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반딧불이

2026-03-03     박기호

이 글은 <산위의마을> 46호(예수살이공동체)에 실린 글입니다.

저는 지난해 11월, 조천읍 신촌리의 겸애헌(兼愛軒)에서 제주살이를 마무리했습니다. 5년 동안 숙소를 내주시고 편의를 돌봐 주신 고영두 이냐시오, 김아녜스 내외분 가족과 제주의 길벗이 되어 주신 김스테판 신부님과 고 강미순 라파엘, 강수봉 요한 더부네와 강스테판 신부님, 정순자 엘리사벳, 이정신 요한, 고맙게도 서울까지 동행코자 마중 오신 동창 강승한, 박광원 신부님을 모시고 감사 미사를 봉헌하고 상경했습니다. 예수살이 밀알의집도 가까이 있는 수유리 국립 4.19 묘역 마을에서 서울살이를 다시 시작합니다.

2006년 2월 23일 마당에 감나무가 있던 합정동 밀알의집에서 더부네들과 조촐한 송별 미사를 마치고, ‘산위의마을’을 향해 5박6일 서울-단양 도보 여행을 떠났던 날에서 꼭 20년 만입니다. 국립 4.19 묘지 영령들께 참배 드렸습니다.

시편의 축원은 “뿌릴 씨를 들고서 울며 가던 그들은, 곡식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돌아오리라!” 하였는데, 나의 늙은 몸은 예수살이도 산위의마을도 사제로서의 꿈도 사랑도 모든 몸짓도 이제 저수지 갈대 끝에 붙은 잠자리 허물처럼 바람에 춤추는 듯합니다. 내 능력의 결핍과 깜냥의 무게가 너무 가볍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주님! 당신 제단에 들고 온 파송의 결실은 늙은 몸뚱이 하나뿐입니다. 나의 주님!”

봉선화의 서원과 좌절

중학교를 마칠 무렵 실업계 진학이 불편했던 제 몸은 1967년 생애 처음으로 서울에 담겼습니다. 동대문에서 북아현동 굴레방다리까지 전차 통학을 했는데 적응해 가는 생활들이 낯설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첫 학기 4월, 부활절이 막 지난 그 날은 4.19 혁명 기념일이었고, 고려대 학생들의 4.19 기념 마라톤 대회 뉴스가 있었지만, 우리는 고등학교라서인지 어떤 행사도 없었습니다. 저는 오전 수업 후 조퇴를 하고선 수유리 4.19 묘지를 찾아갔습니다. 서울 가면 꼭 가 보고 싶던 곳이었어요. 대학생 형상의 동상들과 높이 솟은 탑과 부조물, 작은 묘비들이 촘촘히 박힌 공동묘지는 놀라운 느낌과 비장한 자부심을 주었습니다. 마산 앞바다 김주열 열사의 묘비 앞에서는 너무 감격스러워 엎드려 절을 올렸습니다.   

‘봉안당’(奉安堂)에 들어선 순간 흑백 사진에 담긴 열사 수백 명의 영정 앞에 얼어붙었습니다.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이승만 경찰의 총탄에 숨져 갔던 열사들은 용맹한 청장년의 얼굴이 아니라 노인에서 검정 모자의 중고등학생, 하얀 옷깃 교복 여학생에 초등학생까지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맞이했습니다. 순간 저는 완전 무아경의 황홀 상태에 빠졌습니다. 열사분들은 손가락을 들어 나를 지목하면서 ‘너는, 너는....!’ 하시는 것 같았고,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민주주의, 역사.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 용감하기를 봉헌드렸습니다.

