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의 아픔, 그리고 사랑
성주간(고난 주간)을 앞둔 봄날, 세계는 전쟁의 화염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매주가 ‘고난 주간’인 사람들, 아니 매일매일이 ‘십자가’인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최근 국제 의료 학술지 <The Lancet Global Health>에 실린 논문 '가자 분쟁의 폭력 및 비폭력 사망자 수'는 2023년 10월 7일부터 2025년 1월 5일 사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직접적 전쟁 폭력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은 약 75,200명으로 추정되며, 그중 18세 이하 어린이·청소년은 약 22,800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가자 현장 조사에 기반한 이 통계는 가자 보건부의 공식 통계보다 오히려 34.7퍼센트 더 높은 것으로, 그동안 이스라엘과 미국이 가자 보건부의 통계는 거짓이라고 주장해 온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인한 피해 사망자의 정확한 집계는 아직 불투명하나, 이란 인권단체 HRANA는 지난 2월 28일부터 최근 3월 23일까지 최소 1,443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이중 어린이는 최소 217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아마도 이 숫자 속에는 전쟁 첫날 미군의 토마호크 미사일 폭격으로 사망한 미나브의 샤자레 타예베 초등학교 어린이 100여 명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추상적 ‘숫자’가 아니라 구체적 ‘사람’이다. 사망자 수를 부풀렸다는 가해자들의 비난에 맞서, 가자 보건부는 죽은 이들의 ‘이름’과 신상 정보를 아랍어와 영어로 병기해 웹사이트에 공개하고 있다. 희생자들이 존재를 항변하고 그들의 부재를 애도하는 것이다. 그 웹사이트에서 어린이·청소년 사망자들의 이름을 읽어 내려가며, 그들의 앳된 얼굴을 상상해 본다.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살아가다 전쟁 속에서 죽어 간 아이들에게 ‘삶은 곧 전쟁’이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아이들은 전쟁이 아닌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른 채, 무참히 스러져 갔을 것이다.
인류세 시대의 비인간 존재들도 고통과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환경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2017)의 감독 크리스 조던은, 태평양 미드웨이섬에서 플라스틱 조각을 먹이로 착각해 삼키고 죽어 가는 알바트로스들을 보며 느낀 깊은 슬픔을 영상에 담아 냈다. 조던은 그에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알바트로스들이 죽어 가는 이유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끝내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고 고백한다. 수만 년에 걸친 진화 과정을 통해 알바트로스는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법을 체득했고, 그것을 유전자에 새겨 전달함으로써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번성해 왔다. 이제 알바트로스들이 플라스틱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학습하고 유전 정보에 넣기까지는 또 다른 수만 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유전적으로 전달받고 전달해야 할 새끼 알바트로스들이 지금 이 순간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고 있다. 진화의 속도는 파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이토록 참혹한 전쟁과 생태적 파괴를 목격하며 우리는 지독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압도적 공포 앞에서 인간이 보이는 반응 중 하나는 ‘마비’다. 고통이 너무 커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무감각’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자신의 삶마저 위태로워질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감각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린다. 도로테 죌레가 비판한 ‘고통에 대한 무감각(apathy)’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뉴스를 보며 잠시 연민을 느끼지만, 그 아픔을 감당하기 두려워 서둘러 일상으로 도피한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무관하다고 여기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변명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사랑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예수의 고통은 사랑의 결과이고, 그의 사랑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불이(不二)적 감각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예수 일행이 나인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한 젊은이의 장례 행렬과 마주친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다. 남편에 이어 하나뿐인 아들마저 잃은 그 여자를 보며 예수는 “가엾은 마음”을 느꼈고, 그 여자에게 다가가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위로하고는, 그 젊은이를 다시 살려 냈다.
이 이야기에서 “가엾은 마음”으로 번역된 표현은 그 순간 예수가 느꼈을 마음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다. 공동번역은 이를 “측은해하는”으로, 개역개정은 “불쌍히 여기는”으로, 그리고 새번역은 “가엾이 여겨”로 옮겼다. 모두 뜻은 통하지만, 아들을 잃은 과부를 마주한 예수의 심정을 온전히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복음서가 사용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넘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가리킨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신체적 통증까지 수반하며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마음, 그것이 예수의 마음이다.
예수의 마음을 헤아리며, 생전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가르치고 몸소 보여 준 ‘눈물’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2016년 4월 16일, 지중해가 난민들의 죽음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 묘지”라 불리던 때, 교황은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난민캠프를 찾아 난민들을 돌보며 위로했다. 그리고 세 무슬림 난민 가족 12명과 함께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항공기 안에서 교황은 기자들에게 한 아프가니스탄 난민 소년이 그린 그림을 보여 주었다. 바다를 건너다 침몰한 배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난민들을 내려다보며 태양이 울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림을 손에 들고 교황이 말했다. “태양이 울 수 있다면 우리도 울 수 있습니다.” 이런 교황의 공감적 가르침을 사람들은 ‘눈물의 신학’이라 불렀다.
죌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사랑의 불능 상태’라고 했다. 이는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감각하는 것이 곧 사랑의 전제이자 목적임을 의미한다. 크리스 조던도 알바트로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느낀 슬픔이 곧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성주간과 함께 시작하는 올해 4월은 고통의 달이다. 제주 4·3 학살의 오래된 상흔, 4·16 세월호 참사의 지속되는 상처, 팔레스타인과 이란의 현재적 폭력, 미드웨이섬 알바트로스들의 무참한 죽음... 세상이 온통 십자가다. 사회적·생태적 십자가에 달린 모든 존재의 고통을 애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며 슬퍼하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불의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며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하는 것, 그것이 성주간에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의 마음이다.
정경일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를 비교 연구했으며 사회적 영성을 탐구하고 있다.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도학사 원장으로 일하면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4.16생명안전공원예배팀, 한국민중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픔 넘어 : 고통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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