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에 살아남기 2
신기술이 도입되면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적당히 사용하거나 매우 많이 사용하는 경우다. 아마 인공지능(AI) 기술에 대해서도 인간은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이 기술은 나와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얼마나 바꾸어 놓게 될까?
궁금해하던 차에 2026년 1월 5일(월) 우연히 <EBS>에서 방영하는 ‘알파고 이후 10년’이라는 다큐를 시청하게 되었다.(아래 링크 참조) 이 다큐는 한국 바둑계가 알파고 충격 이후 받은 영향, 그로 인해 생긴 내부의 변화를 다루었다. 그러고 보니 바둑계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AI의 충격을 받고 그에 대응해 온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바둑계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고 앞으로 겪을 일에 무언가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바둑계의 AI’ 신진서 9단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에 패한 지 10년이 되었다. 나도 10년 전 이세돌 9단이 마지막 5국에서 패하고 침통해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9단이 4국에서 인공지능에 버그를 일으켜 1승을 거둘 때 모두가 환호하던 기억도 새롭다. 그런데 이 알파고 이후 인간의 ‘기보(棋譜)’가 아니라 바둑 규칙만 학습한 ‘알파고 0(제로)’가 나오면서부터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인간끼리 두는 바둑은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바둑은 살아남았다. 대신 바둑계가 큰 변화를 겪었다. 이세돌 9단을 위시해 일부 기사들은 ‘인간의 바둑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바둑계를 떠나거나 AI 사용을 거부했다. 바둑계를 떠나지 않은 기사들은 AI 사용 여부와 사용 정도를 놓고 갈등하였다. 그리고 이세돌 9단의 맞은편 극단에는 ‘신진서 9단’처럼 젊고(신기술 수용에 두려움이 적다) AI를 ‘경쟁자, 스승’으로 삼고 적극 활용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신진서 9단은 AI가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활용해 약점을 보완하거나 새로운 수에 대한 힌트를 얻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그는 지난 5년 동안 세계 정상(랭킹 1위) 자리를 지켜 왔다. 한국팀도 신진서 9단 덕에 국가 대항전에서 2020년부터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해 왔다.
이 다큐에서 신 9단은 AI가 가르쳐 주는 수를 그대로 외우지 않고 추론하고 검증하고 복기하면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익혀 가고 있었다. 이러한 접근법 덕에 신 9단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매우 높은 승률을 기록해 왔다. 그는 두 점 접바둑에서는 거의 AI에 지고(항상 지는 게 아니라는 뜻), 세 점 접바둑에서는 자기가 이긴다고 하였다.
사범, 해설자의 권위를 해체한 AI
그동안 바둑은 제자가 스승(사범)에게 도제식으로 배우는 것이었다. 그만큼 스승의 권위가 절대적인 분야였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정석(定石)도 감히 제자가 토를 달 수 없는 공리(公理)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풍토에서 AI가 스승과 정석의 권위를 허물었다.
AI는 바둑계에서 정석으로 믿어 왔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승률이 높은 수만 두었다. 이 수는 그동안의 바둑계 규칙, 형식, 통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인간이 바둑에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 봐야 길게는 10수, 12수 정도를 내다보는(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정도인데 AI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한다. 사람처럼 피곤하다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상대의 수 때문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게다가 AI는 정석 같은 과거 경험에 대한 믿음 그 믿음에 바탕을 둔 고정관념이 없다. 이 때문에 인간의 인지 기능이 AI급으로 확장되고, 체력과 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인간이 AI를 이길 방법은 없다.
스승의 역할도 달라졌다. AI 도입 후 제자들은 스승이 어떤 수를 가르쳐 주면 바로 AI에 그 수의 승률을 확인했다. 이제 바둑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AI에 배우는 것이 되었다. 이 때문에 스승(사범)의 역할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서 AI와 협업하며 승률이 높은 수를 찾아 주는 역할로 바뀌었다. 인간의 감(직관)이 아니라 확률을 따르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환경 변화는 사범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실제로 AI 이후 국내 유일의 바둑학과가 폐과 수순을 밟는 중이다.
바둑을 해설하는 전문가들의 권위도 추락하였다. AI가 두는 수를 해석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들의 해설은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선수들이 정석대로 바둑을 둘 경우 경험이 많은 그들의 예측이 대부분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AI는 이들의 예측을 벗어났다. 결국 이들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대신 그 자리를 AI가 차지했다. 선수가 한 수를 두면 AI가 바로바로 그 수의 승률을 계산해 주는 식이다. 해설을 그렇게 한다. 기사들도 이렇게 훈련한다.
