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욕망, ‘니시키에’에 투영된 조작된 신화

2026-01-20     이규수

허구의 신화는 어떻게 침략 명분이 되었나!

화려한 색감과 역동적인 묘사, 일본의 전통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絵)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오락거리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이 아름다운 그림은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매체로 돌변했다. 니시키에는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가장 강력한 시각적 프로파간다(선전)이자, 허구의 역사를 사실로 각인시키는 ‘이미지 정치’ 도구로 작동했다. 강덕상 자료센터가 소장한 300여 점의 니시키에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을 다룬 작품들이다. 이 그림은 어떻게 고대 신화를 근대 침략의 명분으로 둔갑시켰을까? 그 이면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삼한정벌지도(三韓征伐之圖). 메이지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요시이쿠(歌川芳幾) 작품. 3매 이어 붙이기(triptych) 형태의 다색 목판화. 1860-90년대 초반 추정.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구도로 일본군의 압도적 무력을 강조하고 있다. ©강덕상 자료센터

매체의 진화, 오락에서 ‘보도 판화’로

니시키에는 18세기 중반 에도 시대,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에 의해 기법이 완성된 다색 목판화다. ‘비단(錦)’처럼 화려한 색상을 사용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밑그림을 그리는 에시(絵師), 판을 깎는 호리시(彫師), 색을 입혀 찍어 내는 스리시(刷師) 등 당대 최고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에도 시대의 니시키에가 가부키 배우나 미인도 등 서민의 오락용 매체였다면, 메이지 시대의 니시키에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진 기술이 보급되기 전, 니시키에는 전쟁의 승전보나 정치적 사건을 알리는 ‘보도 판화’로서 강력한 시각 뉴스 매체 역할을 수행했다. 강렬한 색감과 이미지는 일본인들이 조선과 중국 등 이웃 나라를 바라보는 인식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도구였다. 니시키에는 당시의 정치적 양상과 시대적 특징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 증거물이라 말할 수 있다.

‘진구황후 신화’의 실체와 허구

강덕상 자료센터에 소장한 니시키에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이다. 이 이야기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기반을 둔다. 신화에 따르면 진구황후는 신의 계시를 받아 임신한 몸으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갔으며, 전투도 없이 신라를 비롯한 삼한의 조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삼한정벌지도(三韓征伐之圖). 실제로는 청일전쟁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삼한정벌'이라는 표현을 쓴 점이 독특하다. 이는 진구황후의 전설적인 삼한정벌 설화를 차용한 것으로, 당시 메이지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고 영웅적인 역사와 연결하려 했던 민족주의적 의도가 담겨 있다. ©강덕상 자료센터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명백한 허구로 규정한다. 그 근거는 명확하다. 첫째, 사료의 부재다. 신라, 백제, 가야, 고구려 등 한국 측의 어떤 사료에도 3세기 일본의 침공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신화적 성격이다. <일본서기> 자체가 천황가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편찬되었으며, 진구황후라는 인물의 실재 여부조차 불확실하다. 셋째, 군사적 불가능성이다. 3세기 일본은 부족 연합체 수준에 불과했다. 당시 조직화된 국가 체계를 갖춘 한반도의 삼국을 정벌할 군사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침략의 알리바이, 임나일본부설의 시각화

그렇다면 일본은 왜 이 허무맹랑한 신화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유통했을까?

그 핵심에는 ‘천황제 권위 강화’와 ‘대외 우위의 상징 조작’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실제 역사(3-4세기)에서 철기, 관료제, 불교 등 선진 문물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일본은 수용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이를 정반대로 뒤집어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상징을 만들어 냈다. 고대 천황제의 권위를 신성시하고, 대외적으로 일본이 우위에 있다는 위신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조작된 역사는 후대 일본 학계에 의해 ‘임나일본부설’로 발전되었다. “진구황후가 삼한을 정벌했으니, 고대부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논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진구황후. 아다치 긴코(安達吟光)가 1885년경에 제작한 "대일본사략도회"(大日本史略圖會) 시리즈 중 한 장면. 진구황후가 바닷가에서 활이나 막대기로 바위에 글을 쓰거나 점을 치는 전설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진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신화적 순간으로 자주 그려졌다. 오른쪽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남성은 그의 충신이자 전설적인 재상인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 ©강덕상자료센터

메이지 정부는 이 신화를 조선 침략의 역사적 근거로 적극 활용했다. 진구황후의 정벌을 일본의 ‘초기 지배’로, 임나일본부를 ‘지배 행정기관’으로 해석함으로써,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지배권을 행사해 왔다”는 제국주의적 명분을 완성했다. 즉, 니시키에 속에 묘사된 진구황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선전물이었다.

진구황후의 신라 복속 전설. 오른쪽에 무장을 하고 앉아 있는 여성이 진구황후이며, 그 옆의 백발노인은 충신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内宿祢). 왼쪽에서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는 인물들은 항복하는 신라 왕과 관리들을 상징한다. 중앙의 호랑이 가죽과 보물들은 한반도에서 보낸 조공품을 시각화한 것이다. ©강덕상자료센터

역사 조작은 메이지 시대 정한론(조선 정벌론)과 이후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논거가 되었다. “과거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므로, 지금 다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궤변이 성립된 것이다. 진구황후 신화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역사 조작의 출발점이자 식민 지배의 역사적 뿌리 만들기로 기능했다.

