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탄생: 산 자가 죽은 자를 움직이던 중세의 역설
중세라는 말
흔히 서양의 중세(Middle Ages)를 암흑기(Dark Ages)라고 한다. 중세는 보통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해 유럽의 패권이 다양해지기 시작한 5세기부터 교회와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로 전환하기 시작한 15세기 르네상스 사이의 기간을 일컫는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뒤 이성보다는 신앙, 인간보다는 신이 중요했고, 교회 권력이 강했던 시대다. 이때를 ‘암흑기’로 평가한 것은 후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옛 그리스·로마의 찬란했던 문화가 잊히고 이성의 역할이 약해졌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붙여진 표현이다.
언제까지가 중세인가
이때 더 명확히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중세의 시기 문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자크 르 고프는 서양의 중세를 일반적 이해보다 길게 본다. 그는 경제 구조, 사회 관습, 심성(망탈리테-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무의식적인 가치관, 태도, 생활 습관) 등 전반적으로 보면, 봉건적 잔재,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농경 중심의 경제 등 서양 중세의 특징이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15-16세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해서 유럽인의 삶이 곧바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며, ‘장기 중세(Long Moyen Âge)’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르 고프가 제안한 19세기 초반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 혁명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던 때다. 산업 혁명은 인간이 과학과 경제의 실질적 주체가 되어 사회의 안과 밖을 두루 변화시킨 강력한 촉매제였다. 신과 교회의 권위보다 사실상 ‘맘몬’의 힘을 중시하고, 인간의 경제적 선택으로 사회를 작동시키는 시대로 이끌었다. 산업 혁명 이후 세계는 확실히 다른 세상, 즉 ‘근대’로 들어섰다. 그렇다면 중세를 산업 혁명 초기인 18세기 중반까지로 보는 것도 합리적일 것 같다.
‘중세’는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냉소적으로 사용한 용어다. 이들은 그리스·로마의 문명을 부-활(르-네상스)시킨 자신들의 시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은 인간을 무시한 야만의 시대라고 보았다. 지금까지의 교회 중심적이고 신 지향적인 시대는 철학과 문학이 융성했던 고대의(antique) 정신에 못 미친다며 비판했다. ‘고대’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중세’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인간의 개성과 능력을 기반으로 현실 세계를 긍정하고자 했다.
정말 암흑기였나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중세가 ‘암흑기’였다는 평가다. 인문주의자와 후대의 계몽주의자들이 중세를 그렇게 평가했지만, 중세 암흑기는 서양의 맥락에서나 가능한 판단이다. 그 시절 이슬람 문명은 호황기였다. 지난 호에 본 대로 서양의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걸출한 신학자가 나오게 된 배경에도 이슬람 사상과 철학이 있었다. 서양 사상가들이 이슬람 문명이 낳은 저술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며 조상들의 논리를 다시 공부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의 철학적 신학자인 이븐 루시드의 저술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운 것도 그 사례다. 서양이 암흑기일 때 유럽의 동쪽인 아라비아의 세계는 대낮이었다. 신학이 주류였던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와 달리 이슬람권에서는 신학과 철학이 융성했고, 문명이 꽃을 피웠다.
이 시기 중국의 경우도 암흑기와 상관없었다. 서양 중세에 해당하는 당, 송, 원나라 시기는 정신문명, 물질문명 모두 융성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세계 최대의 국제적 도시였고, 동서 교류의 허브와 같았다. 송나라 때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발명되었고, 쿠빌라이 칸이 정복해 세운 원나라는 세계의 문화가 모이는 곳이었다. 한국은 통일 신라 때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을 만들었고, 원효와 같은 천재적 사상가를 배출했으며, 석굴암과 불국사 같은 고도의 불교 예술을 꽃피웠다. 고려 때는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물 ‘직지심체요절’을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현대 수학의 기초가 되는 10진법과 0의 개념을 정립했고, 유럽 근대 과학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슬람의 문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연옥의 발명
이들에 비해 서양의 중세는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신, 신앙, 교회 중심적이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세의 특징 중 하나는 내세관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세는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성을 당연시하면서, 사후 세계의 강조점도 바뀌었다. 성경에도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중세는 가령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연옥을 발명하고 확산시킨 시대이기도 하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에서 이것을 잘 규명하고 있다.
