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시작하며
우리의 일상은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시작으로 엮인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사랑을 떠나보내기를 시작한다. 새해 첫날을 맞으며 우리는 어색하지만2026년이란 숫자를 서툴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새로운 한 달의 초입에서, 우리는 봄이란 계절을 시작한다. 이 즈음이 되면 나는 매일매일 봄의 소리를 듣는 영성 수업을 시작한다. 어쩌면 관계를 만들어 가고, 그 안에서 소소한 삶의 행복을 만들어 가야 하는 우리 신앙인의 과제는, 아직 꽃은 활짝 피지 않았지만,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봄을 찾아내는 일과도 같다.
봄을 마음에 세우는 이 시기, 입춘에 나는 포틀랜드에 있는 우리 수녀원에서 닷새를 머물렀다. 이는 캘리포니아에서의 오십 년간 교수직을 내려놓고, 조그만 텃밭을 일구는 은퇴의 삶을 향해 떠난 베스 수녀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매일 아주 천천히 수녀원–한때는 메릴허스트 대학이었지만, 이제는 양로원이 있고, 저소득 가정을 위한 아파트, 장애 아동 공동체, 우체국, 등등이 있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 되었다–캠퍼스를 산책했다. 수련자로 살 때, 춤 치료 공부하던 심리학과 건물은 작은 카페가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내가 알던 공간의 얼굴이 많이 달라져, 낯선데,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내가 좋아했던 도서관, 그리고 그 앞에 커다란 나무들만 여전히 거기에 허허롭게 서 있다.
목젖이 깔깔해 오는 이름 모를 슬픔을 삭이는데, 여기저기 봄의 몸짓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움을 틔울 준비를 하는 나무의 모습에서, 막 사춘기를 시작하는 꿈 많은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빛을 받아 환히 빛나는 무덤가에 핀 조그만 꽃의 아름다움에서, 죽음 가운데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봄의 무늬를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근사한 소명이 큰 나무나 저기 눈 덮인 거대한 산이 아니라 그저 작은 풀과 꽃이라는 것이 놀랍다. 늙어 가는 수녀원의 수녀인 내게, 가냘프고 상처받기 쉬운 저 조그만 꽃을 통해, 봄의 소리가 가장 분명하게 들린다는 점이 왠지 위로가 된다.
더구나 이 주간에, 울고 싶을 만큼 감동적인 건, 내가 운영하는 자매들의 영성 수업 시간에 베스가 <식별>에 관해 기꺼이 강의를 해 준 거였다. 언어를 잃어 가기 시작한 수녀님이, 밤 세워 수업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면서 기꺼이 젊은 한국 여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랑이 애절해서, 가슴이 찡했다.
곧 자기의 머릿속이 하얀 지우개가 되는 시간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수녀님을 보다가, 내가 우리 함께 책을 쓰자고 제안하니, 자기는 기억과 언어 능력이 사라지고 있으니, 쓰려면 5년 안에 써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놀이로서, 즐거움으로서 책을 함께 쓰기로 약속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질주하는 이 시대에, 봄의 신호를 찾으면서, 즐거움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베스 수녀님과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본이 신과 같은 초월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본을 생산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시대에, 우리는 자기를 노예처럼 부려먹은 피로 사회에 살고 있다. 철학자 안병철은 오늘날 인간은 삶의 주체(subject)가 되지 못한 채, 일 혹은 자본 생산에 기여하는 일종의 프로젝트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수도 생활도 영성적인 것을 생산하는 데 골몰하는 것이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매일매일, 정신없이 자기의 소임을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수도자라면, 그게 나인 경우를 포함하여, 수도 생활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지 아감벤은 범접하지 못할 만큼 신성화된 자본을 저속한 것으로 끄집어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어지러울 정도로 달리는 속도와 효율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느림과 게으름을 다시 찬양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느릿느릿한 걸음이 봄의 리듬과는 더 잘 어울린다. 따스한 봄빛 속을 걸어가는 느릿함을 그려 보면서, 봄이란 얼마나 기적과 같은 단어인가 생각해 본다. 영어로 봄은 스프링으로 약동하는 생명이 튕겨져 올라오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미인에게 봄은 동사인 듯하다. 그에 비해 나는 우리 말이 훨씬 멋이 있다. 봄이란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새 움이 트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바라봄을 우리는 관상이라 부른다.
관상은 결국 삶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인데, 삶의 실재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관상은 “허공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면서, 얼마나 세상이 아픈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롭고, 또 자기를 괴롭히는지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이민자를 공격하고 체포하는 아이스를 거부한다는 데모를 하기 위해 두껍게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는 90대의 수녀님을 바라보면서, 나이 든 수도자들이 지닌, 사람에 대한 연민이 결국 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라도, 연민의 눈으로 아픈 세상과 사람 편에 서는 일이 봄을 맞이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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