로서의 대학
이제 대학은 스스로가 이윤을 추구하는 산업 자본과 다를 바 없이 되어 가고 있다. 일반 회사에 빗대자면 대학도 일종의 ‘교육 회사’가 되어가는 것이다. 교육 회사가 자기 자본을 증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선, 예전에는 그래도 뜻이 있는 자산가가 대학을 세워 학문을 증진하고 후진을 양성하고자 했지만, 오늘날은 초기 투자조차 별로 않은 채, 저금리의 은행 대출을 해서 헐값에 땅을 사고 외상으로 건물을 지은 다음, 나중에 천문학적 등록금 수입으로 하나씩 갚아나가기도 한다. 재단이 출연을 하는 경우라도, 민법과 사립학교법에서 출연 재산을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익재산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많은 재단이 대학을 개인 사유물로 인식해 대학 위에 군림하거나 재단 비리를 초래한다.
이런 차원에서 대학생이 내는 천문학적 등록금은 대학 자본의 재생산에 핵심 역할을 한다. 대학 등록금은 물가 인상률 보다 2~3배 빠른 속도로 올라 20년 전 보다 4~6배나 올랐다. 한 해에 등록금이 1천만 원 내외가 된 것이 현실이다. 그 사이에 대학생 신용불량자는 1만 여 명에 이르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학생들이 막노동과 식당일도 마다않는다.
대학은 이제 학문을 갈고 닦아 진리를 탐구하고 사회에 정의의 빛을 던지는 지성의 산실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은 이제 대학생 고객에게 교육 서비스라는 상품을 팔아 천문학적 수익을 남기는 교육 자본이 되고 말았다.
이 교육 자본은 좀 특이하다. 대학생 고객이 서비스를 잘 받아 일류 노동력이 되어 일류 직장에 취업하면 나중에 ‘장학금’이라는 형태로 대학에 기부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일반 회사에 가서 훌륭한 노동력이 되어 그 자본의 몸집을 잘 불려주는 경우 ‘평판’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 출신 대학의 주가를 높이기도 한다. 등록금을 올릴 근거이기도 한다.
대학은 전술한 바,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의 산실이자 그 자체가 경제적 자본이 되었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가 대단히 중요하다. 이른바 ‘일류대학’들이 ‘일류’라는 가치를 유지, 확대하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진리 탐구의 내용이나 방향보다는 그 이미지, 로고, 건물, 이벤트 성 행사, 평판, 여론, 세계 몇 대 대학 등을 중시하는 것도 그 자연스런 귀결이다.
학생들만이 대학 자본의 ‘봉’이 아니다. 교수나 연구자들도 부단히 연구물(그것도 SCI 논문이나 SSCI 논문 같은 것만 대접받는다.)을 생산하거나 대형 연구 프로젝트를 끌어옴으로써 대학 자본의 몸집을 불리는 봉이 되어야 한다. 연구 업적 관리를 더욱 ‘빡세게’ 하거나 연구 프로젝트 수주 시 다양한 인센티브를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연구 업적이 높을수록 교육부에서 나오는 지원금, 즉 국민이 내는 혈세를 더욱 많이 끌어 갈 수 있다. 대형 프로젝트는 요즘은 수십억에서 수백억에 이르기 때문에 그를 통해 재단이 스스로 물어야 할 출자금 부담으로부터 면제됨과 동시에 대학 내 각종 프로그램이나 연구팀을 더욱 키울 수 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것은 대학 자본의 노동자, 그 중에서도 교수 노동자들을 약 절반 정도는 정규직으로 우등 대우를 하지만, 약 절반 정도의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열등 대우를 한다는 점이다. 대학 강의의 약 절반 정도를 담당하는 시간 강사, 겸임 교수, 비 정년 전임 교수 등이나 각종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시한적으로 고용된 연구교수 등은 대학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학술 활동이나 인간적 교류, 행정적 결정에 참여하기 어렵다. 특히 시간 강사의 경우 방학 중에는 인건비가 지급되지 않으며, 일주일에 한 과목(3학점)을 담당하는 경우 수입이 연간 50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참고로, ‘비정규직보호법’에서도 보호되지 않는, 주 15시간 미만의 단시간 노동자가 되도록 하려면 시간강사는 한 대학에서 5학점 이상 가르치기 어렵다(고법판결에 따르면, 대학 강의 1시간은 그 연구 준비시간까지 해서 3시간에 해당한다). 이렇게 대학 자본은 정규직 교수들에게는 특혜적 대우를, 비정규 교수들에게는 열악한 처우를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말없는 협력을 얻어내고 다른 편으로는 막대한 이익을 뽑고 있다.