한 무리 청장년이 봉안당 앞에서 참배 행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 뒷열에 끼어 함께 내려가다가 누군가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를 따라 함께 불렀는데, 모두 비통한 흐느낌으로 이루어진 합창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저는 '내 인생에 운명적으로 받은 은총과 축복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한결같이 “어딜 가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참말로 내가 속한 집단은 한결같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학했던 학창 시절이나 길을 찾지 못해 헤맨 청년 시절이나 신학교에서나 본당 사제 생활에서나. 그리고 예수살이와 산위의마을에서도 나에게 성품이 좋은 교우들을 선물로 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주님께서 너무 잘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예수 추종의 길, 함께 걷는 제자도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넘은 추종의 깃발!’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도’(弟子道) 개념이며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의 본질입니다. 제자도에의 충실성이 ‘공동체 영성의 사회화 운동’이라고 믿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의 실제적 실현의 길이라는 믿음입니다. 그 길에 함께 가담한 더부네들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산위의마을은 척박한 환경 속에 담긴 고행의 삶이라 말해도 손상이 없을 생경한 수행 생활이었습니다. 묵묵히 함께한 가족들의 헌신적인 삶은 날마다 저의 성소에 소명 의식과 감동을 더해 주는 은총의 생수였습니다. 그러나 가족 자신들에게는 고행이었고, 머나먼 완덕의 고원을 향한 숨가쁜 산행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지의 목표를 향한 실험에 불과했고, 믿음에 대한 과유불급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진실한 예수 추종의 ‘제자도’, ‘신앙의 사회화’ 운동이라는 목적성 제시와 종교적 선동은 합당했으나 충분치 못했고, 필요한 은사의 토대인 지도력과 힘의 한계가 명료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을 가족들과 예수살이 전체를 당혹케 했던 일들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독수 피정에 들어갔고 깊은 성찰로 자신을 만났습니다.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행복하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소’와 ‘의무감’을 혼동한 믿음의 결과였음을 각성케 되었습니다. 너무 ‘의무감’에 사로잡힌 생활이었습니다. 안식년 한 번을 가져 본 적도 없이 왜 그토록 무겁게 살았을까? 쉼표 없는 음악과 같았던 내 삶을 통회하였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의무감의 일정과 심지어 믿음까지도 자유를 허락하는 방하(放下)의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그것이 제주 생활이 되었어요. 초원에 풀어놓은 제주 조랑말처럼 그런 자유함으로 생애 처음 여여(如如)롭게 지내면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무념무상의 명상을 즐기면서 느린 걸음을 지속하는 마음 개조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이제는 쥐뿔도 없으면서 선동은 열열이 하는 노망진 사제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똥벌레의 꿈

축복도 우환도 올 때는 떼거지로 몰려오는 법이지요. “예수살이 지금도 해?” “산위의마을은 어떻게 되었어?” 하는 질문을 지금도 종종 받습니다. 누구도 그만두기로 했다고 말한 바 없는데도 그런 질문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건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예수살이는 교회 내에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고자 하는 목표의 운동도 아니었고, 그런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단체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 예수살이는 인간학적 존재론과 닮은꼴이 되었습니다. 위대하면서도 비참하고 별처럼 빛나면서도 개똥벌레처럼 기어다니는 무력하면서도 의미 있는 신비체이며 생태계적 존재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까요? 첫째는 힘을 내 의기 투합해야 할 때인지, 의미 있는 쉼표를 찍어야 할 때인지를 보는 것이고, 둘째는 더부네 각자에게 어떤 협력의 힘이 있고 내어놓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지를 아는 것이고, 셋째는 성령의 은사가 불러 깨우시는지 귀를 여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운동합니다. 강약 고저 장단의 박자를 지닌 존재입니다. 20여 년 전과 비교해서 새로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음도, 공동체가 처음으로 마련한 밀알의집이 생겼다는 것도, 두레들이 살아 꿈틀댄다는 것도, 심지어 축소 지향의 결정으로 대처해 온 운영 방식들까지도 모두 우리의 선의와 믿음을 밝히려는 의지이며, 먼 길 날으려 준비하는 앨버트로스(신천옹) 새의 날갯짓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25년 세월을 노력했지만 반짝이는 작은 불빛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갸륵하고 위대한 하늘의 별이면서 동시에 숲속에서 무던한 시간을 견뎌 온 개똥벌레일 뿐입니다. 예수살이공동체는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빛입니다. 공동체를 돌보기에 애써 온 사랑하는 더부네들과 제자단 길벗들의 헌신에 감사합니다.

"난 내가 하늘의 별인 줄 알았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빛날 거니까..."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3월 1일, 서울 합정 전진상센터에서 예수살이공동체 창립 28주년 기념 미사 주례를 하고 있는 박기호 신부. ©경동현 기자

박기호 신부(다미아노)

예수살이공동체 길벗, 서울대교구 성사전담 사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