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이라는 이름의 부메랑, 그 끝은 공멸일 뿐
얼마 전, 집에서 30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동네 가게에 가서, 세탁용 세제 한 병, 우유 두 병, 그리고 자잘한 물건 몇 가지를 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무겁던지 손을 바꾸고, 중간에 쉬기도 하며 겨우 들고 왔습니다. 그 뒤 우유가 떨어져 갈 무렵 어느 날 냉장고를 여니 새 우유가 두 병이나 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해서 알아봤더니, 가끔 오셔서 도와주시던 수녀님이 쿠팡에 주문해서 사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동네 가게에 가는 날이 드물어졌습니다.
아침에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보며, 우리는 ‘와! 이렇게 빠르다니!’ 하고 감탄합니다. 어젯밤 주문한 물건이 눈 뜨면 도착해 있는 세상. 우리는 이런 기술을 문명의 이기(利器)라 부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물러서고 머물러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미래를 앞당겨 쓴 빚 문서이자, 우리 자신을 향해 던진 부메랑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꺼내고는 바로 버리는 비닐 포장재와 완충제들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들은 쓰레기통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상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플라스틱이 자연 상태에서 완전히 분해되는 데 짧게는 500년, 길게는 수십만 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고작 수십만 년임을 감안하면, 우리가 잠시 쓰고 버린 쓰레기는 사실상 우리 종(種)의 역사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오랫동안 이 땅에 저주처럼 남는 셈입니다.
더 끔찍한 진실은 따로 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비닐과 플라스틱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과 파도로 잘게 부서져,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으로 변합니다.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에는 한반도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거대한 ‘쓰레기 섬’(GPGP=Great Pacific Garbage Patch)들이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잘게 부서진 플라스틱은 플랑크톤이 먹고, 그 플랑크톤은 작은 물고기가 먹으며, 결국 참치와 고등어의 뱃속에 축적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저녁 우리의 식탁 위에 오릅니다. 우리가 무심코 버린 비닐이, 먹이사슬을 타고 돌고 돌아, 내 아이의 혈관 속으로, 나의 뇌세포 속으로 다시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름 끼치는 ‘부메랑 효과’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향해 던진 독화살은 반드시 우리 자신의 심장을 향해 되돌아옵니다. 내가 당장 편하자고 선택한 ‘과대 포장’과 ‘일회용의 편리’가, 궁극적으로는 나와 내 후손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자살 행위가 되고 있습니다.
노동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 싸게, 더 빨리"를 외치며 배송비 2,500원을 아끼려 할 때, 그 비용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 청구서는 택배 노동자의 과로와 골병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의 건강을 착취하여 얻은 나의 편리함은, 결국 병든 사회와 공동체 붕괴라는 또 다른 부메랑이 되어 내 삶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잘 사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잘 살거나, 아니면 함께 멸망할 뿐입니다. 남과 나 사이에 시간상의 미세한 차이만 있을 뿐,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생태계의 법칙입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썩지 않는 쓰레기를 줄여 지구를 살리는 데 필요한 비용은 전체 물류비의 고작 5% 남짓이라는 것입니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그 돈이 아까워서, 우리는 후손들에게 ‘쓰레기 섬’을 물려주고 우리 몸에 플라스틱을 계속 쌓을 것입니까?
이제 소비자가 아닌,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기업과 정치권에 요구해야 합니다. 당장의 편리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생존을 선택하겠다고 말입니다. 조금 더 비용을 치르더라도, 조금 더 느리게 받더라도, 사람과 자연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택하는 것. 그것만이 던져진 부메랑의 궤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병호 주교(빈첸시오)
전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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