또한 대학은 부동산 관리를 통해서도 자기 재생산을 한다. 실험실습지나 연수원, 학교 부지 형태로 좋은 땅을 사두었다가 그 시장가치가 급등한 경우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또 대학 캠퍼스 안에 쇼핑센터를 짓거나 작은 가게, 식당 등을 입점시킴으로써 고액의 지대를 취하고 있다.
비리 사학의 경우, 2009년 8월 11일 KBS1 TV에서 보도된 바 있듯, 등록금을 마치 제 돈처럼 사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재단 자산 부풀리기에 열을 올리는 경우를 넘어, 전체 학생 수년 치에 해당하는 교비 적립금을 쌓아 놓거나 그 적립금을 펀드에 투자했다 엄청난 평가손을 입기도 한다. 또 학교 시설을 위해 교비로 부동산을 매입한 뒤, 그 등기는 설립자의 지인 명의로 함으로써 사실상 사유화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9년간 교육부 감사를 받은 81개 대학 중 절반이 비리로 적발됐다. 부당 집행한 교비만 약 5천억 원이었다. 놀랍게도 이들 중 교육부가 책임을 물어 재단을 퇴출한 곳은 3곳에 불과하다. 교육 관료들이 퇴임 뒤 사학 재단으로 영입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비리 사학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나 사립학교 설립자 단체 등은 (재단이사회에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개방형 이사, (대학 운영 심의기구인) 대학 평의원회, (문제 재단을 퇴출하는) 임시 이사 제도 등이 독소조항이라며 ‘사립학교법’ 폐지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비리를 저질러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학 자본은 스스로 자본이 되었다.
대학의 사회적 책임성 회복
대학이 글자 그대로 대학(大學)이 되려면 더 이상 돈벌이 시스템의 후원자가 되거나 스스로 돈벌이 시스템이 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대학이 그야말로 ‘큰 공부’를 한다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진리 탐구다. 오로지 ‘브랜드 가치’나 ‘이미지 관리’에만 쓰이는, 진리, 자유, 사랑, 봉사, 정의, 창의 등의 구호를 명실상부 만드는 것이 큰 공부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학은 무엇이 참된 사회 발전을 위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지 부단히 연구하고 판별하고 대안적 비전이나 대안 자체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대학에서 배운다고 할 때, 지식과 정보, 기술과 기능도 중요하지만, 지혜와 통찰이 가장 중요한 배움이다. 제아무리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보, 기술과 기능을 배운다 하더라도 지혜와 통찰이 빠져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더 망가뜨리기 쉽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바로 대학의 사회적 책임성 회복에 첫걸음이다.
다음으로 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을 하건 안 하건 나중에 사회적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대학은 학문 탐구 기관이지 취업 준비 기관이 아니다. 대학 졸업자나 일류 대학 출신이 엄청난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는 지금의 ‘사다리(피라밋) 질서’는 타파되어야 한다. 이런 잘못된 질서의 타파에 공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반드시 대학 진학이 필요한 사람만 대학을 가게 하되, 대학 등록금은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학생이 무슨 전공을 할지 정할 때는 부모님의 기대나 취업 가망성, 미래 수익 예상 등에 따를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그 내면의 동기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공부, 행복한 연구, 행복한 탐구가 이뤄지고 사회적으로도 행복 증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성 회복에 기초하여 대학과 사회 전체의 ‘사다리 질서’와 습속을 혁파하는 것이 올바른 대학 개혁이지, 단순히 돈벌이 되는 학과를 늘리고 브랜드 관리를 잘 해 돈 잘 버는 대학을 만드는 것을 대학 개혁이라 할 순 없다. 대학 개혁과 사회 혁신이 올바로 될 때, 그때 비로소 사람들도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 받는다.”라는 강박증을 버리게 될 것이다. 반면, 진리탐구라는 본연의 사명을 저버리고 돈벌이에 성공하는 대학이 많아질수록 학문과 사회는 외화내빈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글 강수돌 (고려대 교수)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가 함께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