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보여 준 예수를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4]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만 선포하였지, 당신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신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마르 13,24)는 말은 묵시문학에서 빌려서 초기교회가 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메시지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는 호칭으로 불렀다(마르 14,36; 갈라 4,6; 로마 8,15). 이 호칭은 그 시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지존하신 하느님에게 사용하기에는 경망스런 것이었다. 예수가 이 호칭을 즐겨 사용한 것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삶의 기원이고 권위이며, 또한 가르침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아버지의 삶을 산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이 복음서들 안에 자주 나타난다(마르 14,36; 루카 22,42; 마태 26,42; 요한 4,34; 5,30; 6,38). 이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를 의식한 초기교회가 복음서들 안에 여러 번 반복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메시지, 행위, 삶의 방식, 기적, 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자세, 율법과 성전에 대한 그분의 태도에서 초기교회는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일”(요한 5,17; 9,3)을 보았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였다. 그분의 삶은 하느님의 나라에 부합한 놀이었다〔‘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낫게 한 이야기’(마르 3,1-6)와 ‘병자들을 고쳐 주고 더러운 영들도 쫓은 이야기’(마르 3,7-12) 참조〕.
하느님은 그분과 함께 계셨고, 그분은 그 함께 계심에 철저히 충실하게 살았다. 초기교회가 신약성서를 그리스어로 집필하면서 그리스어의 ‘파파’라는 호칭을 피하고, 굳이 ‘아빠’라는 아라메아어의 호칭을 보존한 것은 그 호칭에 예수의 메시지와 행위가 지닌 특수성의 원천이 되는 체험이 담겨 있다고 그들이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는 하나의 대조를 나타낸다. 인간 고통과 재해의 역사, 폭력과 불의의 역사 앞에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선하심은 대조적이다. 아버지는 은혜로우시며, 악을 거스르는 분이시다. 악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게 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주신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이 세상의 역사가 주지 못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주었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체험이 독창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확신을 바탕으로 가능성을 사람들 안에 심는다. 예수의 ‘아빠’ 체험은 사람들을 아끼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힘이신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의 결과이다〔“진리가 여러 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32)〕.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며 접근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마르 10,17-18)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예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하실 수 있습니다”(10,27)라고도 말씀하신다. 예수가 어떤 체험의 장에서 살고 있는지를 엿보게 해 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법이다.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분이면, 자녀 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는 주인을 따라 변하지 않은 종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준다.
자캐오의 이야기(루카 19,1-10)는 예수를 집안에 영접하고, 그분에 맞추어 자기 스스로 변신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사람들을 등쳐먹고 치부만 하던 자캐오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주고, 또 불의하게 치부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말한다. 유대교 율법은 두 배로 갚으라고 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율법을 훨씬 능가하는 실천을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나오는 예수의 선언이다.
신앙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루카 6,20)라는 말씀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위해 변할 수 없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으로도 들린다.
부활, 하느님을 위해 끝까지 투신한 삶의 귀결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이 어디까지 변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하느님을 보여 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도 변해야 한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죽음을 위해 살라는 말이 아니다.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윗사람의 횡포를 참으라는 말이 아니다. 지위가 높다고 아랫사람들에게 횡포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약육강식의 잔재이다.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유산이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제자들이 죽음에 직면한 예수를 떠나는 것은 살기 위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예수가 못마땅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당신이 살기 위한 궁리를 하기보다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든 노력을 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사람들 안에 실현되기를 원하였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일만이 가치 있다는 사실을 그분은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 예수는 당신의 실패 앞에 하느님을 부르면서 자기의 신상에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인다.
게쎄마니에서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하느님은 침묵만 지키신다. 하느님의 이 어두운 침묵 앞에서도 예수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위해 당신 자신이 끝까지 변할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침묵을 지키셔도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예수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십자가 앞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마르 15,27-32)을 들으면서도, 예수는 하느님을 부르면서 죽어갔다. 하느님은 그분을 위해 아무 것도 보증해주지 않으셨다. 사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이 보증해주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와 반대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침묵 앞에 잠들어서, 그들도 침묵으로 답하고,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도망친다. 그들은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삶, 곧 유혹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라는 기도로써 예수의 생애를 끝맺게 하는 루카 복음서의 말씀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끝까지 자기 스스로를 변하게 한 예수의 최후를 잘 요약한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끝까지 투신한 삶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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