국가적 동원, 지폐에서 교과서까지

진구황후 신화는 메이지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 사회 전반에 침투하여, 군국주의와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방위적으로 활용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진구황후 신화를 학술적 영역에만 가둬 놓지 않았다. 대중문화, 교육, 국가 의례를 통해 일본 국민의 의식 속으로 깊숙이 침투시켰다.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전설을 묘사한 일본의 전형적인 3장 구성 목판화. 오른쪽 화면에서 화려한 우산 아래 앉아 있는 인물이 진구황후. 보통 무장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권위 있는 황실의 의복을 입고 있다. 중앙에 앉아 있는 흰 수염 노인은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 5대 천황을 섬겼다는 전설적인 충신이자 정치가로, 진구황후의 조력자로 항상 등장한다. 왼쪽에서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인물은 오토모노 가나무라(大友金村). 황후를 보필하는 고위 장수나 수호신을 상징한다. ©강덕상 자료센터

무엇보다 진구황후 신화는 국가의 상징으로 화폐에 등장했다. 1878년 발행된 일본 최초의 지폐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진구황후였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 체제를 구축하며 그를 ‘고대 일본의 대외 정벌 영웅’이자 황실 수호신으로 신격화했다. 화폐에 새겨진 그의 초상은 일본 국민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영광’과 ‘제국의 위엄’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은 과거에 조선을 지배했던 강한 나라’라는 인식을 주입받았다.

진구황후와 그의 충신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 그리고 훗날 오진 천황이 되는 갓 태어난 아기를 묘사한 그림. 진구황후는 갑옷을 입고 긴 창을 든 여전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임신한 몸으로 삼한정벌을 주도했다고 전해진다. 가운데 무릎 꿇은 다케우치노 스쿠네는 황후를 보좌한 전설적인 충신으로, 아기(훗날의 오진 천황)를 소중하게 안고 있다. 파도가 치는 해안가와 소나무는 황후가 한반도에서 돌아와 규슈 지역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전설의 배경을 시각화한 것이다. ©강덕상자료센터

더욱 심각한 것은 교육을 통한 세뇌였다. 일본 정부는 진구황후 이야기를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가르쳤다. <국민의 역사>, <소학 국사> 등 공식 교과서에는 “진구황후가 신라를 굴복시키고 일본의 위엄을 떨쳤다”고 기술되어 있다. 교과서 삽화 속 진구황후는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여전사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학생들에게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모범적 황실 인물’로 주입되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황국의 위대함을 각인시키고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효과적인 교육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진구황후 신화는 군국주의와 전쟁 동원에도 활용되었다. 진구황후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으며 군사 의례의 중심에 섰다. 출정하는 군인들은 그를 모신 신사를 방문하여 참배했고, 군가에는 “진구황후의 위엄을 본받자”는 가사가 등장했다. 심지어 진주만 공습 전에도 일부 부대는 진구황후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참배를 올렸다. “고대에도 일본은 강했다”는 인식은 “지금의 전쟁도 정당하고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는 기제로 작동했다. 전쟁 포스터와 잡지에는 진구황후가 조선을 정벌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고대에도 우리는 승리했다”는 메시지는 현재의 침략 전쟁을 정당하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으로 포장했다.

메이지 정부 지폐로, 일명 진구황후 1엔권(神功皇后 壹圓紙幣). 이 지폐는 1881년에 발행되었으며, 일본 지폐 역사상 최초로 초상화가 도입된 지폐로 유명하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전설 속의 인물인 진구황후. 당시 진구황후의 실제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초빙한 이탈리아 판화가 에도아르도 키오소네가 인쇄국 직원을 모델로 삼아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모습으로 도안했다. ©강덕상 자료센터

대중문화 또한 공범이었다. 아동용 전기물은 그를 ‘용감한 여전사’로 묘사하며 낭만적인 모험담으로 포장했고, 가부키와 연극은 조선 정벌 장면을 화려한 경관으로 재해석해 대중을 열광시켰다. 우표, 지역 축제, 영화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의 일상에는 “일본이 원래 조선을 지배했다”는 조작된 기억이 가득했다.

역사가 된 가짜 뉴스, 그리고 남은 과제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진구황후 신화는 공식적으로 힘을 잃었다. 교과서에서 관련 내용은 삭제되었고,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임나일본부설과 정벌 신화가 허구임이 명백히 밝혀졌다. 국가 신도가 해체되면서 진구황후의 신격화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잔재가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우익 단체와 신사(神社)를 중심으로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서사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이는 혐한(嫌韓) 정서나 역사 수정주의의 뿌리로 작동하고 있다.

강덕상 자료센터가 소장한 300여 점의 니시키에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된 신화가 어떻게 화려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한 국가의 집단 기억을 조작하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흉기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서늘한 경고장이다.

우리가 니시키에 속에 박제된 진구황후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신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역사의 왜곡과 그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한 역사적 독해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 투쟁을 통해 지켜지는 것이다.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부설 강덕상자료센터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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