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피고인 윤석열에게 무기 징역을 선고합니다"

2026-02-25     이병호

1.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기고 나타나 국민을 현혹하여, 대명천지라고 생각했던 21세기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가, 때아닌 왕이 되기 위해 군을 동원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 전쟁까지 시도함으로써 국민 전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던 윤석열은, 국민들에 의해 내란이 저지된 지 444일째인 2026년 2월 19일 1심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형량을 두고 국민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사형도, 무기 징역도 아닌 세 번째 방식을 제안합니다. “피고인 윤석열에게 4,175만 4,444년 유기 징역을 선고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2. 고대 메포소타미아의 비문이나 점토판 기록을 보면, 대홍수 이전의 왕들이 통치한 기간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최초의 왕 '알룰림'은 2만 8,800년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여덟 명의 왕이 총 24만 1,200년 동안 통치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숫자는 생물학적 수명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였습니다. 왕의 통치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그만큼 '신의 축복'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왕의 통치 기간 1년은 그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의 수를 곱한 기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슷한 사상이 오늘날에도 미국 돈 1달러 짜리에 그림과 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그 지역과 주변 지역의 도시 국가들에 살고 있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우루크: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기원전 2900년경 전성기에는 성벽 내부와 주변 지역을 합쳐 약 5만 명에서 8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르:아브라함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이 도시는 기원전 2100년경 약 6만 명 인구를 유지했습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지형적 특성상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예리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도시 중 하나인 이곳은 초기 단계에 약 2,000명에서 3,000명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고고학자들은 다윗 시대 예루살렘(다윗성)의 상주 인구를 약 2,000명에서 5,000명 정도, 축제 때 모여드는 인파는 그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 시대, 그런 나라에서 백성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통치자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통치를 잘 못하면, 신은 그 죄를 무겁게 다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은 종결 부분에서 어떤 통치자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늘이 내리는 무시무시한 저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왕의 '이름'과 '기억'을 지워 버렸습니다. 그것을 기억의 단죄(Damnatio Memoriae)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역할을 못한 통치자를 '역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사후 세계에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사형보다 훨씬 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3. 이제 윤석열 피고인이 그렇게 좋아한 상형 문자 왕王에 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세 가로 줄은 각각 하늘, 인간, 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셋을 관통하는 세로 줄은 하늘(신)과 땅(백성) 사이에 서서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이가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뗄 수 없이 엮여 있는 것이 거룩할 성聖이라는 글자입니다. 맨 밑에는 ‘돋울 임’ 자인데, 원래는 사람이 발꿈치를 치켜들고 서 있는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위 왼쪽에는 귀를 뜻하는 이耳 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말을 상징하는 입 구口자가 있습니다. 사람이 까치발로 자신을 한껏 위로 치켜세우고, 귀를 기울여, 위에서 들려오는 (입으로 상징되는) 말을 잘 듣는 사람이 곧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왕은 가장 대표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왕은 성군聖君이고, 그 반대는 폭군暴君입니다. 여기서 폭暴이라는 글자는 동물을 잡아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겨 햇볕 아래에서 말리는 모양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잔인하고 섬뜩한 광경이 연상되지요.

이런 배경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폭군은 국민 전체의 수에 해당하는 4,175만 4,444년의 유기 징역형이 제일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수의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내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내리라.”(에제 34,2-3.10)

바로 그때문에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참된 목자이다. 참된 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

4.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면, 우리가 방금 들은 성서의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제1 독서에서 들은 이사야서 55장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나 눈에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한자의 거룩할 성聖 자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까치발을 하고 귀를 기울여 토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면, 백성을 인도할 자리에 앉은 사람은 성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사람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릴 줄을 몰랐습니다. 그저 양옆만 보았습니다. 눈을 이쪽 저쪽으로 돌리며 도리질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의도치 않게 한 가지 큰일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혀 뜻밖의 인물이 그 자리에 앉게 한 것입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군사 독재 시절부터 쌓아 온 철옹성은, 윤석열 정권처럼 나라를 철저히 망치고 있다는 사실이 불을 보듯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 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액권 지폐를 트럭으로 옮겨다 숨겨 놓고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면서도, 정치적 반대 세력이 몇 만 원짜리 하자만 있으면, 그걸 물고 늘어져 사회-정치적 생명줄을 끊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엄청난 비리가 발각되면, 다음 선거에는 당의 이름을 바꿔 달고 나타나서, 국민을 다시 속여 왔습니다. 수천 년 전의 말씀이 오늘의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마태 7,15) 이들은 다가오는 선거에도 그렇게 하겠다고 이미 예고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60여 년, 몇 번 예외가 있었지만, 끈질기에 지켜 온 철옹성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판단한 권력자가 군대를 동원해서 국회와 주요 국가 기관을 점령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서 멈출 수밖에 없었고, 그 장면이 그대로 카메라에 포착되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번뿐 아니라, 과거에도, 아주 평화적인 방법으로, 잘못된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게 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켜 내는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몇 나라 학자들이 이런 모습에 감탄하여, 최근에 대한민국 국민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고, 금년 말경에 실제로 그 상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국민은, 한때 민주주의의 모범이었다가 폭군을 만난 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여러 지역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 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돌이켜 보면, 윤석열과 그 추종 세력이 나라를 글자 그대로 나락으로 이끌어 간 ‘덕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눈에도 분명히 드러난 그들의 망국적 행태 때문에, 어떤 분의 표현을 빌자면, “단군 이래 최상의 성군”이 그 자리에 앉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떠오르는 성서 말씀이 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신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마태 21,42; 마르 12,10; 루카 20,17)

5. 다시 성서로 돌아갑시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에 비유하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은 설명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 여기에 그분의 가르침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린다는 신비의 묘약처럼, 간단히 축약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인간은 이 땅에서 유일하게 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에 두고 서서 걷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이 둘을 연결하는 왕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대자연을 보고 감탄하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사제가 됩니다. 그리고 왕과 사제는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마태 23,9)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두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사명을 띤 사람들입니다.

6. 막가파, 지존파도 감옥에 들어가 오랜 시간이 지나니,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은 물로 바뀌듯,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을 되찾아, 세례와 견진성사까지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윤석열과 그 추종자들도, '인생대학'이라고도 하는 감옥에 들어가 '국비 장학생'으로 오래 살다 보면,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마음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4,175만 4,444’라는 숫자가, 국민 하나하나의 얼굴로 변하면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 사회와 대자연이, 말세라도 된 듯, 과거에 없이 미쳐 날뛰는 이때, 죄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창조자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어, 인류가 여기서 바닥을 치고, 희망을 향해 솟아오르는 계기로 바꿔 주시라고 기도합시다.

이병호 주교(빈첸시오)

전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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