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대담] 용기 있게 성스러움의 벽 무너뜨리는 환대
이번 청년 대담에서는 교회와 사회에서 말로만 강조돼 온 ‘환대’의 진짜 의미를 물었다. 특히 한국 교회 안에서 환대가 왜 어려운지, 진정한 환대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청년들의 솔직한 경험과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총 두 편으로 나눈 대담 가운데, 이번 두 번째 글에서는 성스러움과 성직 계급에 갇힌 한국 교회, 성소수자 모임에서 경험한 진정한 수용과 하나됨, 그리고 청년들이 꿈꾸는 모든 이를 환대하는 교회 모습을 함께 나누었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환대
소금감자 : 가톨릭교회는 ‘성스럽다’는 것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문제는 그 ‘성스럽다’는 게 정말 진정하고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성스러움이 아니고, 갈등, 긴장, 문제, 흠결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거죠. 심지어 그 문제와 흠결이라는 기준조차 본인들이 정한 것이라는 게 문제인 거예요. 피곤하고 긴장되는 그런 갈등을 예상하고 대비를 해야 되는 게 환대인 것 같은데, 이 교회는 성스러워야 되는, 거룩해야만 되는 것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것 같은 모든 가능성은 배제를 하고 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환대가 안 되고, 갈등과 긴장을 다룰 수 있는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죠. 근데 사실 정말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거룩함이란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취해서 강생했던 것처럼, 타자의 처지에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 그리고 거기서 함께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이 예수님이 복음에서 보여 주는 모습이고, 어떻게 보면 그것 역시 굉장히 환대의 어떤 비슷한 결이 있잖아요. 말하다 보니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생각나네요. (교황님이 말씀하셨던) 거리로 나가는 야전병원 같은 그런 것.
윤슬 : 첨언을 하자면, 환대가 안 되는 이유는 두려움인 것 같아요. 내가 알고 있는 세계에 어떤 균열이 오는 것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들의 존재를 환대할 수 없는 두려움. 두려움도 있지만 또한 억압되어 있는 상태라고 보여져요. 저도 그렇고. 그래서 뭔가 온전한 의미의 환대를 하기에는 사실상 교회 안에서 눈치를 봐야 되는 거죠.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덜 잡음을 만들어 낼 것인가,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 누구나 다 알지만 실천하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이유는 교회 자체가 너무 두려움, 혹은 억압 문화가 더 많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걸 깨려고 교회에서 환대에 대해 얘기하는 건 좋은 것 같은데, 그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나 싶네요. ‘교회’가 환대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 거잖아요.
초록 :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박정은 수녀님(미국 홀리네임즈수녀회, 전 홀리네임즈대학 영성학 교수)이 해 주신 이야기가 생각나요. 미국의 할렘가 같은 데에 있는 한 성당은 정말 가난한 이들, 성소수자 모두 환영하는 'WELCOME ALL'을 지향하는 곳이래요. 그런데 그거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고위 성직자들이 있었나 봐요. 그에 대해 수녀님이 “지금 교회는 너무 sanitized(살균) 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그 “sanitized”라는 말이 너무 확 와닿는 거예요. “너 이거야? 그럼 박멸해야지.” 이런 느낌. 그러니까 교회가 곧 무균실인 거죠.
그리고 정말 환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려면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식이 바탕에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없는 것 같아요. 어쨌든 한국 교회에서는 그런 위계 질서 그러니까 오르도(ordo, 성직 계급)가 사제들 사이에서 너무 중요한데, 외국 교회는 그만큼 심하진 않은 것 같거든요. 이게 한국 징병제의 그 군대 사회와 오르도가 합쳐져서 약간 이상한 교회 문화를 만든 것 같아요.
