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광복 80주년 기념일
소년 강덕상이 맞이한 해방
소년 강덕상은 8월 15일을 어떻게 맞았을까?
1945년 3월, 중학교 2학년생이던 강덕상은 미국의 공습이 심해지자 홀로 지방으로 피난했다. 그 무렵 학생들은 다가올 본토 결전에 대비해 연일 돌격대 검술, 곤봉 입문, 참호와 장벽을 뛰어넘는 훈련, 염전과 개간 작업에 동원되었다. 소위 낙지 항아리라 불리는 방공호 파기는 개간 못지않게 고된 작업이었다. 강덕상은 배고픔과 싸우면서 8월을 맞이했다.
8월 15일 조회 때, 인솔 교사는 “정오에 중대 방송이 있으니, 산기슭의 농가에 집결하라”고 학생들에게 지시했다. 정오가 되자 학생들은 농가 라디오 앞에 모두 모였고 라디오를 향해 경례했다. 방송이 시작되었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잡음뿐이었다. 방송을 통해 ‘그 사람’이 발화하는 독특한 억양의 일본어 몇 마디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강덕상은 하숙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8월 16일 저녁 8시경, 거리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넓고 캄캄한 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하니 이곳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강덕상의 회고에 따르면, 창문에는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만 지도에서 잘라낸 것 같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기쁨에 넘친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집에 들어가니 동포들이 모두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곳은 주변 일대와는 달리 매우 소란스러웠다. 억눌려 있던 어떤 것이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뿜어져 나온 것 같았다.
강덕상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 보았다기보다 만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금까지 경례하던 일장기로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다. 일장기를 없애고 태극기로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빼앗긴 것을 되찾는 자기 회복의 과정이었다. 태극기의 발견! 조선어의 사용! 소년 강덕상은 그렇게 해방을 맞이했다.
강덕상은 사진과 함께 자작시, ‘황금빛 물결치는 도메(登米) 평야의 정취’를 남겼다. “부모님을 떠나 사누마(佐沼) 마을에서/쓸쓸히 홀로 둑에 서다/생각에 잠겨 하늘을 보니/저물 듯 저물지 않는/노을 진 오늘 해에/수심을 품은 구름이 흩날린다/저편 언덕 부모님의 하늘”
‘패전’이냐, ‘종전’이냐
강덕상이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종전조칙’(終戰詔勅)은 전국에 방송되었다. 일본인은 부동자세를 취하거나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막막했다. 영광스러운 제국의 종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종전조칙’은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이 결정된 뒤 작성되었고, 히로히토의 낭독은 미리 녹음되었다. 본토 결전을 주장하는 일부 강경파 군인들이 이 방송을 저지하기 위해 녹음테이프 탈취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천황의 육성 방송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국민에게 예고되었지만, 세부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방송을 통해 천황의 조칙 내용을 듣고서야 처음으로 일본 국민은 일본이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황의 육성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은 패배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황이 낭독한 조칙에는 ‘항복’이나 ‘패배’, ‘종전’ 등의 용어는 쓰지 않았다. 조칙의 요지는 일본 민족이 연합국의 막대한 무력에 의해 더 이상 피해받거나 괴멸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천황이 평화를 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조칙은 천황이 일본 국민에게 평화를 가져올 방책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역사 용어에서도 드러난다.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패전’ 대신 ‘종전’이라는 용어를 썼다. 천황의 ‘종전조칙’은 일본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천황의 결단에 따라 평화를 찾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종식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이었다. ‘패전’ 대신 ‘종전’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단지 용어상의 문제를 넘어 일본 국가의 기본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 준다.
일본 사회는 진정 평화를 바라는가?
