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빵, 나는 평화, 나는 그 이상”: 생존주의를 거부하는 영성

2026-02-13     조민아

몇 주째 계속되는 강추위로 좀처럼 얼지 않는 포토맥강이 얼어 버렸다. 대규모 추방의 위협, 노골적인 혐오의 수사,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 무너져 가는 사회적 안전망 등으로 시국이 칼날처럼 시리고 잔인한데 날씨까지 추우니 봄이 간절하게 기다려진다. 그래도 오늘은 학생들이 집에 오는 날이라 마음이 들뜬다.

기숙사 RM(Resident Minister)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숙소를 개방해 학생들을 초대해야 하는 “오픈하우스” 의무가 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용을 꽉 채워 이것저것을 준비했던 첫 두 달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시험, 인턴, 알바, 취업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학생들을 사목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마음을 열고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그저 쉬어 가는 공간으로 만든 이후다.

저녁 8시가 되니 까르르 웃는 소리들이 방문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한다. 두런두런 수다가 이어진다. 방금 구운 옥수수 빵, 브라우니, 쿠키와 함께 떡볶이, 약과, 김치가 놓여 있는 혼종 혹은 혼란의 식탁에 포크와 젓가락과 손가락이 오간다. 한국엔 가 본 적도 없지만 어쩌다 김치 매니아가 되었다는 학생 하나는 매주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이다. 맵고 시고 짠 김치를 올 때마다 한 접시씩 비운다. 책들이 두서 없이 꽂혀 있는 내 책장을 심각하게 쳐다보던 한 학생은 책장 정리를 자원하더니, 전공과 무관한 책을 들춰 보느라 즐겁다. 펼쳐 놓은 낙서장에 만화를 그리는 학생도 있고, 좋아하는 음악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고 함께 듣기도 하고, 넉살 좋은 우리집 고양이와 어느새 친구가 된 학생도 있다. 무질서하고 무용해 보이지만, 다들 각자의 속도로 숨을 쉬며 머문다. “이런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라는 누군가의 혼잣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이 필요했던 거구나. 이렇게 또 학생들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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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지상주의와 청년

생존이 지상 명령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생존은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근원적인 과제지만, 살아남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생존주의’는 사회적 병리다. 타자를 동료가 아닌 경쟁자로, 세상을 삶터가 아닌 사냥터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온몸이 찢기고도 누군가를 물어뜯기 위해 질주해야 하는 투견처럼,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도 무감각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생존주의다.

생존주의는 성과주의와 짝을 이루며 생존을 위한 쓸모(utility)를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고유한 이름 대신 ‘인적 자원’, ‘노동력’, ‘소비자’, 혹은 ‘생산성 지표’로 호명한다. 취업 시장은 청년을 스펙의 총합으로 재단하고, 병원은 환자를 의료 비용의 산출물로 계산한다. 장애인은 복지 예산의 항목으로 분류되며, 이주 노동자는 산업 현장을 돌리기 위한 일회용 부품으로 취급된다. 쓸모의 잣대는 학교의 교과 과정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된다. ‘인재’로 분류되는 학생들은 타인을 관리하여 경제적 효용을 창출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올인하고, ‘평범’하다고 분류되는 학생들은 소외감과 낙오를 경험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이 촘촘하게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은 그저 끝없는 자기 증명의 시험대일 뿐이다.

청년들은 이러한 생존주의 사회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한국에서는 “3포 세대”로 시작해 “N포 세대”로 명명되는 선택적 포기가 눈에 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을 넘어 내 집 마련, 인간관계, 심지어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다. 중국에는 ‘탕핑주의’(躺平主义, 눕자주의), 일본에는  ‘사토리 세대’(悟り世代, 깨달음 세대)가 있다. 과도한 경쟁과 성과 압박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소비와 노동으로 살아가겠다는 청년들의 움직임이다. 영미권에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현상이 있다. 직장을 실제로 그만두지는 않지만, 주어진 일만 하고 그 이상의 헌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생존에 최적화된 마인드를 장착한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반응에 우려 섞인 훈계로 응수한다. 나약하고, 예민하고, 책임감 없고,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이기주의로 규정하며, 심지어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라 비난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의 이면에는 “우리도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는 생존주의적 서사가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노력하면 보상받을 수 있었던 고도 성장기의 경험, 즉 오늘의 희생이 내일의 성공으로 치환되던 시대의 메커니즘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선택은 다른 의미로 읽힌다. 기성세대가 체감했던 ‘노력에 따른 보상’의 순환 고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평생을 일해도 내 집 마련은 불가능에 가깝고, 온 힘을 다해 질주해도 고용 불안정은 계속되며, 성과를 내도 그 과실은 자본에 귀속된다. 청년들은 회사를 위해 죽도록 일하라는 요구가 결국 자신의 삶을 갈아 넣어 타인의 이윤을 축적하는 구조임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N포 세대나 탕핑주의, 사토리 세대, 조용한 퇴사 현상은 생존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게임의 규칙 자체를 거부하는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 무의미할 뿐 아니라 어떤 보람도 주지 못한 채 생존만을 위해 복무하게 만드는 노동, 즉,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명명한 “불쉿 잡”(Bullshit Job)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를 오직 쓸모로만 평가한다면, 차라리 쓸모 없는 존재가 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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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 감수(感受, Patiency)의 영성

