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안중근의 신앙과 뤼순 감옥 100년의 유해 추적기
십자가와 총탄, 제국주의 법정에 선 평화의 사도
1910년 2월, 살을 에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던 뤼순(旅順) 관동도독부 지방 법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사건의 공판장 한 편에, 예리한 눈빛으로 피고인석을 응시하며 화구를 움직이던 일본인이 있었다. <요동신보>(遼東新報)의 기자이자 우키요에 화가, 고마쓰 도시무네(小松利宗, 본명은 小松元吾)였다. 그의 붓끝이 향한 곳에는 서른두 살 청년 안중근이 있었다. 사형을 앞둔 죄수였음에도 안중근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당당한 자태로 법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안중근, 세례명 '도마(Thomas)'. 안중근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가장 굳건한 상징이자, 한국 가톨릭 교회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뼈아픈 오해와 철저한 외면을 감내해야 했던 비극적 신앙인이었다. 그가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기저에는 만민 평등과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하는 가톨릭 신앙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야욕이 동아시아를 집어삼키던 야만의 시대에, 서구의 제도권 교회는 그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평화를 위해 기꺼이 총탄을 쥐어야 했던 신앙인 안중근의 고뇌와 그를 외면했던 교회의 아픈 역사, 그리고 100년 넘도록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안중근의 유해를 추적하는 기나긴 여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마'의 탄생, 신앙과 민족 계몽의 교차점
안중근의 청년기는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외세가 밀려드는 격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10대 후반, 동학농민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일찍이 무력의 충돌과 민중의 고통을 목도했다. 이후 1897년, 19세 안중근은 황해도 청계동 성당에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청년 안중근에게 가톨릭은 내세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느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는 신분제의 잔재와 제국주의의 침탈로 고통받는 조선 민중을 깨우는 가장 강력한 사상적 무기였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자 맹렬한 전도사로서 빌렘 신부를 도와 교리 전파에 앞장섰고,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만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살릴 길이라 믿었다.
그는 가톨릭계 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의 반대로 좌절을 겪는다. 서양 선교사들의 시각에서 식민지 백성의 정치적 각성은 포교 활동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교회의 방관 속에서도 안중근은 스스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교육 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신앙은 성당의 담장을 넘어, 민족의 생존이라는 참혹한 현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얼빈의 총성, 그리고 제국주의 교회의 파문(破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1910년대 연해주 신한촌에서 간행된 사료 <애국혼>(愛國魂)은 "할빈저자 아참날에 륙혈포성 꽹꽹하니"라는 노랫말로 그날의 쾌거를 기록한다.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한 이 거룩한 의거는 동아시아 역사를 뒤흔들었지만, 동시에 안중근과 한국 천주교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의 최고 수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이토 저격을 십계명 중 '살인하지 말라'를 어긴 명백한 범죄로 규정했다. 그는 <뮈텔 주교 일기>를 통해 안중근의 행위를 비난하며, 즉각 천주교에서 파문하는 조치를 결정했다. 여기에는 제국주의 시대 서구 종교가 지녔던 뼈아픈 한계가 깔려 있었다. 뮈텔 주교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으나, 식민지 조선의 척박한 현실에서 이는 곧 일제 권력에 순응하여 교회의 제도적 안위와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정치적 타협이었다. 피지배 민족의 고통과 정당한 방어권은 '살인'이라는 교조적인 교리 앞에서 묵살되었다. 교회는 가장 위대한 신앙인을 스스로 내치며 일제의 만행에 침묵을 택했다.
뤼순 법정의 사자후와 옥중의 고해 성사
뤼순 법정으로 이송된 안중근은 일본 법관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애국혼>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재판정에서 대한 독립 파괴, 명성 황후 시해, 군대 해산, 무고한 백성 학살 등 "이등의 죄악 15조"를 낱낱이 꾸짖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성을 온 천하에 고발했다. 우키요에 화가 고마쓰 도시무네가 스케치북에 담아내려 했던 안중근의 당당함은 바로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정당한 전쟁의 포로임을 선언하는 숭고한 자태였다.
사형 선고가 내려진 뒤,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 한 명으로서 죽기 전에 마지막 성사를 간청했다. 뮈텔 주교는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이 비정한 엄명 앞에서도 종교적 양심을 저버리지 못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빌렘 신부였다.
