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내가 본 십자가
[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그가 목숨을 잃던 금요일 오후.
한 사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내는 치욕스런 십자가에 매달린 젊은 선지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서 있다가, 이윽고 그가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떨굽니다. 그리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언덕을 내려와 총독 빌라도의 관저를 찾습니다. 사내는 마음이 바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는 땅거미가 깔리기까지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장사 지내 줄 친구들조차 남아 있지 않은 젊은이의 죽은 몸이 무심한 들짐승들과 날짐승들에게 훼손당하고 썩어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총독으로부터 시체를 수습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필요한 물품을 구해 다시 골고타 언덕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사내는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이자 행정법과 사법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산헤드린의 의원, 그중에서도 명망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지요. 당대 최고 지식인일 뿐 아니라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이기도 하고, 언행이 진실해 불미스럽게 남의 입에 오르내릴 일 없었던 그가 지금 평생 해 본 적이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존귀한 의원의 체통을 버리고 땀에 뒤범벅이 된 채로 언덕과 평지를 오가며 범죄자로 낙인 찍혀 죽은 젊은이의 시체를 거두고 있는 것이죠. 동산 정원, 자신의 묏자리로 옮겨 그를 장사 지내고 묻어 줄 생각입니다. 경험 있는 정치가였던 그가 예루살렘의 온 이목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지요. 돌발적인 행동이 그의 경력에 큰 해가 되리라는 것 또한 잘 알았겠지요.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 감히 젊은이의 편에 서려하지 않았던 그 배반과 유기의 자리에 홀로 나서 기이한 일을 벌이고 있는 요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복음서는 우리에게 어렴풋한 추측만을 허락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가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기록합니다.(15, 43-46) 루카는 그가 올바르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며, 예수를 처형하고자 결의할 때 의희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하지 않은 자라고 전합니다 (23, 50-53). 마태오와 요한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가 예수의 “비밀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제자라는 사실을 숨겼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태 27, 57-60; 요한 19, 38-42)
복음에 나타난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
수난 설화를 둘러싼 복음서의 정황들을 살펴보면, 요셉이 마음이 곧고 분별 있는 자였으며, 예수의 메시지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태오와 요한이 제시하는 “비밀 제자”설은 두 복음서 저자들의 추측과 바람에 따라 후에 미화된 내용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 요셉이 감행했던 대담한 행동을 본다면 그가 유대인들이 “두려워” 스스로 제자임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은 어쩐지 좀 앞뒤가 맞지 않아요. 오히려 그는 예수에게 심정적으로는 동조했을지언정 정치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던, 또 혈연으로도 지연으로도 연결되지 않았던 낯선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요셉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가 자신을 비롯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하기는 해도 진리가 담긴 메시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데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았던 젊은 니코데모와는 달리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지요. 예수가 바른소리를 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어쩐지 좀 과격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출신과 지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는 “사회적 안정”을 위해 유대인 “주류”의 생각을 대변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 터이지요. 이렇게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였습니다.
자신의 정파나 출신 배경을 빌미로 불의에 가담할 수는 없었기에, 무고한 예수를 처형시키자는 의견에 손을 들어 주지 않았죠. 중립과 침묵을 지키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침묵을 깬 시점, 모든 희망이 무너졌을 때
그랬던 요셉이 중립과 침묵을 깨고 자신의 정체성을 뒤흔들 위험을 감수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둘러싼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뒤끝입니다. 예수가 영화롭게 되기를 오매불망하다 그가 죽은 뒤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의 행보와는 참 다르지요. 그 모든 풍문을 뒤로하고 십자가에 허망하게 매달려 죽은 예수를 바라보면서 요셉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요. 그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릴 과감한 선택을 했던 걸까요. 과연 정치인다운 대단한 혜안과 통찰력이 있어, 제자들도 믿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을 예감하고, 그의 메시아적 위업을 기대하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와 하나되어 누릴 훗날의 보상을 계산했던 걸까요?
시체조차 거두어 줄 이 없는 안타까운 젊은이의 죽음 -요셉의 눈에 보인 것은 어쩌면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 황량한 죽음이 그가 본 전부였기에 그는 오히려 번개를 맞은 듯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그제서야, 망자에 대한 한없는 연민을 느꼈을 겁니다. 그 연민의 한쪽 끝에는 무고한 목숨이 죽어 가는데 아무런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망자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기 위해 그날 골고타의 언덕을 오르내렸을 겁니다. 그를 되살리지는 못 할지라도, 이승에서 갖추지 못 했던 예를 다해 그가 가는 길을 보살피고 싶었을 겁니다. 다시 올 메시아의 영광의 길이 아니라, 무력하게 죽어 간 한 청년의 쓸쓸한 마지막 길을 말입니다.
요셉이 느꼈던 심경은 연민, 동정, 슬픔, 측은지심을 포함하지만 좀 더 복잡한 무엇입니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목숨에 대한 책임감과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들어 있습니다. 또 고통을 매개로 요셉과 예수를 하나로 엮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언가도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 꼭 들어 맞는 단어를 찾기 힘든 라틴어 단어 ‘콤파시오’(compassio)가 어쩌면 요셉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일 듯하네요.
콤파시오의 의미를 단순하게 풀면 “함께 (com) 고통을 겪음(passio)”입니다. 그러나 성서와 고전의 용례를 살펴본다면 이 단어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망들을 발견하게 되지요. 신학자 웬디 팔리 (Wendy Farley)는, 콤파시오(혹은 영어의 compassion)는 내적인 감정이라기 보다 “타자의 고통이 내게 상처로 새겨질 때 우러나오는 힘”이라고 설명합니다.(Wendy Farley, Tragic Vision and Divine Compassion: A Contemporary Theodicy, 69) 이 힘은 상대를 제압하여 우위를 점하는 예사로운 힘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나를 타자의 입장에 정위하여 타자의 눈으로 현상을 바라볼 때 솟아나는, ‘관계’에 기반한 힘입니다.
고통받는 타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앎’
초월과, 성찰과, 일치의 경험 -말하자면 하느님 경험입니다. 요셉이 죽은 예수의 시체를 거두며 겪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죠. 그는 예수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을 체험하며 비로소 예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었고, 그가 겪은 고통에서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스스로를 다시 알게 되었으며, 그의 시체를 거두며 그와 하나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요셉에게 보여 준 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부활만을 바라보고, 십자가 영광만을 기대하며 요셉이 겪었던 하느님 경험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가 겪은 수난의 길이 고스란히 현실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바다에 묻혀 있고, 참사의 진상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지금,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아직 부활의 영광이 아닙니다. 안타깝고 외로운 죽음들입니다. 참사 뒤 거의 일 년이 지난 지금, 가족들이 다시 상한 몸을 이끌어 도보 순례를 하고 3보1배를 하며 그날의 기억들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그 발길들 따라, 우리는 아직 더 가슴 아파야 합니다. 요셉처럼 깊은 부끄러움으로 통회하며, 망자들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과 별개가 아님을 더 배우고 깨달아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들을 찾아 움직여야 합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일이 없겠지만, 돈 있고 권력 있는 어르신들께 말씀드립니다. 세월호 영령들 앞에서, 또 몸부림치는 가족들을 보며 지금이나마 한 톨의 수치심과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 한 톨의 감정을 따라 당신을 일으키십시오. 당신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마음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는 기회가 그 한 톨의 감정에 달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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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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