생존의 지상 명령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어떤 영성의 언어가 필요할까? 혹 교회조차 생존주의와 성과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닐까? 우선, 우리는 어떤 축복을 구하고 무엇에 감사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의 성취 이전, 존재 그 자체에 이미 주어진 선물이다. 살면서 얻게 되는 좋은 결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과에 대한 간구와 감사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된다면, 하느님을 나의 성공을 보증하는 분으로, 세상을 나의 번영을 위해 작동하는 무대로 여기는 영적 나르시시즘에 기울 수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신앙이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그 게임 자체를 거부하는 청년들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패한 자, 아픈 자, 쉬는 자는 어느새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그들의 고통은 믿음 부족이나 개인의 책임으로 간주된다.

생존주의와 성과주의의 핵심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오직 '에이전시'(agency), 즉 ‘행위 능력'으로만 평가한다는 데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효율적인지가 가치의 기준이 되는 세상에서 존재 자체의 의미는 지워진다. 이런 세상은 당신의 숨결 하나하나를 선물로 주신, 존재 그 자체를 사랑으로 빚으신 하느님의 마음과 너무도 멀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존재 자체다. 교회는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생존과 성과에 대한 집착이 깨어진 곳에 비로소 은총이 깃들고 성령이 활동할 공간이 생긴다. 

그러므로 영성에는 ‘할 수 있음’을 격려하는 언어뿐 아니라, 무언가 하지 않고, 그저 머물고 느끼며 받아들이는 역량, 즉 감수성(感受性, patiency)을 일깨우는 언어 또한 필요하다. 어원적으로 수난(passion)과 맞닿아 있는 이 개념은 수동적인 무기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수성은 외부의 작용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견디는 힘, 즉 겪어냄(undergoing)의 역량이며, 나와 타자의 고통이 존재에 기입되도록 허락하는 멈춤과 머무름의 성정이다. 생존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만, 감수의 영성은 “무엇을 겪고 있는가”에 귀 기울인다. 모든 능동적인 행위(doing)의 밑바닥에는 세상의 무게를 지탱하며 견디는 고통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함께 감수하며 ‘다만 같이 있어 줌’은 방관이 아니라, 나의 온 존재를 다해 상대방을 맞이하고 더불어 견디는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귀한 존재라 느낄 때, 청년들은 생존의 강박 속에서 삼켜야 했던 것들, 쓸모 없다고 여겨 묻어 두었던 슬픔과 분노와 상처를 조금씩 털어놓으며 다가올지 모른다.

아르헨티나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 “나는 빵, 나는 평화, 나는 그 이상”(Soy pan, soy paz, soy más)의 가사가 떠오른다.

그래서 말해 줘, 지금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혼자 남은 영혼은 울게 되니까

안에 쌓인 것들을 밖으로 꺼내야 해
봄이 오듯이
마음속에서 무언가 죽어 가는 걸 누구도 바라지 않잖아
서로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고
꺼낼 수 있는 건 밖으로 꺼내
그래야 안에서 새로운 것들이 태어나니까

나는 빵이고, 평화이고, 그 이상이야
여기 이렇게 있는 사람이야

다음 주에는 학생들이 올 때에 맞춰 이 노래를 틀어 놓아야겠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빵이 되고 평화가 되어, 생존 ‘그 이상(más)’의 존재로 머물며 함께 봄을 기다려야겠다. 

조민아

신학자. 
조지타운 대학교 신학과 종교학부 교수(The Department of Theology and Religious Studies, Georgetown University, Washington DC,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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