빌렘 신부는 주교의 명령을 거역하고 중징계를 각오한 채 홀로 뤼순 감옥으로 향했다. 1910년 3월 8일, 차가운 면회실에서 안중근은 고해 성사를 받았다. 빌렘 신부가 훗날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안중근은 극도로 평온했으며 깊은 신앙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인적 원한이 아닌 국가와 평화를 위한 군인의 의무였음을 고백한 그를 향해, 빌렘 신부는 "그는 진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뤼순 감옥의 차가운 돌벽은 권력에 순응한 제도권 교회와 사목적 양심을 지킨 참된 신앙이 정면으로 충돌한 역사적 심판대였다.
성지화(聖地化)의 공포와 차가운 암장(暗葬)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은 찾아온 두 아우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사후에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동양 평화를 감시하겠다는 결연한 항전 선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유족에게 안중근의 유해 인도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애국혼>은 그날의 참담함을 생생하게 기록해 놓았다. 유해를 돌려받지 못한 가족들은 이국땅의 옥문 밖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통곡해야만 했다.
안중근의 유언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사형수의 시신은 원래라면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나 지켜지지 않았다. 일제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안중근 묘역의 '성지화'(聖地化)였다. 그의 유해를 내어 줄 경우, 무덤 자체가 거대한 항일 투쟁의 구심점이 될 것을 관동도독부와 조선통감부는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결국 일제는 사형수의 시신 처리를 규정한 감옥법을 핑계로, 그의 육신을 뤼순 감옥 뒤편 야산 공동 묘지에 몰래 묻어 버렸다. 어떠한 표식도 남기지 않은 철저한 암장(暗葬)이었다. <안중근 사형 집행 보고서>에는 “감옥 소관 묘지에 매장했다”는 기만적인 단 한 줄만 남겨졌다. 영웅의 얼굴이 스케치로 남는 것조차 통제했던 일본 정부는 끝내 그의 무덤마저 세상에서 지워 버렸다.
금서(禁書)가 된 헌사, 억압 속에 피어난 기억 투쟁
무덤조차 지워 버린 제국주의의 서슬 퍼런 탄압 속에서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기억은 끈질기게 전승되었다. 1931년에 삼중당서점(三中堂書店)이 간행한 <하얼빈 역두의 총성>(哈爾賓驛頭의 銃聲)이 그 생생한 증거다. 이 책은 1931년 5월 1일, 서재수 대표가 삼중당을 설립하고 세상에 내놓은 역사적인 출판물이다. 당시 일제의 폭압적인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발행인과 저자의 이름을 ‘이태호’라는 가공 또는 대리인의 이름으로 우회 표기해야만 했다. 출판 직후부터 서재수 대표는 일본 경찰서에 끌려다니는 고초를 겪었으며, 결국 책은 일제에 의해 발행 및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 책의 원작은 놀랍게도 일본의 진보적 작가 하세가와 가이타로(長谷川海太郎, 필명은 谷譲次)가 쓴 일본어 희곡 <안중근>(安重根)을 조선어로 번역하고 각색한 것이다. 작품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직전, 하얼빈역 주변에서 전개되는 안중근 의사의 행적과 인간적인 갈등, 그리고 결단의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억압의 시대에 금서가 된 이 얇지만 강한 책은 오히려 항일 비밀결사 조직의 교재로 활용되며 청년들의 가슴속에 잊히지 않을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종이로 지은 사당', 남겨진 자들의 애달픈 헌사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안 의사의 유해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은 광복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에는 죽산 안씨 문중의 사당인 '만수사'가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장흥의 안씨 문중과 지역 유지들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여전히 이국땅에 방치되어 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사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뼈저린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에 비록 안 의사(순흥 안씨)와 본관은 다르나 같은 뿌리를 둔 후손으로서 영혼이라도 편히 모셔야 한다는 마음을 모아, 만수사 경내에 '해동사(海東祠)'라는 한 칸짜리 사당을 건립했다.
1955년 10월 27일, 해동사의 위패 봉안식에는 안중근 의사의 딸 안현생 여사가 아버지의 영정을, 조카 안춘생 선생이 위패를 품에 안고 참석했다. 국가가 나서기도 전에, 유가족과 지역민이 뜻을 모아 만든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안중근 의사의 사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해동사를 건립하고 지켜 온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펴낸 책이 바로 안학식(安鶴植) 편저, <의사 안중근 전기>(義士安重根傳記, 1964년)다. 편저자 안학식은 흩어져 있던 안 의사의 유언, 유시, 공판 기록 등을 집대성하여 이 전기를 편찬함으로써, 혼란기를 겪은 후대에게 안 의사의 참된 사상을 전하려 했다. 육신을 모시지 못한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 남겨진 자들이 세운 또 하나의 '종이로 지은 사당'인 셈이다.
