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냉소를 바라보는 '마음 자세'
대학 교정에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만난다. 내가 살아온 경험과 교차하는 지점이 많을 듯한 학생과는 첫 만남이라 해도 대화를 꺼내기가 수월하다. 한국인 여성이며, 탈권위적, 비주류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는 내게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그룹은 백인 남성, 그중에서도 보수적인 그리스도인 학생들이다. 나는 수업에 있어 지식 전달보다 관계 형성이 먼저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을 마주할 때면 서로의 선입견 때문에 관계가 뿌리내리기도 전에 ‘캔슬’ 될까 봐, 나도 모르게 방어벽을 세우게 된다.
지지난 학기에도 그런 학생들이 있었다. 강의실 맨 뒷줄에 앉아 나를 노려보던 우람한 체격의 운동부 남학생 세 명이었다. 토론에는 좀처럼 참여하지 않고 줄곧 침묵을 지키며, 정형화된 신앙 고백문 같은 페이퍼만 제출하던 이 친구들의 묵직한 존재감은 학기 초부터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났는데도 이들이 나가지 않고 뒤에서 서로 눈짓을 하며 머뭇거리더니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위세에 눌려 은근 공포를 느끼던 참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건넸다. “저희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수업 시간에 말을 잘 못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무뚝뚝한 얼굴 뒤에 이렇듯 수줍은 소년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청년 보수: 정체성 위기와 '카운터 컬처'로서의 보수 이데올로기
하지만 내가 이 그룹의 학생들에게 느끼는 긴장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청년 남성들의 보수화는 이미 여러 문화권에서 일시적 현상을 넘어, 하나의 정치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도 2025년 대선을 전후해 20대 남성의 70퍼센트 이상이 보수 진영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고, 서부지법 사태에서 보이듯 그 움직임은 점차 조직화되며 때로는 폭력적인 양상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빈부 격차와 취업난, 불안정한 노동 시장, 높은 주거 비용 등 모두의 삶을 짓누르는 생존의 압박이 자리한다. 좁아진 기회 속에서 경쟁이 격화되면서, 일부 남성 사이에서는 여성과 소수자 우대 정책을 '공정성'을 해치는 역차별이자 자신의 몫을 빼앗는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들에게 보수는 기득권 세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권리를 되찾으려는 정치적 선택이 된 셈이다.
미국의 청년 보수화는 한국의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백인, 남성, 그리스도인'이라는 세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이 현상은 1960년대 민권 운동 이후 사회문화적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한때 '백인, 남성, 그리스도인'이라는 범주는 사회적 규범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의 확산과 함께 페미니즘, 비판적 인종 이론, 퀴어 스터디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이 범주를 떠받치던 서구 중심주의와 가부장적 질서, 이성애 중심성은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고등 교육이 점차 세속화되면서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지적으로 미숙한' 태도로 간주되는 분위기 또한 형성되었다. 일부 학생은 이를 단순한 관점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이 문화적 중심에서 밀려나는 소외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급격히 후퇴하고 있지만, 캠퍼스 내 다양성(DEI) 프로그램이 확대되었던 2000년대 후반에서 2020년 전후의 분위기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공정성 담론과도 맞닿아 있는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오직 개인의 성취만이 보상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하며, 인종이나 젠더를 고려하는 다양성 정책을 구조적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 부당한 특혜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대학이 자신을 ‘특권층’이나 ‘보이지 않는 가해자’로 규정한다고 느끼는 순간, 일부 학생은 수치심과 반발을 느끼며 스스로를 “역차별의 피해자”로 여기게 된다. 자신의 발언이 언제든 ‘캔슬’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침묵을 선택한 학생들은, 무너진 자긍심 살려 주는 언어와 공동체를 제공하는 보수 단체들을 일종의 안식처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 백인 남성 청년의 보수화는 확고한 이념적 선택이라기보다 정체성 위기를 감지한 청년들의 인정 투쟁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지속되는 생존 압박과 무한 경쟁의 피로 속에서 오히려 기존 권위의 보호를 선택하는 여학생과 유색 인종, 이주민 학생들의 '전략적 보수화' 경향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나중에 따로 다루어 보겠다.
청년 보수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청년층의 정치 반응 방식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책 선택의 이동을 넘어, 정치에 대한 인식과 표현의 변화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거대 담론의 붕괴를 목격한 일부 청년은 '허울뿐인 정의'보다 노골적인 실리 추구를 더 진정성 있게 받아들인다. 이들은 보수를 더 이상 고리타분한 전통의 수호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과 미디어의 주류 규범이 된 ‘정치적 올바름(PC)’과 도덕적 훈계에 맞서는, ‘힙한’ 카운터 컬처(대항 문화)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정서적 전복은 정치적 엄숙주의를 비트는 ‘밈’ 문화 속에서 확연해진다. 이제 정치는 서로 토론하며 공공 담론을 만들어 가야 할 사안이 아닌, 짧고 강한 ‘짤’과 ‘드립’의 타격감으로 소비되는 디지털 콘텐츠가 되어 버렸다. ‘좋아요’와 공유를 통해 소속을 확인하는 이 환경에서는 복잡한 중간 지대가 설 자리를 잃고, 자극적인 메시지만이 알고리즘을 타고 빠르게 확산된다.
