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세우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지난 11월 13일은 수능일이었다. 매년 11월에 치르는 수능은 거리 곳곳에 붙은 현수막, 직장인 출근 시간과 학생 등교 시간 변경, 중·고등학생 자율 휴업일 등 가족이나 지인 중에 입시생이 없어도 수능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가 행사’가 되어 버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당, 국회의원, 구청장들의 수능 응원 현수막들이 걸렸는데 그동안 “수능 대박”, “수고하셨습니다” 식으로 천편일률적이었던 문구들이 다행히 조금은 달라졌다. 그중 가장 와닿았던 현수막은 녹색당의 “수능을 잘 보든, 못 보든, 안 보든 차별없이 존엄한 사회로! 모든 청소년의 삶을 응원합니다”였다. 수능일에 수능 시험장 대신 일터로 출근하는 직업계고나 학교 밖 청소년들을 다룬 기사들도 예전보다 많아졌다. 계엄 이후 광장을 거치면서 이제야 조금씩 평등으로 가는 길에 시선이 닿는 것 같다.
성적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
수능은 단순히 대학 입학을 위한 시험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좋은 성적 = 좋은 대학 = 좋은 일자리’라는 공식이 존재하고, 여기에서 수능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첫 관문이다. 높은 점수를 받아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면 성공한 사람으로,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대학을 안 갔든, 못 갔든 이유를 불문하고 ‘대학 비진학자’는 무능하거나 불성실한 사람으로 치부해, 아예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뿌리 깊이 학벌주의에 물들어 있는지 보여 주는 자료는 많다.
지난해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재단법인 '교육의 봄'이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기업 채용 시 학벌 차별에 대한 국민 인식’ 결과 응답자인 만 18살 이상 1천여 명 중 74.7퍼센트가 학력 차별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또 85.2퍼센트는 기업 채용 과정에서 출신 학교와 학벌이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대학 입시 거부 운동의 현장
한편, ‘모두가 대학에 가야 하는 이상한 나라’에 저항하는 외침도 있다. 2011년부터 대학 입시 거부 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은 올해도 대학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드러내는 ‘대학 비진학자 가시화 주간’ 행사를 진행하고, ‘수능 D-100일’에 저항하는 ‘투명가방끈 100일 저항일력’ 문구를 페이스북에 매일 게시했다.
수능을 며칠 앞둔 11월 10일, 서울 시청 앞에서 ‘2025 대놓고학력학벌차별상 시상식’을 가진 투명가방끈은 서울시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지난 4월 서울시는 교육 취약 계층을 위한 교육 플랫폼 사업 ‘서울런’을 홍보하며 시청 외벽에 대형 현수막을 걸었는데, 현수막엔 ‘서울런 대입 합격 782명’, ‘서울대 00명, 고려대 00명, 의·약학계열 00명, 주요 대학 719명’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투명가방끈은 기자회견문에서 “지자체 정부가 특정 몇몇 대학에 간 학생들만 자랑거리이자 성과라며 내거는 행태는, 입시 경쟁과 대학서열화가 사회적 문제 현상이라는 최소한의 인식조차 없어 보인다.”고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차별인 줄도 모르고 받아들이고 그냥 넘어가는 학력 학벌 차별들이야말로 사회와 교육을 망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평등한 시민이라는 진실이자 지향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학력 차별 사회가 조장하는 우열반
학력 학벌 차별 사회는 학생들의 삶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초중고뿐만 아니라 대학도 좋은 회사를 가기 위한 취업 준비 학원이 된 지 오래다.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유아 사교육 기관 레벨 테스트부터 상위권 대학에 가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학창 시절이란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시간일 뿐이다. 학생들은 어떤 입시 제도, 어떤 교육 과정에서든 시험 문제를 푸는 기계로 전락한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저서 "납작한 말들"에서 “시험 성적 자체가 하나의 도덕이자 윤리가 돼버리면 한쪽엔 우월감을 다른 한쪽엔 열등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우월감은 누군가를 멸시하는 공격성으로 이어지고 열등감은 자신을 향한 비열한 공격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봉쇄한다.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납작하게 찌그러져도 자신 탓을 해야 한다. 상처를 입은 자들이 방어를 하지 못하니 한쪽의 무례는 더 사악해진다. 그럴수록 시험 성적에 따른 희비는 더 강력하게 교차한다.”고 경고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혐오는 경쟁 교육이 만든 결과이고, 이 둘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을 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는 건 아닐까.
출신학교채용차별금지법 제정 100만 국민운동
학력 학벌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면 교육도 바뀔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명제지만 대부분 “그게 되겠어?” 하며 포기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그럼에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숙원 과제다.
2017년에 도입된 고용정책기본법 7조는 기업이 근로자를 채용할 때 학력과 출신 학교를 이유로 차별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위반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없는 상태다. 실제로 과거 신한은행과 서울대병원 채용 비리 사건에서도 법원이 "처벌 근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사례가 있었다.
채용 현장에서는 ‘학력 무관’이라고 홍보해도 여전히 출신 학교에 따라 서류 전형 통과율이 달라지고, 고졸에게는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기업은 암묵적으로 특정 대학 출신자를 선호하는 '학벌 필터'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2년 전 충청북도는 청년 행정 인턴을 모집하면서 대학생만 지원할 수 있도록 자격을 제한해 논란이 됐다. 5년 전 교육부 감사에서는 연세대를 포함한 10개 대학이 직원 채용 과정에서 학력과 출신 학교를 차등 채점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올해 9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강득구 의원이 출신 학교나 학력 기재 자체를 금지하는 '채용절차공정화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기존 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반 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학력이 아닌 직무 능력 중심의 공정한 채용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다. 여기에 시민들이 가세했다. 출신 학교에 따른 채용 차별 반대 운동에 앞장서 온 ‘교육의봄’을 중심으로 교육·노동·마을·청년 단체 등 100여 곳이 모여 '출신학교채용차별금지법 제정 100만 국민운동'(이하 출차법 국민운동)을 시작했다. 사회의 채용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고질적인 학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 뜻을 모은 작은 모임들의 큰 연대다. 전국 단위의 시민 단체뿐만 아니라 영화 ‘3학년 2학기’를 만든 제작진을 비롯해 대안학교 학급 학부모 모임, 스타트업 동아리 등도 법안에 동의하며 평등 광장에 속속 집결하고 있다.
출차법 국민운동에 참여한 단체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해당 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것을 촉구하며 연내에 참여 단체를 300곳으로 확대하고 100만 국민 서명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법 하나를 만들자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사회 변화 운동이다.
출신학교채용차별금지법 제정 100만 국민운동 참여 https://just.or.kr/
투명가방끈이 매일 게시한 저항일력의 D-32일 글에는 2011년 11월 1일 대학거부선언 <우리는 낙오자가 아닌 거부자입니다> 내용 중 “모든 사람들이 행복이 유예된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 오늘이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올라왔다. 그리고 수능일인 D-Day에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모두 투명가방끈이다.”

이윤경
사교육 기업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다 2011년 여성단체 상근 활동가로 취업한 후 마을공동체 살리기, 차별 반대, 교육개혁 운동 등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마케터에서 활동가, 상담가, 조직가로 지나온 시간 속에 언제나 ‘진심’을 다했던 경험들이 자랑이자 자산이다. 공저로 "대한민국 교육트렌드 2024",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학교, 회복을 담다", "체벌 거부 선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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