사라진 기풍(棋風)
AI에 보고서 작성을 시키면 과제를 부여한 사람보다 좋은 문장으로 결과를 출력해 준다. 훌륭한 문장이라 할 순 없지만 그동안 AI가 학습한 문장들 가운데 문법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 가장 선택할 확률이 높은 것이어서 상위 10퍼센트 수준의 문장 실력으로 평가된다. AI는 문장 전체를 이런 방식으로 생성하기에 나름의 고유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다 보면 AI 문체로 작성된 보고서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사용자가 자신의 문체를 고수하거나 부분적으로 자기 색깔을 가미하지 않으면 모두 같은 문체를 사용하게 된다. 문장이 표준화되는 것이다. 이런 글은 문법적으론 깔끔해도 글맛은 개운치 않다. 과거엔 글을 쓰는 이마다 나름의 문체가 있었는데, 이젠 다수가 자기식 글쓰기를 포기하면서 AI 문체가 표준이 되어 가는 형편이다.
바둑에도 나름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너나 할 것 없이 AI가 가르쳐 주는 수만 따라 두다 보니 개성에 해당하는 기풍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처음 30-50수까지는 실력에 관계없이 AI가 가르쳐 주는 대로 두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자기 개성대로 할 순 있지만 승률이 높지 않다고 한다. 대회에서 등수를 올리고 상금을 받으려면 승률을 올려 주는 AI를 사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한다. 사실상 AI 사용이 선택이 아니라 강제가 된 셈이다.
바둑계의 경험이 주는 교훈
바둑계는 ‘알파고 제로’ 충격 이후 AI 도입을 막지 않았다. 10년 전 이세돌 9단이 졌을 때 이 대국을 중계하던 전문가가 앞으로 바둑은 사람끼리 두는 바둑, 사람과 AI가 두는 바둑, AI끼리 두는 바둑 등으로 다양해질 것이라 예측하였는데 세 번째만 틀렸다. 알파고 제로가 인간 고수를 이긴 인공지능에 백전백승하면서 은퇴해 버렸기 때문이다.
알파고 제로의 은퇴 이후 사람끼리 두는 바둑은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사람과 AI가 두는 바둑은 AI의 실력이 월등해 활성화되지 않았다. 대신 AI가 훈련 상대로 자리 잡았다. 아마든 프로든 인공지능과 협업하지 않고는 실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AI를 도입하고 나서 바둑을 두는 방식, 바둑계 안에서 기사들 간의 관계 방식이 달라졌다. 두는 방식이 먼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달라졌다. 사범, 해설자, 정석의 권위가 해체되고 이들의 역할이 달라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AI는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기존에 존재하던 격차를 더 벌려 놓았다. 이 다큐에서 소개한 사례를 보면 프로들이 AI를 사용할 때 승률이 크게 높아졌다. 바둑의 논리를 잘 이해하고 충분한 경험을 축적한 기사들이 AI를 활용할 때는 능력이 증강되었던 것이다. 신진서 9단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AI가 출력한 결과를 그대로 사용하는(또는 믿는) 이들과 그 결과를 검증하고 보완이나 폐기를 명령할 수 있는 경험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와의 차이에 비할 수 있다. 이세돌 9단은 이 두 집단 사이의 격차가 너무 커져 이제는 극복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남녀 간 격차가 줄어든 것이다. 남녀 혼성 대국에서 여성 기사가 결승에 올라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AI 덕에 이런 격차는 줄어 가는 중이라 한다.
당연히 사용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만 두는 본래의 바둑을 좋아해서,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이 어려워서 등 이유도 다양하였다.
이 다큐는 짧지만 지난 10년 사이 바둑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미 능력이 뛰어난데 새로운 기술까지 잘 활용하는 사람은 혼자 몇 사람 몫을 하게 될 것이다. 중간 정도의 위치(수준)에 있는 이들은 적당한 수준의 실력 향상을 경험할 것이다.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유지하지만 자기 분야에 재진입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동안 당연했던 일자리들은 사라지거나 역할이 재정의될 것이다. 바둑 사범, 해설자처럼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AI에 적응하고 AI가 요구하는 방향에 맞춰 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 왔던 인간의 고유성은 희미해질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간다고 해서 인간성이 상실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인간은 역사 내내 이렇게 기술과 공진화해 왔으니 AI 시대에도 그리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군가는 인간의 바둑을 고집하며 소수의 자리를 지켜 갈 것이다.
박문수
가톨릭 신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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