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과 시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신비적 지능 교육할 때
(기사 출처 = <America Magazine>, 2025년 7월 24일)
(사라 갈라거. 현재 로마에 살고 있는 가톨릭 국제 학교 교육지도자며 고전학자이자 작가. 급변하는 기술 중심 세계의 도전에 관상 수련이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셰이머스 히니의 시 '나만의 헬리콘'(Personal Helicon)에서 시인은 어린 시절 우물에 매료됐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우물은 어둡고, 메아리가 울리는 침묵과 경이로움이 깃든 안식처였다. 어린 히니에게 이 우물은 깊이와 울림으로 통하는 관문이 되었다. 어른이 된 그는 "어둠을 메아리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운율을 짓는다고 썼다. 이 이미지는 교육에 대한 빛나는 은유를 제공한다. 마음을 소음으로 채우지 않고, 침묵이 말하고 신비가 울려 퍼지는 공간을 가꾸는 것이다.
(역자 주 :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시 '나만의 헬리콘'은 그의 첫 시집 "자연주의자의 죽음"(1966)에 수록된 작품이다. 헬리콘은 그리스 신화에서 시와 예술의 여신 뮤즈가 살고 있는 산이다. 시에서 그는 자신의 시적 영감의 근원을 탐구하며, 어린 시절 우물을 중심으로 한 기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40년 동안 여러 대륙에서 일반 기관과 가톨릭 기관을 넘나들며 교육계에 머물면서, 교육 방식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순간은 과도기가 아니라 문턱이다. 오랫동안 신뢰해 온 논술, 강의실, 시험지 같은 구조는 쇠퇴하고 있다. 그 자리에는 알고리즘과 지표에 맞춰진 교육 체계가 들어섰다. 학교는 평가 방식 재검토, 교육 과정 확장, 교육 방식 모색 등 칭찬할 만한 변화로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러한 재조정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더 근본적인 것, 즉 교육의 목적을 재정립해야 하는가?
1980년대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다중 지능 이론을 제시하면서, 교육 논의는 단순한 합리주의를 넘어섰다. 언어, 논리, 음악, 운동, 공간, 대인관계, 내적 지능이 포함됐고, 이후 자연주의와 실존적 지능이 추가됐다. 특히 마지막 두 가지는 영적 성찰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내적 지능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이해하도록 초대했고, 실존적 지능은 삶의 궁극적 질문들을 숙고하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계가 내면 성찰과 철학적 탐구를 점점 더 많이 모방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그 다음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가드너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지능이 하나 더 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길러져 온 이것을 나는 신비적 지능이라고 부른다. 이는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영혼의 태도며, 만남에 대한 준비, 통제권 내려놓음, 신비에 대한 인내로운 환대다. 가톨릭 신앙의 본질은 통제 체계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과 만나는 태도에 있다.
신비적 지능은 역설 속에 머물며, 마음으로 경청하고, 이성뿐 아니라 경건한 주의력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는 교회의 지적 전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며, 관상이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란 걸 일깨운다. 정보 자료와 소음으로 가득한 시대에 신비적 지능은 가장 필요한 지능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기다리는 법, 경청하는 법, 침묵 속에서 신성을 인식하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사회가 추구하는 목표를 그대로 반영하며 진화해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 교육은 자유 시민이 공적 생활에 참여하고, 수사학, 철학, 토론 능력을 기르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이었다. 최근에는 사무원과 공무원을 양성하는 교육 방식을 채택해 왔다. 계산기와 맞춤법 검사기가 널리 보급된 지금도 여전히 암산, 필체, 철자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특징인 학교 종소리, 교실, 시간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수십 년간 직업 교육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경제적 이익과 권력에 대한 열망이 이공계 분야로의 전환을 더욱 심화시켰다.
한국계 독일 철학자이며 문화비평가인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우리 시대는 탈진으로 점철됐다고 진단한다. 이는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학생과 젊은 성인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끊임없는 성과주의적 삶 속에서 학업 성취, 사회적 유창성, 정서적 회복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다. 자기주도적 창업 정신이 자리 잡은 문화 속에서 자란 이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으며, 매 순간을 최적화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선의는 더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감추고 있다. 끝없는 생산성과 과도한 연결은 고갈과 불안, 그리고 침묵의 우울증을 낳았다. 불확실성 속에 머물거나 충분함 속에서 쉴 여유는 거의 없다.
지금 우리는 중대한 불확실성의 기로에 서 있다. 현재의 학생들이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인공지능과 어떻게 협력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시대는 학교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재구상하도록 요구한다. 학교는 어린 시절의 경이로움에서 성찰하는 성인기, 나아가 노년의 지혜에 이르기까지, 삶의 여정을 준비시키는 더 광범위하고 고귀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은 신비적 지능에 뿌리를 둔 적응력과 몰입, 목적의식을 길러 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상하고 실현할 가치가 있는 교육이다.
20세기 물리학의 변화, 즉 고전적 확실성에서 양자 불확실성으로의 전환은 신비적 지능을 탐구하는 데 유용한 유사점을 제공한다. 고전 물리학은 안정적 틀을 제공했다. 양자 역학은 겸손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이를 뒤집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성향, 즉 역설에 대한 개방성과 미지에 대한 순응을 알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지속적인 흐름에 대해 말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무한한 근원을 설명했다. 양자 발견은 이러한 고대의 직관을 현대 과학의 언어로 반영한다. 예를 들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는 지식의 근본적 한계를 강조하고, 통제보다는 관조적 경이로움과 더 부합한다.
이성만으로는 더 이상 복잡성을 헤쳐 나가는 강력한 길잡이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됐던 이성적 틀은 이제 비틀거리고 있다. 주의 깊은 현존, 경이로움, 그리고 신비에 대한 준비를 소중히 여긴 신비주의자들의 지혜를 되찾아야 할 때다. 이 지혜들은 유물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헤쳐 나가게 할 도구다.
나는 교실에 관상적 실천을 접목한 교육자들에게서 용기를 얻는다. 그들의 작업은 교육의 목표, 방법, 그리고 성공의 기준 등, 교육 목적을 다시 구상하라는 더 깊은 소명을 제시한다. 몇 분간의 고요함이나, 다층적 성찰을 유도하는 렉시오 디비나 형식의 공동 독서 같은 실천은 존재감와 깊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역자 주 :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거룩한 독서’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독서’를 뜻한다. 고대부터 전해진 영적 수련법으로, 성경 말씀을 천천히 읽고 묵상하여, 기도와 관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독서 방식이다.)
시장은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어떤 교육 과정도 그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생들을 내면 양성이라는 더 깊은 샘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곳, 어둡고 메아리치는 곳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신비적 지능은 학생들이 아름다움, 시, 성스러운 글을 분석 대상으로 보지 않고, 현존으로 향하는 문으로 받아들일 때 꽃피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스러운 멈춤, 성찰적 글쓰기, 그리고 “나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고 경건한 교사들이 필요하다.
인위적 확신이 증폭되고 학생들이 점점 더 외로움을 느끼는 이 임계점에서 나는 히니의 우물로 돌아간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그곳으로 초대해야 한다. 가장자리에 서서, 두려움 없이 몸을 기울여 침묵이 메아리치도록 하자. 그 메아리 속에서, 어쩌면 그들은 어떤 알고리즘도 작곡할 수 없는, 기억되기를 기다리는 영혼의 오래된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
기사 원문 :
번역 : 예여공(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 네이버 카페 '예여공'에서 월례 모임 등 정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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