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정신의 ‘르-네상스’, 중세 사회의 격변, 그리고 마르틴 루터

2026-03-23     이찬수

“달도 차면 기운다”

노자의 도덕경에 “물장즉노”(物壯則老)라는 말이 나온다. ‘만물이 장성하면 노쇠한다’는 뜻이다. “해가 중천에 이르면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진다”(日中則昃, 月盈則食)는 주역의 말도 같은 뜻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우리의 노랫말을 잘 보여 주던 시대가 서양의 중세였다. 교회가 일상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 중심적이지 않았던 시대에 대한 향수가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대표적이다.

인문주의의 ‘부-흥’

14세기 이탈리아에는 자신들의 조상인 로마 제국 시대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향수가 일어났다. 비잔티움 제국(당시의 동로마 제국, 오늘의 그리스 지역)이 이슬람 문화권인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하자(1453), 비잔티움의 학자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에는 한동안 느슨했던 그리스의 철학과 예술, 그리스어 성경 등 옛 문화가 다시 유입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재발견하게 되었고, 고전들을 탐구하면서 인간의 가치와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인문주의적 흐름이 커졌다. 14-16세기에 거셌던 이 흐름을 ‘르네상스’라고 한다. 우리말로 ‘부-흥’(르-네상스)쯤 된다. 신 지향의 세계를 지탱하는 교회 중심주의를 벗어나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되살리려는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 상인과 금융업자들의 후원으로 인간에게 직접 소용이 되는 학문, 기술, 예술을 발전시키는 분위기가 생겼다.

예술 영역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화가나 조각가들이 인간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발표했다. 신이나 내세 혹은 신성한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노골적인 듯 풍자적으로 묘사한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1353), 정치를 도덕으로부터 분리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능한 정치 지도자론을 펼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년 집필, 필사본 유통, 1532년 출판)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세계와 사물을 대상화해서 보는 인간적 탐구 능력이 신장되면서, 16세기에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 지동설을 주창했다. 이것은 지구중심적 천동설을 당연하게 여긴 당시 교회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성경 다시 보기

당시 교회의 사제들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불가타역)을 읽었는데 – 신약 성경의 원전은 그리스어다. 1516년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대조해 성경을 새로 번역했다. 많은 사람이 라틴어 성경과 그리스어 원문의 차이를 확인하게 되었고, 교회의 성경 해석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예를 들면 예수의 일성인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에서의 “회개하여라”가 당시 라틴어 성경에서는 “파이니텐시암 아지테(Paenitentiam agite)”로 되어 있었고 “고해/고해성사를 행하라”로 이해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이 구절의 그리스어 “메타노에이테(μετανοεῖτε)”는 외적인 의례, 사법적 의식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회개는 고해소 같은 물리적 장소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혹은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나중에 개혁자 루터가 교회 개혁을 위한 '95개 논제'를 쓸 때 제1항에서부터 내적 회개를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1.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태 4,17], 그분은 믿는 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2. 이 단어는 사제가 집행하는 고해 성사와 속죄 성사, 즉 참회의 성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4-16세기 인문주의적 분위기는 당시 권력의 주류이자 실세였던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흐름을 키웠다. 어리석은 현자들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愚神禮讚/Moriae Encomium, 1511)이 당시 교회와 신학에 대한 지식인들의 자세를 우회적으로 잘 보여 주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루터, 츠빙글리,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등장했다.

면벌부 비판과 개혁이라는 격변

이들은 교회가 발행한 ‘면벌부’를 비판했다. 본래 면벌부(免罰符, Indulgentia)는 고해 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은 뒤 남아 있는 벌을 면해 주는 문서다. 대사부(大赦符)라고도 부른다. 교회는 면제된 벌을 기도나 선한 일로 갚아 나가도록 권면했다. 이것이 점차 습관화하면서 교회가 면벌부를 거래하는 일이 생겼고, 로마에 대성당을 지으면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면벌부를 판매하는 일도 잦아졌다. “연보궤에 돈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상술 같은 문구가 면벌부와 함께 퍼졌다. 교회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타락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이자 수사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가 교회 지향적이면서 개혁적 내용을 담은 '95개 논제'(95 Thesen)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루터 자신도 의도하지 못했던 큰 개혁의 불길로 번졌다. 루터는 면벌부에 대해 비판했다:

“27. 그들은 돈이 연보궤에 들어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인간적인 교리만을 설파합니다.” “연보궤에서 돈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면 탐욕과 욕심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중보할 때, 그 결과는 오직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82. 예를 들어, "교황이 교회를 짓는 데 쓸데없는 돈을 위해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면서, 거룩한 사랑과 그곳에 있는 영혼들의 절박한 필요를 위해 연옥을 비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자의 이유가 가장 정당하고, 후자의 이유는 가장 사소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36. 진심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감에서 완전히 사면받을 권리가 있습니다.”(https://www.britannica.com/event/Ninety-five-Theses)

이런 비판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면서 당시 서방 교회는 기존 흐름을 이어 가는 로마 가톨릭(보편적 교회라는 뜻)과 새로운 목소리를 내던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뜻)로 분리되었다.

