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주교단, 트럼프 '무차별 대규모 추방'에 정면 반대

12년 만에 특별 메시지... "이민자 보호" 압도적 채택 트럼프 측 "교회가 틀렸다" 반박, 정교 갈등 예고

2025-11-24     경동현 기자

미국 가톨릭 주교단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추진하는 핵심 공약인 '불법 이민자 대규모 추방' 정책에 반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미국 주교회의는 지난 12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추계 정기 총회에서 이민 문제에 관한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고, 인간 존엄을 위협하는 무차별적 법 집행에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미 주교회의가 주교단 전체의 이름으로 '특별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2013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에는 오바마 행정부의 건강보험 개정안에 포함된 피임 의무 조치에 반대해 같은 형식을 사용했다. 주교단은 민주당 정부의 생명윤리 정책과 공화당 정부의 이민자 정책을 둘러싸고 각각 강하게 목소리를 내 온 것으로 알려졌다.

11월 11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추계 총회에서 인사하는 고위 성직자들. (사진 출처 = 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유튜브 채널 동영상 갈무리)

"우리는 무차별적 대규모 추방에 반대한다"

이날 주교단은 찬성 216표, 반대 5표, 기권 3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성명서를 채택했다. 성명서에 더 강한 표현이 포함된 것은 시카고 대교구장 블레이즈 수피치 추기경의 제안이 반영된 결과다. 수피치 추기경의 수정 제안으로 성명서에는 "우리는 무차별적인 대규모 추방에 반대한다"는 문구가 명시됐다.

주교단은 성명에서 "특정 집단에 대한 감시와 단속으로 공포와 불안이 조성되는 현실에 동요하고 있다"며 "이민자들을 악마화하는 작금의 논쟁에 슬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다가 체포될까 두려워하고, 병원과 예배당의 신성함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언급하며 사목자로서의 비통함을 토로했다.

주교단은 "인간의 존엄과 국가 안보는 상충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국경 통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합법적이고 안전한 이민 경로가 인신매매와 착취를 막는 해법이라고 제시했다.

트럼프 행정부 "교회가 틀렸다"... 깊어지는 골

주교단의 성명은 트럼프 행정부와 즉각 충돌을 빚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경 정책을 총괄하는 '국경 차르' 톰 호먼은 성명 직후 기자들과 만나 "가톨릭교회가 틀렸다"고 반박했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그는 "국경 보안이야말로 생명을 구하는 길"이라며 주교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지 언론들은 이번 성명이 미국 가톨릭교회가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저항 세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일부 보수 성향의 평신도들은 "주교들이 국민 안전보다 불법 체류자를 우선한다"고 비판하고 있어, 이민 문제를 둘러싼 교회 안팎의 진통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주교단은 성명 말미에 "희망의 사람"(로마 5,5 참조)으로서 정부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이민 제도 개선을 옹호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1월 11일 볼티모어에서 열린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추계 총회에서 시작 기도하고 있는 고위 성직자들. (사진 출처 = United States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유튜브 채널 동영상 갈무리)

[전문]

이민에 관한 미국 주교회의 특별 사목 메시지

2025년 11월 12일, 볼티모어 추계 총회

목자로서 우리 미국 주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와 연민의 유대로 교우들과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교우들 사이에서 특정 집단에 대한 감시와 이민 단속 문제로 인해 공포와 불안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보며 심히 동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논쟁 상황과 이민자들에 대한 악마화(비방)를 보며 슬픔을 느낍니다.

우리는 구금 시설의 환경과 그곳에서 사목적 돌봄이 제공되지 않는 현실을 우려합니다. 또한 미국 내 일부 이민자들이 자의적 방식으로 법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점을 한탄합니다. 미사 장소의 신성함과 병원 및 학교가 가진 특수한 성격이 위협받는 것에 대해 근심합니다.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다가 구금될까 두려워하는 부모들을 만날 때, 그리고 이미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한 이들을 위로하려 할 때 우리는 비통함을 느낍니다.

온갖 장애물과 편견에도, 수 대에 걸친 이민자들은 우리 국가의 안녕에 막대한 기여를 해 왔습니다. 가톨릭 주교로서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며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도합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지금의 이 환경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 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낍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국가가 이민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기본 존엄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우리 주교들은 미국의 이민 법률과 절차에 의미 있는 개혁을 지지합니다. 인간의 존엄과 국가 안보는 상충하지 않습니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이 두 가지는 모두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공동선을 위해 국경을 통제하고 정의롭고 질서 있는 이민 제도를 확립할 책임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한 절차가 없다면 이민자들은 인신매매나 다른 형태의 착취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이민 경로는 이러한 위험에 해독제가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창세 1,27)에 대한 근원적 관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목자로서 우리는 성경과 주님의 모범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연민이라는 지혜를 발견합니다. 예언자들이 상기시켜 주듯, 주님의 우선순위는 가장 취약한 이들, 곧 과부와 고아, 가난한 이와 이방인에게 있습니다.(즈카 7,10)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분(2코린 8,9)을 봅니다. 먼지 속에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30-37)을 보며,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계시는 그분(마태 25장)을 봅니다. 이웃에 대한 교회의 관심, 그리고 이곳 이민자들에 대한 관심은,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민자 형제자매 여러분,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받기에(1코린 12,26), 우리는 여러분의 고통 속에 함께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이미 이민자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함께하고 지원하고 있음에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선의를 가진 모든 이가 이러한 노력을 지속하고 확장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무차별적인 대규모 추방에 반대합니다. 이민자를 향한 것이든 법 집행관을 향한 것이든, 비인간적 수사와 폭력이 종식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국가의 지도자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공직자 및 선출직 공무원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과거와 현재의 기회들에 감사합니다. 이러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이민 개혁을 지속적으로 옹호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희망의 사람으로 남을 것이며,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참조)

과달루페 성모님의 망토가 그 모성적이고 사랑 넘치는 보살핌으로 모두를 감싸 안아 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심께 더욱 가까이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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