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걷는 20대 남성 그리스도인들
이 글은 <가톨릭평론> 50호(2025년 겨울, 우리신학연구소)에 실린 글입니다.
교회 안의 ‘이방인’
올해 부활 성야 미사 때 세례를 받았고, 아직 교적에 오른 지 채 1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톨릭교회와 함께한 세월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운 좋게도 세례를 받은 다음 날 견진 성사를 받게 되어서 나름 어른이 된 신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가톨릭으로 오기 전,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속한 교회 청년회에서 리더로 활동하면서 청년 그리스도인으로 활발하게 지냈지만, 어떤 이유로 성당을 다녀야겠다고 다짐하고 지난해 10월부터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받았다.
가톨릭 신자가 된 지 일곱 달 정도 된 지금, 날이 갈수록 보편된 로마 가톨릭교회에 애정을 더해 가고 있으나, 동시에 몇몇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쉬움의 대부분은 가톨릭이 청년을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한국 교회의 청년 사목 현장에서 20대 남성은 묘한 존재감을 갖는다. 전례 봉사나 힘을 쓰는 행사 지원이 필요할 때는 잠시 함께하지만, 정작 그들이 겪는 고통이나 가지고 있는 영적 갈망이 공동체의 주요 의제로 진지하게 다루어지는 일은 별로 없다. 사회에서는 ‘이대남’이라는 정치적·사회적 틀과 함께 갈등의 자리에 있지만, 반대로 교회 안에서 그들은 배경과 같이 남겨진다.
기성 세대는 흔히 20대 남성들의 소극적 태도나 잦은 냉담을 두고 “세속의 즐거움을 좇느라 바쁘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그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외면한 것이다. 군 입대와 전역, 복학, 그리고 취업 문턱을 넘어야 하는 다양한 과제가 있는 생애 주기 속에서 ‘생존’조차 불투명한 현실 사이에 끼어 있다. 한 개인의 치열한 생존 경쟁 한복판에서, 과연 교회는 그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있을까, 아니면 수행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되고 있을까?
나는 지난달 “국내 20대 남성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기에 신앙이 미치는 영향” 연구를 통해 이러한 20대 남성 그리스도인의 현실에 대해 ‘삶의 위기와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알아보고자 했다. 사례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질적 연구로 양적 통계나 담론 뒤에 가려져 있던 ‘20대 남성 그리스도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겪는 삶의 위기가 얼마나 절박한지, 그리고 기성 교회의 언어가 그들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포착하고자 했다. 이 연구의 결과를 기반으로 한국 교회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 청년 남성의 내면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들이 걷는 ‘광야’
내가 만난 20대 남성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기보다는, 시시각각 다양한 차원에서 생존을 위협받 는 ‘광야’에 가까웠다. 그들이 겪는 삶의 위기는 ‘부모님과의 갈등’, ‘군대’, ‘경제적 문제’, ‘신체적, 정신적 질환’, ‘초중고등 생활 문제’,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 ‘기타’와 같이 총 7가지 범주로 나타났다. 주목할 점은, 연구를 통해 만난 사람 대부분이 객관적인 사회경제적 지표상으로는 중산층에 속하거나 큰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주관적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청년들의 고통이 단순히 물질적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한 경쟁과 비교 문화 속에서 “정상 범주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내면화된 공포와 관련된 것임을 보여 준다.
대한민국 남성이 겪는 ‘군대’라는 시공간은 대표적으로 위기가 많이 발생하는 장소다. 폐쇄적인 위계질서와 잠재적 폭력에 노출되어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 기간에 청년들은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로 겪어야 하는 시련에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또한 입시와 취업 실패로 인한 자존감 하락,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겪는 가정 내 불화는 그들을 정서적 고립으로 내몬다. 세상은 이들에게 능력주의를 강요하고, 교회마저 이들의 아픔을 외면할 때, 청년들은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고립된 섬이 되어 가고 있다.
신앙은 도움일까, 부담일까?
삶의 위기에 처한 20대 남성들에게 신앙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생존의 동아줄이 되기도 하지만, 그들을 구석 으로 밀어넣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신앙의 양가성은 주로 ‘개인적 신앙’과 ‘제도적 신앙’ 사이의 충돌에서 일어난다.
