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2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구성원 안충석 신부와의 ‘만남’
지난 2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구성원 안충석 신부(루카, 86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기쁨과 희망> 32호(2023년 겨울,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2회 나누어 싣습니다. - 편집자
착한 사마리안인은 정치인?
오민환(오): 신부님이 사제단 활동에 하신 것에 대한 자긍심이 크십니다. 아마도 앞에서 말씀하신 사제의 초심과 연결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강생, 육화의 영성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의 실천 현장이 신부님의 사제단 활동의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 강력히 저항할 수 있던 사제단의 동력도 그런 것들이 아닐까요.
안충석(안): 칼 폴라니라는 경제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자본주의를 두고 ‘악마의 맷돌’이라는 말을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철저히 개인으로 고립시킨다는 의미에서지요.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라는 체제는 인간이 지닌 사회적 동물로서 공동체적 측면을 여지없이 마치 악마의 맷돌처럼 갈아서 쪼아 버리고 파괴한다는 말이지요. 그 악마의 맷돌을 유신 체제에 많이 느꼈어요. 어떤 공동체든 박살 내는 것이 유신 독재였어요. 요즘 같은 시민 단체는 언감생심이고, 유일하게 젊은 대학생들 공동체만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유신에 조금만 반대해도 가두고 재판해서 다 망가뜨리고 파괴해 버립니다. 그러한 공동체 파괴는 인간성 파괴라 느꼈고, 그런 것을 보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악마의 맷돌’은 결국 한 권력자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말씀인데, 그 상황이 윤석열 정권이 보여 주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제단 활동하는 신부님들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운신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부가 돼서 미사나 할 것이지, 왜 정치를 하냐, 정교분리 어쩌고 하면서 말이지요. 이에 대한 신부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안: 그렇지요. 크게 다르지 않지요. 사제단 탄생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 인민혁명당 사건을 만들어 사형수 8명이 재판을 받자마자 다음 날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어요.(1975년 4월 8일) 나중에 다 조작 사건으로 드러났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히기도 했지요. 자기의 권력을 위해 사람을 악마의 맷돌로 갈아서 참혹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때 장의차에 매달렸던 문정현 신부는 경찰과 실랑이 끝에 떨어져 다리를 다쳐서 지금도 절뚝거리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사제도 인간도 아닙니다. 옆에서 벌어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사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인권이 무너지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이 상황을 사제로서 그대로 볼 수 없었어요.
이러한 상황을 성서의 정신과 신앙으로 풀어야 했어요.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커서 우리 사회 모든 곳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이웃의 생명을 지켜 주라고 당신의 몸과 피를 성체 성사의 음식으로 내어 주셨잖아요. 이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라는 요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치, 경제, 문화 그 어디 안 미치는 곳이 없어요. 애덕을 닦는 일, 그것은 그래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은 다 정치적이에요. 그러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사제단의 활동은 철저히 예수님 복음에 따른 행동이었어요.
우리는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해 처형된 본회퍼 목사의 미친 운전사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내리막길을 달리며 사람을 죽이는 그 미친 운전사를 당장 끌어내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그 운전사를 끌어내려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사제단은 그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오: 바로 말씀하신 그 내용이 사제단이 왜 정치에 참여하는가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활동하신 동력이 되신 것 같습니다.
안: 물론이죠. 성서를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잖아요. 강도 당해 반죽음이 다 된 사람을 보고 사제가 ‘나는 제사를 지내러 간다’라면서 외면해 버리잖아요. 자신은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현실 참여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강도보다 더한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준 이들이 사제단이라는 거죠.