윤슬 : 저는 평등이랑 환대는 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평등은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얘기하는 거고, 환대는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환대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 같아요. 이미 모든 영역에서 환대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추상적으로 얘기를 하게 되지만, 아까 소금감자가 강생 얘기도 했잖아요. 오히려 역설적으로 호스트(맞이하는 사람)가 게스트(손님)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진정한 환대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예수님이, 그냥 신이 사실 인간의 모습이 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제가 그 존재 안에 뛰어드는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환대 이미지가 그렇게 역설적으로 가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환대라는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면, 그 시초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사랑 방식을 봐야 되는 것 같아요. 당신의 존재를 나에게 준 것으로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신 거잖아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 존재에 뛰어드는 것. 그게 그 사람의 약함과 그 사람의 모든 것, 그 타인의 모든 것이 되겠다는 어떤 불가능한 사랑? 환대가 그런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은 들어요.
얘기를 하다 보니 계속 강생 이미지도 떠오르고,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준다는 환대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야 되지 않나 싶어요. 신이 인간에게 갈망했던 사랑에까지 가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환대여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추상적인가.
보나 : 이해가 되면서도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그것이 가능한가? 왜냐하면 다들 한계가 있고, 모든 인간은 어쨌든 좀 자기 중심적이기도 하니까요.
윤슬 : 근데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는 거고, 그래서 교회가 생겨난 거니까. 사실 그 환대의 문화는 계속 그리스도 교회랑 같이 있어 왔는데, 생뚱맞게 세계청년대회 준비하면서 “환대를 합시다”라고 하는 그 환대는 너무 좁은 의미가 되어버려서 안타깝죠.
저는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 보면 정말 그런 마음 많이 들어요. 환대받지 못했는데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마음은 뭘까, 하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마음 안에서 이미 신에게서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환대 체험을 했기 때문에, 교회라는 권력의 횡포에도 사랑의 힘을 잃지 않는 거잖아요. 내가 이미 만났던 거죠. 환대를 해 준 깊은 그 존재를. 우리는 그걸로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요.
교회 안에서 환대의 경험
윤슬 : 가톨릭 앨라이 아르쿠스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뭐랄까, 뭔가 쑥스러움이 있고.... 되게 막 북적거리는 잔치에 온 느낌이 아니라, 전례를 위해서 모이는 공동체인데, 말로 나누지 않아도 그 공간을 이미 설계하고 구상하고 모이게끔 한 그 마음이 이미 서로 공유돼 있다고 해야 되나요. 그래서 제가 그 공간이 좀 낯설고 낯가리고 있어도, 미사를 하고 나눔 하는 그 시간이.... 뭔가 정말 좀 독특한 경험이에요. 막 박수치고 노래하고 그런 곳도 아니잖아요. 아이스 브레이킹(어색함 풀기 위한 활동)도 없어요.
이 공동체에 제 모습을 제가 보여 주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들도 그렇게 하고, 수도 없이 나오는 사람들조차도 늘 그 자리에 처음인 것처럼 얘기하는 그 모습들이.... 물론 친밀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친밀함이 나에게 하나도 상처가 되지 않는 그런 체험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아르쿠스 미사에 혼자 가도 되고. "너도 같이 가 볼래?" 하면서 옆에 친구에게도 얘기하게 되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다시 사회에서 만났을 때.... (눈빛 교환) 뭔가 이렇게, 뭔지 알겠죠?(웃음) 그러니까 비밀스러운 카타콤(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피해 숨어 지내며 예배 드리던 지하 묘지) 조직이 되는 거잖아요.(일동 웃음) 그런 게 된 느낌이에요. 환대는 그런 거였어요. 진짜 사회에서 제가 경험하는 거랑 좀 다른 맥락, 완전 다른 거 같아요.
