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2년, 한반도 평화를 묻다

가톨릭교회가 만들어 갈 중재의 여정 토론회

2025-07-29     경동현 기자

전쟁은 멈췄지만 평화를 시작하지 못한 지 72년. 가톨릭교회는 이제 그 정전을 끝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27일 의정부교구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열린 세미나와 평화 미사는 그런 선언의 장이었다.

이날 행사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이하 PCK),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공동 주최로 진행됐다. 두 발제자의 발표와 토론에 이어 평화 기원 미사에서 한반도 평화와 가톨릭교회의 소명을 깊이 있게 성찰했다.

27일 팍스크리스티코리아와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세미나와 평화 기원 미사에 함께한 참가자들. 참회와 속죄의 성당 입구 앞에서. ©경동현 기자

김창수 박사, “한반도, 지정학에서 평화 외교로”

첫 번째 발표자로 발언하고 있는 김창수 박사. ©경동현 기자

첫 번째 발제를 맡은 김창수 박사(전 민주평통 사무처장)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전략적 상상력을 강조하며, ‘숙명의 지정학’을 넘어서는 ‘가교 파워’ 전략을 제안했다.

그는 정전 협정 이후 70년 넘게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 세력의 충돌 지대, 즉 강대국의 대리 전장이 되어 온 현실을 지적하며, “이제는 대한민국이 동북아의 갈등 완충 지대가 아니라 문명과 평화를 연결하는 가교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박사는 특히 김정은 체제가 보여 주는 전략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무인기 사건조차 보복하지 않았던 북한의 태도는 남한과의 충돌보다 군사력 강화와 대외 자립에 초점을 둔 전략적 인내의 표현”이라며, “북한은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미국과의 협상을 보류하고, 러시아와의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는 이중 전략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대화 복귀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북미 간에 다시 협상의 장이 열릴 수 있다면, 한국은 과거처럼 ‘중재자’가 아니라 주도적 ‘가교자’가 되어야 한다”며, “남북·북미·한미 가운데 어느 축에서든 상호 신뢰를 쌓고, 문화·경제 교류의 접점을 넓히는 ‘징검다리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2045년까지의 이행안으로 △남북 연합 △비핵화 △북미 수교 △동북아 다자 안보 체제 구축을 제안했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외교·통일 정책에서 초당적 협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성훈 대표 - 2027 세계청년대회를 통한 ‘K-Peace’(한국 평화) 구상

두 번째 발표자로 발언하고 있는 이성훈 팍스크리스티코리아 공동대표. ©경동현 기자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성훈 공동대표(PCK)는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한반도 평화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행사는 하느님이 주신 역사적 은총”이라며, WYD가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국제 평화 공공 외교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사회 사목의 흐름을 되짚고,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정의’ 중심으로 사회 사목을 해 왔으나, ‘평화’에 대한 직접적 담론 형성과 실천은 부족했다”고 짚었다. 그는 “핵무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험이지만, 교회는 이를 공론화하는 데 소극적이었다”며, “회칙 '찬미받으소서'와 '모든 형제들'에 근거한 통합적 생태학과 정의론을 바탕으로 통합적 평화 체계(Integral Peace Paradigm)를 구축하고, 핵무기 반대와 군축, 종교 간 협력, 청년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27 WYD를 계기로 △DMZ 평화 순례 △종교 간 평화기도회 △유엔과 연계한 북한 청년 초청 프로그램 등을 구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아시아 평화 운동의 허브(중심)로 도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성훈 대표는 2025년 희년을 맞아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기기 위한 실천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아시아-태평양을 위한 선언, 80년이면 충분하다”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 선언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을 기념하며, 핵무기 없는 아시아-태평양 실현을 지향하고 팍스 크리스티, 팍스 로마나, 국제가톨릭학생연맹(IYCS), 국제청년훈련센터(IYTC)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이 선언은 주교들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구성원들과 청년 평화운동 단체 회원들에게 핵무기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공동 행동을 촉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서명은 희년 중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1차 서명자 명단은 오는 8월 6일과 9일(핵폭탄 투하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봉헌될 원폭 80주년 추모 미사 중에 봉헌된다 (☞서명 참여하기).

정수용 신부, “평화의 눈으로 다시 읽는 북한”

토론자로 발언하고 있는 정수용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경동현 기자

토론자로 나선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정수용 신부는 북한의 최근 행보를 ‘무시’가 아닌 ‘충돌 회피의 의지’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군의 대북 무인기 도발에도 북한은 응전하지 않았고, 김정은은 공개적으로 남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했다”며, “이는 내부 정치 상황을 고려한 절제이자, 군사 충돌을 피하려는 계산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정된 적대적 인식을 비판하며, “국내 정치에서 북한은 지속적으로 외부의 적으로 설정돼 왔고, 이는 남북 화해의 실질적 장벽이 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정 신부는 발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 미국의 이란 핵 시설 공습, 인도-파키스탄 무력 충돌, 타이-캄보디아 분쟁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북미 대화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은 무엇인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문화·종교 교류의 구체적 가능성과 이행안은 무엇인가? 교회는 이러한 과정에 중재자 혹은 참여자로서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가?

토론하고 있는 발제자와 토론자. (왼쪽부터) 박창호 사회자, 김창수 박사, 정수용 신부, 이성훈 공동대표. ©경동현 기자
세미나 발표를 경청하는 청중. ©경동현 기자

북한의 ‘손을 잡아줄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김창수 박사는 정 신부의 질문에 응답하며, 트럼프와 김정은의 독특한 협상 방식을 되짚었다. “트럼프는 전형적인 외교 관료가 아니며, ‘흥정’의 언어로 움직이는 지도자다. 김정은이 몸값을 키워 가며 시그널(신호)을 보낸다면 트럼프는 즉각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그는 “2026년 북미 간 본격적 샅바 싸움이 벌어질 것이며, 2027년 WYD는 그 가운데서 문화 교류와 중재 외교의 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다. 교회는 북한이 세계로 나오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어야 하며, 평화 관광 지구나 문화 교류, 종교 외교 등을 통해 다리를 놓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성훈 대표는 “WYD는 가톨릭만의 행사가 아니라 세계 청년의 행사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말했고, “유엔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 청년의 참여를 추진한다면, 남북 간의 긴장 완화는 물론 세계 평화 운동의 상징적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기헌 주교, “적개심을 허무는 용서, 평화의 시작”

한반도 평화 미사에서 강론하고 있는 이기헌 주교. ©경동현 기자

이어 열린 정전 협정 기념 미사에서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장)는 강론에서 “정전은 전쟁을 멈춘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이라며, 평화 협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그는 “남과 북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족쇄는 ‘적대감’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신앙 모두를 질식시켜 왔다”고 말했다.

이 주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 방한 당시 명동 대성당에서 강조된 ‘회심과 용서’를 다시 환기하고, “이제는 우리가 형제로서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말미에 “이 민족이 증오와 대결의 어둠을 걷고, 다시 평화의 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쟁을 멈춘 정전은 이제 끝내야 한다. 세미나에서 제안한 평화 이행안은 그저 이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외교이자 신앙의 실천이었다. 특히 2027년 세계청년대회는 청년들의 잔치를 넘어, 구체적 평화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교회는 계속 그 문을 두드려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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