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준 예수

[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3]

2013-07-15     서공석

한 인물이 어떤 실재였던가를 확실하게 알려면, 그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인물을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과 그 인물을 미워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회상하고 말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이다. 그들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고 가르친 예수가 왜 그렇게 비운의 횡사(橫死)를 해야만 하였는가라는 문제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에는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의 믿음과 그분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미워한 동기들도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마르 3,1-6)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쳤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함께 계심’이고, 그 함께 계심에서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그분의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내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가상(假想)하는 혜택이 현재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하느님의 ‘함께 계심’에서 제외되었다고 가르치던 사람들, 곧 죄인들, 세리들, 버려진 사람들과도 어울렸다. 예수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는 사람”(마르 2,16)이고, “정신나간 사람”(마르 3,21)이라고 평가되었다.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 11,19)라는 말이 예수에 대한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층의 평가를 요약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은 계약이 열어 놓은 공간, 곧 하느님을 부를 수 있는 ‘함께 계심’의 공간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은 그 함께 계심을 사는 놀이를 요약하는 것이었다.

▲ ‘바리사이 시몬 집에서의 그리스도’, 루벤스의 작품(1618년)

예언자 예수

예수의 삶과 활동을 보면. 그분은 이스라엘 예언자의 유형(마태 21,11; 요한 9,17)에 속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하느님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이다.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 혹은 이미 와 있다는 말씀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삶의 공간을 되찾으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는 율법으로 가려져서 잃어버린 하느님을 우리 삶의 공간 안에 다시 살려내기 위한 노력을 요약한다. 우리는 쉽게 가상적(假想的) 놀이로 빠져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내세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나라는 현세적이고 내세적이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며, 유대교가 말하듯이,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중풍 병자에게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소”(마르 2,5)라고 하신 말씀은 죄의 대가로 병고와 불행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느님은 율법을 주고,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지키는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시지 않는다.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의 공생(共生)이라는 초기 계약의 언어를 잃으면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하였다. 그 원리는 우리의 삶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며, 그 원리를 투사(投射)하여 발생한 언어들은 많이 있다. 심청전의 공양미 300석,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종교인들의 언어 등이다.

예수가 이런 언어를 근본적으로 시정하기 위해 발생시킨 말씀들이 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라고 불평하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예수는 세 가지의 비유(루카 15장)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목자’, ‘여인’ 및 ‘아버지’는 사람과 함께 계시고 싶은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형상(形象)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그런 하느님을 믿기 위해 모든 역경을 딛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33)

유대교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래서 “너희의 아버지는 시초부터 살인자다”(요한 8,44)라는 말씀이 있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요한 8,1-11)도 사람을 죽이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과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시는 예수의 해석을 대조해 보여 준다. 동네에서 죄 많다고 소문난 여인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사실 죄인이지!”(루카 7,39)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7,48)라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루카 15,24)에 나오는 아버지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는 안식일과 율법을 범한다. 예수는 율법 폐지 운동을 하지도 않았고, 그것의 폐지를 위해 시위하고 단식하며, 성토하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율법을 단순히 범하였다. 그러면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마르 2,27).

안식일이 인생의 목적같이 절대화될 수 없고, 그것은 다만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예수는 율법과 안식일을 범함으로써, 그 많은 율법 조항들과 안식일에 대한 계명으로 가려진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구멍을 뚫는 것 같이 보인다. 율법과 안식일만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행위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혁파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혁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마태 5,17).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게 하여 율법과 안식일이 우리의 삶에서 제 자리를 찾게 한다는 말씀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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