신부를 가두고 매질한 정권에 맞서서
오: 신부님, 그런 영성적 배경으로 사제단 활동을 하셨어도, 현실적으로는 고초도 많이 겪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안: 사제단은 박정희에게 눈엣가시였어요. 1975년 들어서 탄압도 노골적이었죠. 집회를 원천 봉쇄하고 성직자를 순화시키라는 긴급 지시도 내렸다고 해요. 정보과 형사가 동대문 성당 앞에 집을 하나 얻어 놓고 매일같이 나를 감시했어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나를 하도 따라다니길래 “너도 택시비 들고 나도 택시비 드니까 같이 타고 다니자” 하면서, “이다음에 천국에 가면 하느님이 너는 어떻게 해서 천국에 왔느냐 하면, 정보과 형사가 나를 지켜 줘서 내가 나쁜 짓을 못 하게 해서 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랬어요. 정의 구현과 인권 회복은 인간의 기본권을 찾기 위한 행동은 사제단이 생각한 교회 본연의 일이자 실천적 신앙 행위였어요. 사제단이 계속 성명서를 내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성탄 미사 강론 등에서 정부의 탄압을 비난했어요. 결국 1975년 2월 17일에 지 주교님과 양심수들이 석방되었죠. 그런데 그해 4월 9일 인혁당 8명의 비극적 죽음이 발생하였습니다.
오: 지 주교님이 석방되자, 교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나 보네요.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형수들을 돌보지 못했군요. 그분들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혁당 사건 유족을 돕다 추방까지 되셨던 시노트 신부님은 평생 그 여덟 분의 죽음을 생각하셨고, 말년에 그리시던 꽃들은 꼭 여덟 송이였어요. 불의한 죽음,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의 유가족을 우리 교회가 따뜻이 맞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도 그렇고 최근 이태원 참사도 그렇고 말이지요.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원 자체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 아닌가요. 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거의 매년 일어납니다. 75년 인혁당 사건,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등 말이지요. 신부님도 3·1사건에 연루되셨죠.
안: 나는 영문도 모르고 함 신부가 ‘너 삼일절에 미사 주관해라’라고 해서 저녁 6시 명동 성당 미사를 하게 되었죠.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내란 음모 사건으로 몰았어요. 목사님과 신부님 그리고 재야인사들을 구속했어요.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신부가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고, 나는 미사를 주동했다는 죄로 기소되었어요. 동대문 성당으로 들어가는 청계천 7가 근처에서 남자 둘이서 “안충석 신부죠?”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끌고 간 곳이 남산 중앙정보부 6국이었어요. 남산 중앙정보부 6국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 인혁당 사건 관련자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죠. 고문과 구타는 없었지만, 언어 폭력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고, 6일 동안 잠을 안 재우는데 7일째는 정신을 잃었어요. 잠을 안 재우면서 계속 심문하고 내가 살아온 자서전을 쓰라고 했어요. 수사관들은 내가 사상이 불온해서 사제단 활동하는 것이라면서, 큰아버지가 부역했던 것을 들면서 나보고 빨갱이라고까지 했어요. 하도 추궁을 하고 조사를 해 봐야 미사를 한 죄밖에 없으니까, “미사 때 왜 설움이 북받쳐서”라는 노래를 부르냐는 거예요. 성가 가사라고 하니까, “우리가 핍박해서 설움이 북받치더냐”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난센스입니다.
오: 그 사건으로 구속된 신부님 말고도 많은 분이 끌려가셨지요.
안: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나, 김택암, 장덕필, 김승훈 신부 등이 끌려가고 구속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삼일 사건 이후 매년 3월 1일이 되면 명동 성당에서 계속 구국 선언을 이어 갔어요. 명동 성당은 그야말로 민주화의 성지였지요. 지금 명동 성당을 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영화필름처럼 스쳐 갑니다. 명동 성당은 한국 민주화에 있어 상징적인 공간인데,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낯선 곳이 되어 버렸어요. 지난날의 명동 성당을 기억하는 신부님들 중에 명동 근처에는 가지도 않는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통받고 사회적 약자들이 찾아왔던 명동 성당이 이제는 아까 말한 맷돌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사라진 명동 성당의 들머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걸 우리가 덮어 버렸네요.
오: 명동 성당은 세상의 약자들을 돌보면서 거룩한 공간이 되었는데, 이제는 저 역시도 세상과는 동떨어진 섬처럼 느껴집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신부님은 전두환의 5.18 광주학살 당시에도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압니다.