(왼쪽부터)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그림 출처 = commons.wikimedia.org, Flickr)

루터의 주장들

기존의 교회는 인간의 선행이 신의 은총에 자유롭게 협력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선행이라는 것이 교회의 면벌부나 재정적 기여에 도움이 되는 행위로 전락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노력보다는 하느님의 은총과 그에 대한 믿음을 더 강조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는 그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직 믿음으로”를 구호처럼 강조했다.

이것은 교리에 대한 신봉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행위로서의 믿음이 구원의 척도라는 것이었다. 내적 믿음에 대한 강조는 서양 사상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계기였다. 근대적 주체성을 낳은 씨앗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체계적 교리보다는 본래의 성경에서 진리의 기준을 다시 보려 했고, 이런 자세와 요구는 교회 자체보다는 교회의 구성원인 인간에 대한 존중처럼 여겨졌다.

루터의 정신은 1520년대에 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여기에다가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칼뱅(1509-64)이 주장한 신의 구원 예정설, 소명으로서의 직업적 투신과 같은 가르침은 스위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교회로 분리 독립하는 데에 사상적 기초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파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회’는 바로 이 칼뱅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생긴 종파라고 할 수 있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교회의 분리 사건에 대해 로마의 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63)를 열어 분리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기존 신앙의 쇄신과 단합을 도모했다. 특히 1534년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은 ‘예수회’를 창설하면서 가톨릭적 신앙생활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운동을 벌였다. 예수회 회원들은 프로테스탄트가 급속히 퍼져 나간 북유럽 지역에 비해 남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성을 회복시키면서 가톨릭의 본래 전통을 전 세계 많은 이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담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흔히 반종교 개혁(Counter Reformation)이라 하는데,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가톨릭 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다른 판단 기준의 등장

우리말로는 ‘종교 개혁’이라 적지만, 영어나 독일어로는 'Reformation'이다. 직역하면 ‘재형성’ 혹은 ‘개혁’을 의미한다. 이 표현 그대로 유럽 사회를 전반적으로 개혁시킨 토대 정도로 보는 것이 좋다. ‘종교 개혁’이라는 우리말의 ‘종교’ 때문에 개혁이 특정 종단 내부의 사건인 것처럼 축소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적절치 않다. 영어의 대문자를 살리고 싶으면, ‘대개혁’ 정도로 의역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진리의 판단 기준이 교회와 제도에 있던 시절,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같은 이는 그에 저항하면서 진리의 판단 기준을 인간의 내면 안에서 보고자 했다. 전술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개혁의 표어는 인간적 주체성의 신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 등을 강조한 르네상스의 적극적 인문 정신에 비하면, ‘오직 신의 은총’을 더불어 강조했던 개혁가들의 인간론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관행을 극복하는 개혁적 힘 자체는 르네상스의 정신과 일정 부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를 위시해 개혁가들의 이런 자세는 신 지향적이고 교회 중심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중세’를 뒤흔들었다. 중세 유럽 사회가 혼란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전쟁까지 벌어졌다. 이른바 ‘30년 전쟁’(Dreißigjähriger Krieg, 1618-48)이었다. 분열되어 가던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지향적 합스부르크 가문과 개신교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제후국들이 30년간 벌인 전쟁이었다. 최대 8백여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담한 사건이었다. 중세의 끝자락을 보여 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다 30년 전쟁은 뜻밖의 결실로 이어졌다. 전후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다국 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맺어졌고, 가톨릭과 개신교(루터파)는 각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 대신 종교는 국가의 하위 범주가 되었다. 종교적 다양성이 국가의 공식적인 통치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30년간 전쟁을 하면서 스스로 국가의 하위 범주로 전락하는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칙서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열정'(Zelo Domus Dei)을 통해 교회의 권위와 재산을 훼손하는 이 조약은 “법적으로 무효이며, 무익하고, 불의하고, 저주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칙서는 정치적 권력이 종교적 권위로부터 분리되고, 종교적 권력은 위축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주요 문헌이 되었다.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은 유럽이 종교적 동질성을 강요하던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국가(Nation-state) 개념의 기초를 다지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찬수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강의하고 연구했으며, 아시아종교평화학회를 창립해 부회장으로 봉사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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