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생겨난 흙을 일구게 하셨다(창세 3,23)
오늘부터 격월로 한 해 동안 '말씀과 생태 영성'을 연재합니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의 시대에 하느님 말씀을 생태적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인간을 넘어 공동의 집 지구에 함께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과 연결을 깊이 인식하는 생태 영성으로 초대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이애리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나는 2022년 8월 경기도 연천에 있는 ‘평화가함께’ 공동체로 와서 초보 농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농사 경험도 없는 데다 수녀원에 들어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으니, 농사를 짓기에 육체적으로 튼튼한 나이도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께서 농부이시니 나는 농부의 딸이고, 농사에 어떤 방향과 가치를 닮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2025년은 농사의 방향이 전환되는 첫해였다. 1년을 되돌아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조금씩 꾸역꾸역 공동체와 함께 희망을 키우면서 살아왔다.
12월 어느 날,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내년 농사를 준비하며 두엄(Compost)을 만들었다. 두엄은 산과 바다, 들, 논, 밭과 과수원 등 자연환경에서 얻어진 풀, 짚, 왕겨, 낙엽, 수생 생물과 동식물의 배설물, 가공물에서 발생한 부산물 또는 폐기물 등 광범위한 유기물을 발효시키거나 썩혀서 만든 천연 비료다. 하얗게 퍼지는 미생물들의 작용으로 유기물들이 부식토(Humus)가 되어 올봄 밭으로 보내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죽음과 장례의 장엄한 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토양학자 프랜시스 홀(1913-2002)는 “우리는 잠깐 흙이 아닐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 삶과 죽음은 흙에서 생겨나서 흙이 아닌 시간을 잠깐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창세 3,19 참조) 우리의 죽은 몸은 부식토가 되는 과정을 통해 지구에 생명을 전달하는 순환에 참여한다.
하느님께서는 흙의 토대인 땅(대지)을 창조의 셋째 날 만드셨고,(창세 1,9-10) 이곳에서 온갖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시고 동물과 인간의 삶터가 되게 하셨다. 다른 창조 이야기인 2장에서는 인간이 땅의 먼지(흙)에서 생겨났다고 전한다.(창세 2,7) 최초의 인간 아담(Adam)의 어원이 바로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Adama)에서 나왔다는 것은 인간이 땅과 깊이 연결된 존재임을 말해 준다. 엄밀히 말하면 “땅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1845년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백인들에게 한 연설 가운데 하나다. 만물은 깊이 연결되어 땅에 존재하며, 하느님께서는 그 존재들 가운데 사람(아담)에게 땅을 ‘일구고 돌보는’ 소명을 주셨으니,(창세 2,15) 이는 최초로 인류에게 주신 보편적 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필리스 트리블(1932-2025)은 ‘일구고 돌보다’는 말씀이 ‘기쁨을 주다’와 같은 의미라는 점을 지적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주신 땅의 이름은 ‘에덴’이며, 여러 가지 기원과 해석 가운데 그 의미를 추리자면 ‘낙원 곧 기쁨의 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 주신 ‘일구고 돌보는 모든 행위’는 ‘기쁨을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도로테 죌레(1929-2003)는 그의 저서 <사랑과 노동>에서 "노동 없이 창조에 대한 신앙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농부는 농사에 부여되는 노동으로 하느님께 대한 창조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이 신앙은 그가 생겨난 땅(흙)과의 관계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땅은 생명을 주는 어머니로 이해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Gaia)’는 태초에 모든 것을 낳은 어머니로서 보통 ‘대지의 여신’으로 불리고, 고대 잉카 문명의 대지의 모신 ‘파차마마(Pachamama)’에 대한 숭배는 인류가 땅을 대하는 태도를 잘 드러내 준다. 같은 맥락에서 올해 탄생 800주년을 맞아 보편 교회가 특별 기념의 해로 선포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의 찬가’(Canticle of Creation)에서 대지를 ‘누이이며 어머니’로 고백한다.
그러나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그가 생겨난 땅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전해 준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는 하느님의 처벌로 노동이 ‘혹사, 지겨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람을 에덴에서 내보내신 후에도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창세 3,23) 에덴 안에 있건 밖에 있건, 인간은 ‘흙’을 노동의 터전으로 삼고 사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에덴 안에서의 노동은 기쁨의 열매를 주지만 에덴 밖에서의 노동은 죽을 때까지 고생의 연속이다. 심지어 4장에서는 인간을 살해한 폭력의 결과 땅이 울부짖고, 인간은 그가 생겨난 땅에서 아예 쫓겨나 힘들게 노동하여도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점점 가속화되는 지구의 사막화를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에덴 밖의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흙과의 관계를 무시한 결과 초래한 공동의 집 지구의 위기를 교종 프란치스코는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한다. “죄로 상처 입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폭력은 흙과 물과 공기와 모든 생명체의 병리 증상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 땅은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흙의 먼지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2항) 흙을 파괴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며, 돌아갈 곳을 없애는 일임에도 인간은 그 일을 계속해 오고 있다.
사실 에덴동산은 과거의 돌아갈 어떤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현실이다. 깨어 있는 많은 농부는 흙을 파괴하고 대기의 질을 바꾸어 기후 변화를 가속하는 농사가 아니라 흙을 오염시키지 않고, 흙이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산소를 방출하게 함으로써, 기후 변화를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농사 방법들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다. 단순히 농사가 아니라 문명의 전환을 위한 발걸음이다. 이 전환 과정이 나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될 때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희망으로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이애리(마리베로니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 경기도 연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말씀의 육화 신비를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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