인터뷰에서 청년들은 기도나 개인 묵상 같은 내밀한 신앙 행위를 통해서 위기를 재해석하고 인내할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본당 공동체나 교리, 성직자와 결부된 ‘제도적 신앙’은 종종 위로가 아닌 짐을 지웠다. 어떤 청년은 자신의 신앙 고민이 교회가 규정하는 ‘이단’이나 ‘올바르지 않은 신앙’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검열의 공포를 느꼈고, 매주 반복되는 주일 미사 참례나 공동체 활동 의무를 기쁨이 아닌 ‘해야만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 과제’ 같은 것으로 인식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특히 가정이나 학교에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강요받거나 수직적 위계질서에 짓눌려 온 청년들에게, 교회의 엄격한 사회 윤리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당위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 기제로 작동한다. 세상에서의 생존 경쟁에 지친 이들에게 교회마저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를 요구할 때, 신앙은 삶의 위기를 극복할 자원이 아니라, 도리어 위기를 가중하는 ‘부정적 종교 대처’의 원인이 된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
청년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결정적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품었던 ‘기대’와 마주한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괴리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위기 속에서 교회에 거창한 해결책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과 실패, 그리고 날것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어 주고 공감해 줄 ‘안전한 공간’을 기대했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러한 처지를 이전에 겪었지만 지금은 벗어난 사람들에 게 공감을 바랐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그들의 구체적 삶의 자리에 내려오기보다, 교리적 정답이나 “기도가 부족하다” 같은 영적 조언을 하기에 바빴다. 20대 남성들이 겪는 취업 불안, 군대 부조리, 인간관계의 단절감은 모호한 말로 포장되거나, “청년들이 신심이 약해서”라는 핀잔으로 축소되곤 한다.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돌아오는 것이 공감이 아닌 훈계이거나, 자신의 약함이 공동체 내의 가십거리가 되는 경험을 한 청년들은 결국 입을 닫는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실존적 고통’에 관심이 없다고 느낀다. ‘착한 청년’, ‘봉사 잘하는 일꾼’으로서의 기능만을 요구할 뿐, 정작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겪는 내면의 전쟁에는 무감각한 제도의 관성에 깊은 소외감을 경험한다. 결국 이 괴리는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를 ‘나를 지켜 주는 울타리’가 아닌 ‘나를 정죄하는 법정’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거리감에서 보이는 희망
흥미로운 점은, 많은 20대 남성이 교회를 떠났거나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스스로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정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주일 미사에 빠지고 본당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지향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신앙 자체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경직된 ‘제도’를 잠시 유보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교회를 떠나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었을 때 보이는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 교회의 시각에서 이들은 ‘냉담 교우’ 혹은 ‘가나안 신자’와 같이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류되겠지만, ‘수용적 에큐메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재구성 하는 ‘순례자’들이다. 이들은 맹목적 순종 대신 비판적 성찰을 통해, 그리고 타성적인 종교 생활 대신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신앙의 의미를 묻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만의 ‘살아 있는 신앙’을 만들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제도로부터의 이탈은 신앙을 흐리는 부정적 행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 교회가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청년 세대의 고유한 아픔을 끌어안기 위해, 성전 바깥 광야에서 하느님을 새롭게 만나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자 신앙의 ‘심화’ 과정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교회가 ‘야전 병원’이 되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세상의 ‘야전 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를 통해 한국 교회가 20대 남 성이라는 환자들에게 적절한 야전 병원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복잡한 삶의 위기에 대해 “기도하면 해결된다”는 식의 납작한 정답만을 제시하거나, 그들의 솔직한 고뇌를 ‘신앙 없음’으로 정죄한다고 느꼈다
이제 교회는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서 내려와 ‘배우는 자’의 자세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사도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명심 해야 한다. ‘수용적 에큐메니즘’의 태도는 타 교파뿐만 아니라 우리 곁의 청년들에게도 적용되어, 그들이 겪는 노동 시장의 불안과 군대의 트라우마, 그리고 관계의 단절을 있는 그대로 경청하고, 그들의 의심과 혼란조차 신앙 여정의 일부로 품어 주는 심판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청년들은 거창한 해결책을 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모순과 아픔을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품, 자신의 존재가 판단받지 않고 수용되는 경험을 갈망할 뿐이다. 교회가 그들의 ‘광야’에 함께 머무는 친구가 되어 줄 때, 비로소 청년들은 교회 안으로 다시금 돌아와 숨 쉴 것이다.
류상현
경북대학교 심리학과 학부생. 독립 영화도 찍고, 연극도 연출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신학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희망을 찾고 싶다. 기초 신학과 청년 신자, 교회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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