1963년 5월 14일 일본 각의는 ‘전국 전몰자 추도식의 실시에 관한 건’을 결정했다. 이후 매년 8월 15일, 정부가 주최하는 '전몰자 추도식'이 정례 행사가 되었다. 이는 전후 일본 사회가 과거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상징적으로 알려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날에도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기념식에서는 죽은 이에 대한 묵도와 함께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로 기억한다. ‘나라를 위해 무고하게 죽어 간’ 병사들과 민간인 전몰자들의 넋을 달래고, 전쟁의 비참함을 되새기며 평화를 기원하고 다짐한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진정 평화를 바라는가? 일본인의 전쟁 체험은 한마디로 피해 체험이다.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이래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등의 전쟁이 이어졌으나, 일본인에게 아시아-태평양 전쟁만큼 극적인 피해 체험은 처음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막대했다. 일본 측의 인명 피해만도 사망한 군인과 군속이 20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오키나와 주민이 약 15만 명, 원폭 사망자 수는 1945년에만 히로시마 13-14만 명, 나가사키 7-10만 명, 그리고 공습 피해자도 1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 체험에 매몰된 일본 사회는 민족적 책임과 자각을 뒷받침할 논리를 세우지 못했다. 더욱이 중국과 달리 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은 아시아-태평양 전쟁 체험의 그늘에 가려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침략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책임 의식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중성 때문에 모호해졌다. 자신의 가해 책임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커졌다. 국가와 보수 우익 정치가들은 가해 책임을 인정하는 일은 ‘나라를 위해’ 또는 ‘무고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가해자로 몰아 두 번 죽이는 일로서, 국민감정을 거스른다고 강변했다. 보수 우익 정치가들이 ‘전몰자 유족회’를 중요한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폭 체험
태평양 전쟁의 피해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응축한 사건은 ‘원폭’ 또는 ‘피폭’이다. 현대사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 폭탄이 실전에 투하된 유일한 사건이라는 점, 전장이 아닌 민간인 지역에 투하되어 무차별 대량 살상을 초래했다는 점, 전대미문의 파괴력으로 한순간에 모든 지역을 괴멸 상태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원폭 후유증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점 등, 일본인에게 원폭을 전쟁 체험의 상징으로 삼게 만든 사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그 밖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피해는 일본의 피해를 훨씬 능가했다. 강압적 침략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온 조선인들은 ‘황국 신민’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에 동원됨으로써 침략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6만여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만 수천 명이 피폭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가사키에서는 1만 2천-2만 명 정도가 피폭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피폭자들 가운데는 강제 연행된 군인, 군속, 징용공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전후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폭에 대해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 만주 침략 이후 15년간 일본과 싸운 중국의 피해도 엄청나다. 1937-45년 동안만 군인 사상자 562만 명, 점령 지구의 민간인 사상자 135만 명, 공습에 의한 사상자 76만 명이었다.
피폭 체험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오키나와 전투, 도쿄 대공습의 체험도 강렬하다. 그밖에 전쟁 관련 체험은 총력전을 치르기 위해 오랫동안 생활이 궁핍했다는 것,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넘도록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들어 아사자가 속출했다는 것, 전쟁 중 가족을 잃은 일 등 전쟁 피해 체험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따라서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일본인들은 패전의 슬픔만이 아니라,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안도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체험은 일본인들에게 피해 체험으로 계속 반추되면서 현대 일본의 사회 심리 형성에 중대한 기반이 되었다.
이중 피해자 의식
일본 사회에는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 외에 또 하나의 피해자 의식이 존재한다. 일본 국가와 천황제 파시즘의 피해자라는 의식, 일본 국민은 전쟁 피해자인 동시에 군국주의의 피해자라는 이중 피해자 의식이다. 일본 국가와 국민을 분리해 국가를 가해자로, 국민을 그 피해자로 설정하는 방식은 전후 진보 지식인들이 천황제 파시즘과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다. 이런 비판은 지배자인 국가와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민중은 국가의 이데올로기 교화에 따라 전쟁에 연루되었으며, 국가의 침략 정책을 지지 또는 환영했다. 전시에는 각종 지역 조직을 통해 물자가 동원되었고, 전쟁 협력을 위한 민간단체들의 조직화가 추진되었다.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비국민’(非國民)은 최대 비난의 용어였다. 국가가 갖가지 방법으로 민중을 전쟁에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또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 피해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보다 국체를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전선에서는 퇴각도 항복도 용인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죽는 ‘옥쇄’(玉碎)가 강요되었고, 정부와 군부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위해 항복을 마지막까지 미룸으로써 원폭 피해와 같은 참사를 초래했다. 전후 일본인들의 기록에 ‘속았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전후 민주주의 사상과 내셔널리즘(국가 우선 사고)에 대한 저항감은 이런 피해의식과 맞물려 확대되었다. 이중 피해자 의식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일본인 자신의 민족적 책임의 논리를 발전시키는 데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다. 침략은 일부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것이며, 일본 국민도 그 피해자라는 논리는 일본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전쟁 협력에 대한 죄의식과 콤플렉스(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세력을 확장할 때, 일본 국민은 자국의 승리와 강대국화를 열렬히 환영하고 ‘일등 국가’로서의 자부심을 키웠다는 점, 따라서 일본 국민은 침략 전쟁의 당사자였다는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해방 80주년을 맞았지만, 왜곡된 역사 인식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받아들이는 일본인과 이를 조직적으로 선동하는 극우 정당과 정치인이 계속 출현하고 있다. 혐한 분위기에 편승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인식이 증폭되고 있다. 일본 사회의 극우화를 바라보면서, 이런 현상이 누구보다도 일본인 스스로에게 가장 커다란 비극을 초래할 것 같아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부설 강덕상자료센터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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