초록 : 저도 아르쿠스 처음 갔을 때, 일단 그 자리 자체가 진짜 너무 소중했어요. 우리가 이 주제로 교회 안에서 이렇게 미사를 드리고 나눔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첫 미사 때 나눔이 굉장히 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냐하면 다들 마음속에 쌓아 둔 것들을 얘기하느라. 그렇게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얘기를 하기 시작하니까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윤슬 : 참여한 사람들에게 뭘 더 요구하지 않는 게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억지로 뭘 하게끔 하는 게 아니고.... 끝나고도 다 같이 밥 먹으러 간다면 저는 그다음에 안 갔을 거예요.(웃음)
다들 정체성이나 지향은 제쳐 두고 그냥 사람 자체가 좀 독특할 수 있잖아요. 거기서 만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런데 아르쿠스에서는 그런 개인의 peculiar(독특함)이 소중해지는 그런 체험을 했어요. 일반적인, 보통의 이런 사회에서, 예를 들어서 너무 나랑 결이 다른 독특한 사람을 만나면 피로할 것 같은데, 아르쿠스에서는 그 사람 얘기를 집중해서 듣게 되는 힘이 있어요.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누구일 거라는 것에 대한, 어떤 거에 연대하려고 왔는지를 다 암묵적으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모르고 처음 온 사람도 자연스럽게 배워 가는 것 같고요. 아마 그건 억지로 다 같이 뭔가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각자가 다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와서인 것 같아요. 그건 또 아르쿠스 활동가들이 저희들한테 뭐 이렇게 요구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요.
저는 정말 감동받았던 게 아르쿠스 미사를 늘 사무실에서 드리는데, 아르쿠스 활동가들이 미사를 성전에서 하는 것을 너무 간절히 해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느껴서 진짜 울컥했었거든요.
소금감자 : 저도 아르쿠스 첫 미사 갔을 때가 생각나요. 그때 정말 충격받았던 게 신부님 세 명이 미사 집전을 하는데 조각보로 된 무지개 영대를 하시고, 서서 강론 중에 성소수자를 세 번 정도 언급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 있다가, 그 말이나 이미지가 내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순간에 갑자기 교회의 벽이 다 박살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뭔가 요새처럼 있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낮은 자리에서 세상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려는, 그런 이미지를 처음 보는데 너무 신기한 거예요.
윤슬이 말한 성전에서 드린 아르쿠스 미사가 있어요. 그때가 작년 11월이었는데, 11월 위령 성월 때마다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들 추모 미사를 해요. 아르쿠스는 항상 기도와 미사를 위해 마련돼 있는 장소에서 미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사무실 같은 곳에서 미사를 드리니까 교회에서 늘 뭔가 밀려나는 느낌을 받죠.
그러다 2023년 12월에 예수회 기도실에서 처음 미사를 드리는데, 그때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얘기할 때 “우리 기도실에서 미사 드리는 거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하다.” 이런 얘길 많이 했어요. 그러다 어떻게 연결이 돼서 순례 성지 성당에서 미사를 하게 되었어요. 성지 방문한 사람들이 여기 미사가 있냐고 물으셔서 성소수자를 위한 추모 미사라고 안내드려서 다들 가실 줄 알았는데, 실제 미사를 드린 분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걱정했어요. 저분들 불편하지 않으실까, 힘들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는데, 미사 다 끝나고 나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가시면서 단체 이름이 뭔지 여러 번 계속 물으시고, 미사 좋았다고 하시고 갔어요. 그때 저도 좀 특별하게 기억에 남은 것이, ‘이렇게 그냥 문을 열어 놓으니까 누구나 이렇게 다 들어오는 거구나’였어요.
윤슬 : 맞아요. 저는 그날 복음 낭독 때부터 울고 있었어요. 행복 선언의 맥락이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되게 구체적인 나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내 구체성을 억압하고 그것을 드러낼 수 없는 형태로 그 공간에 있다가, 아르쿠스 미사는 그 공간에 제가 갔을 때 저도 몰랐던 나의 어떤 구체적인 시간이 이해받는 느낌이 들어요. 왜냐면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제가 설 수 있는 경험이 되는 거잖아요. 교회가 나를 위해서 더 구체적이게 되는 그런 시간. 여기서는 내가 나로 진짜 초대받았네 라는 생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행복했어요. 나도 사실 언어가 필요하고 찾고 싶은데 교회 안에서 찾지 못했던 어떤 것들이, 교회가 서툴지언정, 부족할지언정 구체적인 사람들을 향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내가 이 교회를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환대를 위해 축제를 열고 그럴 필요 없어요.
