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일극(一極) 시대
소련 해체 이후 30여 년간 펼쳐졌던 미국의 유일 패권 시대가 저물고 있다. 이런 흐름은 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의와 미중 정상회의, 한미 정상회의, 한중 정상회의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트럼프-시진핑 타협의 의미
유일 패권국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 이후 안보, 관세 관련 일방적 조치를 하루가 멀다하게 쏟아내, 세계 주요국들을 쩔쩔매게 했던 트럼프의 기세가 이번 회담에서 한풀 꺾였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대중국 관세 100퍼센트 인상 위협 철회, 펜타닐 관세 10퍼센트 인하, 인공지능(AI) 관련 반도체 수출 통제 일부 유예 조치를 내놓으며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휴전했다.
타협을 위해 지난 9월 상무부가 발표한 ‘엔티티 목록’ 확대 조치를 이번에 유예한 것은, 국가 안보 관련 기술 통제의 최초 양보라는 점에서 트럼프의 체면이 크게 상했다고도 볼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 기존 제재 기업의 자회사들까지 ‘엔티티 목록’에 올려 제재를 가했다면, 제재받는 중국 기업은 1200개에서 2만여 개로 늘어나 중국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다음 날 미국의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올해 트럼프가 추진했던 무역 전쟁은 이룬 것이 많지 않다. 기껏해야 시간을 좀 벌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가 양보하며 중국과 휴전을 선택한 것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와 콩 수입 중단 카드 때문이었다. 중국은 10월 초 중국산 희토류 수출을 전면 통제한다고 발표했다. 모든 희토류와 희토류 생산 기술, 리튬 이온 전지 수출 허가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세계 희토류 시장의 90퍼센트를 장악한 중국이 만약 이 조치를 시행한다면, 미국의 방위 산업을 포함한 전 세계의 첨단 기술 제조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중국의 미국산 대두 수입 금지도 트럼프와 공화당에겐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콩을 생산하는 미국의 중서부가 트럼프와 공화당의 표밭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의미
한미 정상회담과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낯선 풍경이 벌어졌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는 핵추진 잠수함이 필요하다며, 미국에게 핵연료 제공을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은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이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핵추진 잠수함 건조는 자주국방의 문제로서 특정 국가를 겨냥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고, 시 주석은 한미가 국제적 비확산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는 정도로 넘어갔다.
중국의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도 다음 날 이례적으로 부드러운 논평을 냈다. 한미 간 핵추진 잠수함 협력 관련 모든 국가가 자신의 안보를 지킬 정당한 권리가 있지만 타국을 겨냥해서는 안 되며, 한미 양국은 핵의 비확산 의무를 준수하고 역내 안정과 평화에 도움되게 행동하라는 수준이었다. 과거 호주의 핵추진 잠수함 추진 때와는 너무나 다른 기조다.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전략 무기로서 역내 세력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평가되는 핵추진 잠수함 문제에 대한 미중의 이러한 태도는 과거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
미국 중심의 일극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면 향후 펼쳐질 새 질서는 무엇일까?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은 새 판을 짜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트럼프 진영 사람들은 자유 무역과 세계화, 이를 뒷받침하는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국제 기구와 국제법 등의 기존 질서가 미국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단정한다. 자유 세계의 질서하에서 중국은 세계적 무역 체제를 악용하며 부상했고, 독일·일본·한국은 수출 주도의 성장 전략으로 자신의 대규모 수출 잉여품을 미국에 떠넘겨, 미국의 산업이 망가지고 연방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자비로운 패권 국가’로서 자유 무역과 개방 경제,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세계 경찰 노릇을 하던 미국은 더 이상 없다고 공언한다.
트럼프 책사들은 미국의 세력권에 있는 동맹과 협력 국가들에게 ‘상호주의’에 입각해 다음 세 가지를 하라며 압박하고 있다. 첫째, 안보를 더 이상 미국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돈을 들여 스스로 해결하라고 한다. 둘째, 무역 수지의 균형을 지키라고 한다. 미국에 흑자를 내는 국가들은 자발적으로 수출을 제한하고, 자신의 기업들에게 미국 내에 생산 시설을 짓도록 해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라고 한다. 셋째, 중국을 배제하라고 한다. 중국은 시장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의 규범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 협력 국가들은 중국과의 거래를 중지하라고 한다. 돈 들이지 않고 패권국 역할을 하겠다는 너무 자의적이고 일방적 요구인지라 미국의 동맹국들이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안보 차원에서는 ‘역외 균형 전략’으로 드러났다. 역외 균형 전략이란 역외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동맹국의 역할을 키워 해당 지역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전략인데, 18-19세기 영국이 유럽 대륙에 취했던 전략이다. 영국은 유럽의 구체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패권국이 출현하지 않도록 세력 균형을 도모했으며, 균형이 깨지는 결정적 순간에만 개입했다. 트럼프 책사들은 미국의 국력 저하로 모든 지역 문제에 개입하는 기존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 패권 전략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직접적 세력권인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며, 역외 지역에는 역외 균형 전략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향후 세계 질서
앞으로 펼쳐질 국제 질서는 다층적 다극(多極) 시대, 분야별 각자도생의 시대다. 경제적으로는 분야별 경제권(블록)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반도체 시장은 미국 중심의 유럽 연합, 일본, 한국, 대만 등이 참여하는 주요 경제권과 중국 중심의 BRICS 국가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참여하는 부경제권이 만들어지고, 희토류 시장은 그 반대가 되는 경제권 질서다. 각국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분야별로 이합집산하는 각자도생의 세계다.
군사적으로는 지역별로 해당 지역의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세력 균형 질서가 예측된다. 미국 중심의 아메리카 세력권, 독일·프랑스와 러시아가 각축하는 유럽 세력권, 중국과 미일이 각축하는 동아시아 세력권 등, 전 세계가 권역별로 나뉘어 그 특성에 따라 형성되는 ‘권역별 세력 균형’ 질서다. 동남아 국가 연합(ASEAN)처럼 협력적 안보 질서를 만든 지역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지만, 중동처럼 역내 국가들이 상생과 협력의 틀을 만들지 못하는 지역은 상시적 갈등과 분쟁에 시달릴 것이다.
동북아 지역은 미중 간 패권 경쟁이 펼쳐지는 앞마당이라 협력적 안보 체제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여기에 대륙과 해양 세력이 맞부딪치는 한반도는 남북한이 분단된 채 적대하고 있어,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평화적 통일과 협력적 동북아 안보 체제 구축이라는 이중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 전략은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는 이제 미국에 의존해 그 하위 동맹국으로 살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처지다. 지난달 경주 회담에서 드러난 것처럼 미국은 한국에 핵추진 잠수함을 허용할 만큼 우리의 역할 제고를 원하고 있고, 중국 또한 한국의 부상을 미국의 퇴각과 맞물린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 셈이다. 이제 진영을 넘어 공동체의 생존 전략을 짜기 위해 우리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한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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