성전(Holy War)이 된 정치: 근본주의/복음주의 종교와 불안의 결합
이러한 보수화 흐름에 정당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부여하며 보수를 넘어 극우로 이끄는 토양이 바로 정치화된 그리스도교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백인 그리스도교 민족주의’(White Christian Nationalism)는 미국이 신이 선택한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백인 중심의 '인종적 순혈주의'와 근본주의/복음주의를 결합한 이데올로기다. 이 흐름이 강조하는 성경적 위계와 가부장적 권위는 가치관 혼란을 겪는 청년들에게 비교적 분명한 질서와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종교와 결합할 때 정치는 신의 질서를 수호하는 ‘성전’(Holy War)의 전장이 된다. 자신의 신앙적 가치관이 혐오 표현으로 낙인 찍힌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이들은 그 고립감을 일종의 ‘순교자적 서사’로 바꾸어 서로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배타적 민족주의와 근본주의/복음주의 종교의 결합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는 실로 강력하다. 생존 조건이 불안정한 이들에게 극우 정치는 단순하고 분명한 논리를 제공하며,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선명한 적대 관계로 단순화하여 하나의 방향, 곧 ‘혐오’로 묶어 낸다. 여기에 종교는 단순한 정치적 언어를 넘어 삶의 목적과 열정, 그리고 실천의 에토스(정신적 가치관·행동 지침)를 제공한다. 개인의 불안과 분노가 신앙의 서사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정치적 선택이 신의 질서를 지키는 사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보수 싱크 탱크와 종교 단체가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자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은 청년 활동가 양성, 미디어 플랫폼 구축, 그리고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동체 공간에 집중적으로 자본을 투입하여 개인의 불안과 불만을 정치적 에너지로 조직해 낸다. 그 결과 청년들은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소외된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함께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이미 검증된 자원과 권력이 작동하는 위계적 질서로 회귀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 언급한 백인 남성 대학생들 사례만으로 청년 보수화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변화한 청년 정치 지형을 보다 정밀하게 읽어 내려면, 대학 교정 내의 ‘역차별’ 담론을 넘어 세대 내부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격차와 정서적 허기짐을 살펴보는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능력주의의 보상을 기대하며 엘리트 대학에 입학한 남성이 느끼는 ‘역차별’의 감정과, 대학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지역 사회에서 ‘공간적 배제’를 경험하는 비진학 청년의 절망은 같은 보수라 해도 그 결이 전혀 다르다. 또한 세속화된 교정에서 자신의 신앙이 조롱받는다고 느끼는 그리스도인 청년의 문화적 고립감이나, 경쟁에 지쳐 권위적 질서로 도피하는 여학생과 유색 인종, 이주민 학생의 ‘전략적 보수화’ 역시 서로 다른 결핍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청년 남성들을 하나로 묶어 ‘기득권적 지배자’나 ‘역차별 피해자’로 규정하는 양극의 낙인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경화라는 외피 아래 숨겨진 미시적인 절망과 정서적 고립을 직시할 때, 비로소 그들을 ‘문제적 집단’으로 고정해 온 시선을 넘어 다른 차원의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다른 시선의 필요성: 이냐시오 성인의 마음 자세와 같이 변화하는 환대
이런 맥락에서 나는, 청년 보수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언어뿐 아니라 영성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년 보수화를 사회학과 정치학의 틀로 분석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분석은 관계를 대신하지 못하며, 성찰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현상과 구조를 설명하는 언어가 곧 사람을 만지고 마음을 듣는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성적 접근은 분석을 포기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오히려 분석을 넘어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초대다.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에서 말한 “마음 자세”(Ignatian Presupposition)다. 상대의 말이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거나 때로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에조차, 그 말 뒤에 숨은 선한 지향을 찾아보려는 태도다.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선함을 바라보는 일은 감상적인 포용이 아니다. 가장 취약한 자리에서 꿈틀대는 두려움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읽어 내는 사랑의 시선이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것이 ‘영적 식별,’ 즉 모든 충동이 같은 뿌리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청년 보수화 이면에 있는 분노, 수치심, 냉소, 그리고 도덕적 확신을 섬세하게 읽어 내지 못하고 한 덩어리로 판단해 버린다면, 식별 대신 비난을 앞세우게 된다. 영성적 접근은 청년의 마음 어디에서 생명이 살아나고, 어디에서 움츠러드는지를 묻게 한다.
백인 남성 그리스도인을 '포용'하기보다, 여전히 차별을 경험하는 여성과 성소수자, 유색 인종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삶의 주권을 세워 나가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당한 지적이다. 스스로 위기감을 느낀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서 있으며,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득권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정체성이든 개개인의 ‘얼굴’을 지운 채 특정 범주로 묶어 악마화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추상적인 집단으로 묶어 그 얼굴을 지우는 순간, 우리는 그들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마주할 기회마저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영성적 접근은 청년들만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문제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더 깊은 성찰을 요청한다. 청년 보수화를 단지 “저들이 바뀌어야 할 문제”로 규정하는 순간, 대화는 훈계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상대의 말 안에서 선의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여겨 온 확신과, 규범적이라 믿어 온 정체성을 돌아보게 된다. 상대를 환대하는 일은 결국 내 안의 불안과 지배욕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시선이 조금씩 맑아질 때, 우리는 서로를 바꾸려 하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한때 나를 긴장하게 했던 그 운동부 학생 셋을 교정에서 가끔 만난다. 여전히 셋이 함께 다니고, 여전히 말수가 적고 쑥스러움이 앞서 긴 이야기를 이어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Professor Cho!” 하고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눈에 서먹함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과 내가 바라는 세상 사이의 거리는 아직 멀고도 멀 것이다. 마음을 트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까지 우리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우린 서로를 피하지는 않는다. 눈을 맞추고 서로의 안에서 따뜻한 속사람을 발견할 만큼은 가까워졌다.
조민아
신학자.
조지타운 대학교 신학과 종교학부 교수(The Department of Theology and Religious Studies,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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