환대하는 다양한 방식 상상하기
소금감자 : 앞에서 언어 얘기했지만 언어는 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침묵을 줘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교회는 침묵을 안 해요. 각자가 자기 언어를 찾아가고 자기 신앙의 언어를 찾아갈 틈을 마련해 주지 않는 것 같고, 자꾸 위에서 떠먹여 주려고 해요. 그냥 그 사람이 그 사람 자체로 있을 수 있게 장만 마련해 주면 되는 건데. 환대를 통한 경험에서 느끼는 감정은 되게 큰데, 그 감정이 촉발된 계기는 사실 별거 아니거든요. 아까 아르쿠스 미사 때 제대 위에 무지개 하나 걸어 둔다든지, 신부님들 손목에 무지개 끈을 묶는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저는 사실 환대하면 진짜 좋아하는 글이 있어요.
“사실 진짜 환대는 또한 우리의 하느님과 우리 자신의 방식을 행복의 표준으로 삼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하느님과 그들 자신의 삶을 발견할 기회를 열어 주는 것이다. 환대는 비어 있는 상태를 빈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나, 두려움의 빈자리가 아니라 따뜻한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면 낯선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와 자기들이 자유롭게 창조된 존재임을 발견하고는, 자기 자신의 노래를 자유롭게 부르고 자신의 말을 하고 자신의 춤을 추게 된다. 그리고 자유롭게 그 자리를 떠나 스스로의 소명을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환대란 주인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도록 손님을 초대하는 작업이 아니라 손님이 그 자신의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는 작업이다.”(헨리 나우웬, "발돋움하는 사람들")
초록 : 제가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늘 좀 이해가 안 됐던 게, 애들은 어차피 시끄러운데 왜 자꾸 애들을 조용히 하라고 시키는지 모르겠는 거예요.(일동 웃음) ‘어린이 미사’라는 것 자체가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리인 거잖아요. 그러다가 의정부 에피파니아에서 ‘크라잉 베이비 미사’(우는 아기 미사)를 열었어요. 보통은 어린이 미사를 가도 큰 애들만 밖에 나와 있고 아기들은 또 유아방에 격리돼 있거든요. 그런데 크라잉 베이비 미사에는 유아방에 있는 아기들도 다 나와서 같이 미사를 드리는데, 아기들이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간식이랑 장난감도 미리 준비해 두시고. 어린아이들도 참 환대받아야 될 존재들인데 말이예요.
소금감자 : 제가 유럽 어떤 나라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유럽 교회는 다 옛날 성당이다 보니 유아방이 없어요. 그래서 미사 시간에 유모차를 끌고 부모가 성당 복도를 계속 걸어다녀요. 아기들은 미사 중에 계속 움직이고 뛰어다니는데 다들 엄청 제재하지 않고요. 그런 모습을 미사 중에 처음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윤슬 : 지금 깨달은 건 환대받은 경험 얘기를 나눌 때 그 마음이, 행복감이 전달되는 체험을 지금 하고 있다는 거예요. 숨통 틔워 주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보편적이어야 하는 교회가 남녀노소와 남녀노소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이들까지 다 모여서, 모두가 고르게 존경받고 존중받는 곳이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심지어 한국 교회는 사람들도 청년도 사라지고 있으니까. 그런 역할들을 해 주는 작은 교회들이, 아르쿠스나 에피파니아에서 하는 그런 크라잉 베이비 미사 같은 것들을 마련하려고 하는 교회가 아직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를 환대 주제로 대담을 마련하신 그 마음도. 저는 어쨌든 환대는 계속 그런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보편 교회가 오히려 더 이런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의지하고 맡겨야 되는 부분인 것 같고, 그게 더 판이 커지면 이제 보편 교회까지 뻗어 나갈 수 있겠죠. 성당 가면 스테인드글라스의 무지개가 정말 그 무지개일 수 있는 교회. 그게 우리가 마련한 그 작은 공간에서는 안전하게 되지만 아직 그 넓은 더 넓은 공간에서 안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작업과 장치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보나 : 다들 한 명씩 환대받는 경험 얘기할 때, 엄청 긴장되고 잔뜩 움츠러든 마음이, 구겨져 있던 마음이 확 펴지는 그게 너무 감동적이에요. 자꾸 울컥하게 돼요. 다들 나눠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보나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관심이 많으며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가톨릭 청년들과의 교류의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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