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에게 총 겨눌 수 없다”, 성경으로 재조명한 여순항쟁

광주 정평위, 여순항쟁 77주기 심포지엄 “부당한 권력 거부는 예언자적 행위”

2025-11-21     경동현 기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하고 순천 매곡동 성당이 기획한 ‘여순항쟁 77주기 심포지엄’이 지난 17일 광주대교구 교구청 대건문화관에서 열렸다.

‘형제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1열왕 12,24)’를 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1948년 여순항쟁을 이념 대립이 아니라 폭력을 명하는 부당한 권위 거부로 보는 성경적·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17일 여순항쟁 77주기 심포지엄에서 (왼쪽부터) 김정용 신부, 김영선 수녀, 주철희 박사가 발제와 토론에 참여했다. (사진 제공 =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동족상잔 거부는 ‘하느님의 뜻’이자 예언자적 저항

발제를 맡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김영선 수녀(루시아)는 여순항쟁의 핵심을 “제주 4·3 항쟁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을 피하고자 했던 제14연대 군인들의 봉기”로 설명했다. 그는 이 사건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폭력에 저항한 예언자들의 행동과 연결해 해석했다.

김 수녀는 ▲남북 분열의 위기에서 동족 간 전쟁을 막아선 스마야 예언자(1열왕 12,21-24) ▲적군인 아람 군대를 죽이지 않고 환대해 돌려보낸 엘리사 예언자(2열왕 6,8-23) ▲동족 유다인 포로들을 형제로 인정하고 돌려보내게 한 오뎃 예언자(2역대 28,5-15)를 사례로 들었다.

그는 “성경 속 예언자들이 ‘너희 형제와 싸워서는 안 된다’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며 폭력을 멈춰 세웠듯,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이 제주도민을 ‘형제’로 여기고 파병을 거부한 것은 양심의 명령이자 하늘의 명령에 따른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제14연대 군인들은 성명서에서 스스로를 ‘조선 인민의 아들’이라 칭하며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어 그는 “여순항쟁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가 적대적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며, “폭력적 구조 앞에서도 비폭력 저항과 상호 존중을 선택하는 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평화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형제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폭력을 명하는 권위에 반대한 성경의 사례를 통해 본 여순항쟁'을 주제로 발표하는 김영선 수녀. (사진 제공 =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역사 기록이 곧 재발 방지,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 곁에 서야”

토론자로 나선 주철희 박사(역사공간 벗 대표)는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여순항쟁을 성경의 사례로 당시 폭력 상황을 해석한 점이 매우 새롭다”고 평했다. 그는 여순항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 토지 개혁 미완 등 구조적 폭력을 공감하며,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역사에 정확히 기록하고, 국립묘지 안장 취소 등 실효적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정용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는 논평에서 1948년 계엄령과 지난해 말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를 연결하며, 국가 폭력의 반복성을 경계했다. 그는 “1948년과 2024년, 이 두 시간 속의 대한민국 역사의 운명은 완전히 달랐지만, 국가가 국민 주권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훼손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의 뿌리는 같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가 국민 주권을 유린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의 폭주에 맞서 시위대의 맨 앞에 서야 한다”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부당한 명령에 저항한 여순항쟁'을 주제로 한 김영선 수녀의 발제문을 놓고 토론하는 주철희 박사. (사진 제공 =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발제에 대한 논평을 전하는 김정용 신부. (사진 제공 =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본당 공동체가 시작한 ‘기억의 연대’

여순항쟁의 진상 규명은 그동안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선행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지점에서 이번 심포지엄의 의미가 드러난다. 해방 정국의 한국 천주교회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경계 속에서 반공 노선을 유지하며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여순항쟁 현장에서 국가폭력이 벌어지는 동안 교회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개신교가 손양원 목사 관련 기록 등을 통해 당시의 비극을 기억해 온 것과 달리, 가톨릭 내부에서는 여순항쟁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순천 매곡동 성당(주임사제 이영선 신부)은 여순항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 교회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이번 논문과 심포지엄을 제안했다. 이는 77년 전 교회가 응답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뒤늦게나마 돌아보고, 희생된 이들의 곁에 서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교구 차원의 행사이면서도 매곡동 성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공동체가 주도적으로 기획해 낸 시도는, 교회 안에서 오래 미뤄진 질문을 다시 꺼내는 출발점이 됐다.

심포지엄 참가자들은 여순항쟁을 단순한 반란이나 폭동이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불복종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항쟁'으로 재확인했다. 진상 규명과 치유가 여전히 필요한 현실 속에서, "형제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는 성경의 메시지는 오늘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교회가 어떤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되묻게 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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