내세의 양식이 바뀌었다는 말은 현세의 삶이 내세 지향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내세를 관장하는 교회의 권력과 그리스도교 중심적 세계관이 강했다는 뜻이다. 가령 르 고프에 의하면, 중세 초기(5-11세기)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의 내세관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가령 1코린 3,13-15), ‘중간 상태’에 대한 개념이 있기는 했다. 교부 테르툴리아누스(?-240)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을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 의인들이 머무는 중간적 휴식처(레프리게리움)라고 보았다. 신실한 영혼들이 머무는 잠정적 거처라는 것이다.(<연옥의 탄생>, 문학과 지성사, 113)
하지만 그 거처의 성격과 내용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세기 말 프랑스에서 ‘정화하는’(purgatorius)이라는 형용사가 ‘정화하는 곳’(locus purgatoria)이라는 장소로, 명사로서의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으로 정착되었다. 정화가 막연한 어떤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 ‘장소’가 된 것이다.(<연옥의 탄생>, 302-320) 한자 문화권에서는 마테오 리치가 ‘푸르가토리움’을 처음으로 ‘연옥’(煉獄)으로 번역해 <천주실의>에서 사용했다. 한국에서 연옥 신앙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인 연도(煉禱)로까지 구체화되어 전승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
중세기 연옥의 탄생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 안에 가둘 수 없는 경우에 대한 인식이 커졌다는 뜻이다. 가령 죄는 짓지만 지옥까지 갈 정도는 아닌 사회적 계급(가령 고리대금업)이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둘째, 죄도 인간이 계산할 수 있고 그만큼 탕감도 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뜻이다. 셋째, 지옥이나 천국에는 없는 ‘일시적 시간’ 개념이 내세에 투입되었다는 뜻이다. 언젠가는 끝날 일시적인 내세가 구체화되면서 내세관이 입체적으로 다양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드렸듯이, 살아 있는 이의 기도가 죽은 이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저는 어미가 자비를 베풀고 빚진 자들에게 진심으로 빚을 삭쳐 준 줄 아오나, 혹시라도 영세 후 오랜 동안 진 빚이 있삽거든 당신도 그 빚을 삭쳐 주소서. 삭하소서. 주여, 비나니 삭하소서. 그를 데리고 심판으로 들어가지 마옵소서!(시편 142,2)...”(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바오로딸, 248) 이런 식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었다.
중세 때 연옥 개념이 자리 잡는 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 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연옥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악하거나 전적으로 선하지는 않았던 이들의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연옥은 개인적 죽음과 일반적 심판 사이의 기간이었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후세에 연옥이 교리화할 수 있는 기초로 작용했고, 실제로 그의 권위에 힘입어 민간 신앙에 퍼져 있던 연옥 개념이 12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걸쳐 교회 안에 확립되었다. 1274년 리옹 공의회를 통해 연옥이라는 장소가 그리스도교의 공식 교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죽고 나서도 운명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상상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교회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시켰다. 교회가 연옥이라는 제3의 공간을 관리하는 권한을 가지고, 인간의 현세뿐만 아니라 사후의 시간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후에 ‘면벌부’ 판매 등 교회의 세속적 권력화로 이어지고, 급기야 타락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른바 종교 개혁가들이 연옥 교리를 비판하자,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에서는 연옥 신앙을 견지하며 이렇게 답을 했다: “독실한 자들의 영혼은 한동안 연옥의 불길 속에서 정화된 후, 마침내 더러운 것들은 들어올 수 없는 영원한 나라로 갈 수 있다.” 연옥 개념은 서양 중세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근대적 주체성의 씨앗
다른 편에서 보면, 산 자의 판단이 사후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인간의 역량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세계를 판단하는 주체라는 생각이 확장된 것이다. 신도 그 자체로 긍정하기보다는 인간에 의한 판단 대상이 되었고, 이런 자세와 관점이 강화되면서 인간적 주체성이 중심이고 모든 것은 인간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관점을 ‘모던’한 것으로 평가하고, 그 ‘모던’의 눈으로 과거를 ‘중세’로 명명하고, ‘암흑’의 시대로 규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보는 기준이 달라졌다. 내세마저도 인간의 관리 안에 두던 중세는 역설적으로 인간적 주체성의 토대를 다진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중세와 근대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 위에 있는 것이다.

이찬수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강의하고 연구했으며, 아시아종교평화학회를 창립해 부회장으로 봉사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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