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의 시대에 모두가 예언자로 나서야 한다
[강신숙 수녀] 9월 30일(연중 제26주일) 민수11,25-29; 야고5,1-6; 마르9,38-43.45.47-48
9월 어느 날 새벽에 느꼈던 ‘서늘한 바람 한 줄기’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40일이 넘게 40도를 오르내린 폭염에 완전히 지쳐 있을 때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서늘함’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던 순간이었다. 111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고도 했다. 기후변화가 일으킬 재앙의 정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새삼 절감한 여름이다. 처음으로 ‘온 국민 냉방복지 권리’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지구를 강타하는 폭염은 물론 초강력 태풍과 홍수, 빙하가 사라지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그중 몇 가지 “위험경고”를 보낸 보도들은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 위중하다.
“지구한계 과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한 스톡홀름대 교수 요한 록스트롬은 기후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상 징후를 통해 지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알아내고 그 수치를 제시하였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주요 지표는 대기권의 이산화탄소 농도다. 이산화탄소는 메탄, 오존과 함께 주요한 온실 가스로서 스톡홀름 복원센터는 이산화탄소 농도 350ppm을 위험 한계로 제시했다. 그런데 기상청 ‘지구대기감시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이산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는 412.2ppm으로 스톡홀름복 원센터가 설정한 한계를 훨씬 넘어섰다. 이보다 앞서 400ppm을 처음 넘어선 것은 2013년 5월 10일, 하와이의 마우나로아 천문대 측정치였으니, 빨간 불이 켜진 지는 한참 오래다.
최근에 보도된 북극 그린란드 빙하가 무너져 내리던 모습은 더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이었다. 이제 더는 지구의 생태계를 붙잡을 수도, 기댈 수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평균 두께 4미터 이상으로, 관측 이래 단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다는 최후의 빙하마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이미 1도 정도 올랐고, 10년마다 0.2도씩 계속 오르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정한 지구 온난화 억제선인 1.5도가 2040년 경엔 돌이킬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폭염 일수는 지금보다 2배 증가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수많은 연안 국가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며, 홍수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대 1.8배, 재산 피해는 3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인도와 함께 가장 큰 피해 예상 국가로 꼽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온난화로 수온이 높아진 바닷물의 수증기 유입으로 인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초강력 태풍이 각 대륙을 강타할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2015년, 동태평양에서 일어난 허리케인 5등급 ‘패트리샤’ 같은 가장 강력한 열대성저기압 폭풍의 경우 약 2000명의 사망자와 2500억 달러의 재산 피해를 낼 수 있지만, 6등급 허리케인이 오면, 5미터 파고로 연안 지역을 휩쓸어, 플로리다의 탬파 같은 도시를 물에 잠기게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오늘 독서와 복음이 그래서 전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단호하고 엄중한 경고야말로 지금 지구별이 태어난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 인류에게 딱 맞는 소리가 아닌가. “자 이제, 부자(국가)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야고 5,1-3)
그러니,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중략)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47) 지금도 한 지체가 괴사해서 전체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그 지체를 ‘잘라내는’ 일은 불가피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메시지는 곧 하느님나라의 도래라는, 아니 이미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긴박감 속에서 행해지는 촉구다. 더는 망설이지 말고 과감히 선택하라는, “바로 지금” 결단을 내리라는 절체절명의 호소다.
이제 무엇을 더 망설여야 하는가. 이렇게 분명한 ‘지표’를 두고 누가 정통적 예수의 적자인지, 혹은 예언자인지, 어떤 것이 정통 교리인지, 아닌지를 두고 한가하게 편 가르기나 하며 시간을 보내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오늘 민수기와 복음에서 보여 주듯이 모두가 예언자로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후손을 위해 뭔가를 할 수만 있다면,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를 현재의 파국에서 지킬 수만 있다면, 적과 아군, 니 편 내 편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종교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든지,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길이니 알 바 아니라든지 하는 태도도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백히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져야 할"(마르 9,42) 중대한 범죄에 다름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이 모든 위험을 경고하고 인류의 회개를 촉구한 바 있다. 물론 1962년, 레이철 카슨이 “침묵의 봄”을 쓴 뒤로 수많은 학자와 민간 기구, 국가가 지구위기의 문제를 두고 머리를 싸맨 것에 비하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깊이와 통찰력을 제시한 “회칙”이 발표되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이 귀한 회칙이 다음의 말씀과 함께 교회 중심부를 허리케인처럼 강타해 나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한다: “개인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매우 복잡한 상황의 해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이 임무는 ‘인간에게 엄청난 과제이기에 개인적 노력이나 개인주의적으로 자란 인간들이 연합하여 노력을 기울여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결집된 힘과 일치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개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합니다."('찬미 받으소서',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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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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