100년의 지층을 파헤치다, 은폐된 사료의 해독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다. 식민지 시대는 끝났지만, 안중근 의사는 여전히 차가운 뤼순의 흙더미 아래 갇혀 있다. 그러나 일제가 파 놓은 은폐의 함정을 돌파하려는 현대 역사학계의 치열한 추적은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일제가 남긴 은폐된 기밀 ‘문헌의 해독’이다. 표면적인 사형 집행 보고서의 여백을 메우기 위해 한⋅중⋅일의 학자들은 일본 외무성과 방위성 문서고 깊숙이 잠들어 있는 사료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1910년 3월 26일 전후로 관동도독부와 조선통감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보, 사형장 주변의 경비 병력 배치도, 심지어 매장에 사용된 관의 규격과 비용 지출 내역을 담은 영수증 한 장까지 유해의 위치를 확인할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일제가 철저히 숨기려 했던 진실을 관헌 문서의 행간에서 찾아내는 이 작업은 단순히 육신을 찾아내는 발굴을 넘어 제국이 강제로 지워 버린 역사의 진실을 수복하는 과정이다.
더불어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값진 화해가 이루어졌다. 1993년, 고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이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정당방위였음을 공식 선언하며 과거 교회의 오판을 반성했다. 사형 집행 83년 만에 ‘살인자’의 굴레를 벗고 참된 신앙인 도마 안중근으로 온전히 복권된 것이다.
끝나지 않은 추모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평화의 사도
안중근 의사가 형장으로 걸어갈 때 가슴에 품었던 작은 십자가는, 불의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평화와 정의를 갈구했던 한 인간의 양심을 상징한다. 그의 숭고한 헌신은 1910년대 연해주 동포들이 부르던 노래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슬픈눈물 슬픈노래 혈누충혼 추도하세.
의사의사 안 의사여 부듸부듸 눈감으오.
동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지만,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던 유언은 우리 세대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과거 일제의 기밀문서를 들여다보며 뤼순의 은폐된 역사를 해독해 내려는 우리의 치열한 추적은, 고독했던 평화의 사도를 마침내 고국으로 모셔 오는 날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안중근의 시계는 여전히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 멈춰 있다.
[부록] 안 의사 추도가 현대어 풀이
1절
충의롭고 열렬한 안 의사는 대한 국민의 대표로다.
하얼빈 거리 아침에 육혈포 소리가 탕탕 울리니.
후렴
영웅일세 영웅일세, 만고의 영웅 안 의사라.
나라 위해 바친 몸은 죽어서도 영광이라.
2절
5조약(을사늑약)과 7협약(정미 7조약)을 억지로 체결하던
원수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가 외로운 귀신이 될 줄 누가 알았으리오.
3절
양국 군사 흩어지고 천하가 다 놀랐네.
나라의 수치를 씻었으니 장하고도 통쾌하도다.
4절
국권 회복의 날이 그날이요, 민족의 원수를 갚을 때가 이때로다.
아름답고 빛나는 이름, 천추만세에 길이 전해지리라.
5절
협사와 협정은 장난이며, 어찌 일개 필부의 형벌을 당할쏘냐.
우리를 위해 몸을 바쳤으니 그 누가 슬퍼하지 않으랴.
6절
슬픈 눈물, 슬픈 노래로 피눈물 나는 충혼을 추도하세.
의사, 의사, 안 의사여, 부디부디 편히 눈을 감으시오.
7절
최면암(최익현)과 민충정(민영환) 선생은 천당에서 환영하고,
살아 있는 우리 동포 형제들이 그 뒤를 잇겠네.
8절
제2, 제3의 이토가 또 있을까 근심하지 마옵시고,
우리들의 잘 드는 칼로 만 명의 이토라도 다 당해 내리라.
9절
만세 만세 만만세는 대한제국 만만세라.
만세 만세 만만세는 안 의사의 만만세라.

이규수
전 히토쓰바시대학 특임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