안: 며칠 전 '서울의 봄' 영화를 봤어요. 전두환의 12.12 쿠데타를 그렸잖아요.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광주에서 어마어마한 학살을 자행했고, 언론 통제를 통해 시민들의 의식마저도 통제했어요. 그런데 광주의 김성용 신부가 광주를 탈출해 명동 성당에 와서 광주 항쟁의 진실을 털어놨어요. 그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를 듣던 사람은 사무국장이던 장익 신부, 나, 함세웅 신부 등 신부 7명이 있었어요. 너무나 참혹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어요. 언론이 통제된 상황이라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각자 본당에 가서 공지 사항으로 사실을 알리고, 강론으로도 얘기하자고 했어요. 독일에서 유학했던 광주의 장용주 신부가 독일에서 방영된 광주 학살의 참상을 담은 비디오 가져왔어요. 그 비디오를 복사해서 각자 본당에서 틀어 주었어요. 나는 이문동 성당에서, 양홍 신부는 장위동 성당에서, 그리고 함세웅 신부 등이 주일미사 때 계속 광주 항쟁 비디오를 틀어 주니까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12.12로 집권한 신군부가 광주 비디오와 관련한 신부들을 서빙고로 끌고 갔어요. 나는 외출 나갔다가 들어가려는데, 신자들이 서빙고 보안사 요원이 이문동 성당을 에워싸고 ‘신부님을 잡아가려 한다’라고 일러주었어요. 그 소리를 듣고 중곡동에 있는 메리놀 본부로 피난 갔어요. 거기서 3일간 숨어 있었는데, 외출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내가 잡혀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숨어 있기만 한 것도 그렇고, 계속 안 잡혀 들어가는 것도 이상해서, 명동 성당 주교관으로 몰래 들어가서 나를 잡으러 다니던 정보과 형사,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전화해서 ‘나 여기 있다. 나 잡아가라’라고 연락했어요. 그래서 그 악명 높은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어요.
서빙고는 남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중정 6국에서는 물리적 고문이나 신체 고문은 하지 않았는데, 서빙고 분실은 들어가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훈련병으로 취급하면서 군화발로 때리고 막 짓밟았어요. 그렇게 맞아서 고막이 터져 나중에 수술을 받은 신부도 있어요. 수사관들은 ‘왜 신문, 라디오 방송에서 발표하는 정부 말을 믿지 않고 그런 짓을 벌이느냐’라고 하길래, ‘신부가 (김성용) 신부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 말을 믿냐’라고 했더니, ‘이 새끼가’ 하면서 때리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신부님, 우리가 다 정권 잡게 되었는데 신부 몇 놈들이 이거 아니라고 광주 항쟁 이런 거라고 진상을 알리면 우리가 정권을 못 잡잖아요.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아세요. 이세호 장군, 김종필 그 양반, 또 김재규 이런 사람들이 다 들렀던 방입니다. 여기 들어오면 신부님은 살아서 못나갈 수도 있어요”라고 협박하면서 심문하기도 했지요.
또 한 나이 많은 심문관은 자기가 노기남 대주교 관련한 사건을 다뤄 봤다면서, “신부님, 천주교가 뭐 이런 데 나설 만한 정의가 있느냐? 내가 노기남 미수 사건도 조사했는데 천주교도 엉망이면서 뭘 그러느냐”라고 회유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놈이 나랑 중동고등학교 동문이었어요. “신부님 보니까 아무것도 한 것 없네. 내가 때리는 척하면 아픈 척 소리만 지르라”라면서 봐주는 거예요. 그래서 잡혀간 신부 중에 내가 제일 안 맞은 편이었죠. 다른 신부들은 엄청나게 맞았어요. 그때가 7월경이었는데, 창 너머로 삼종 소리가 들려왔어요. 삼종 소리를 들으면서 ‘나 이거, 여기서 죽으면 순교가 아니고 뭔가’ 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사는 것은 고사하고 개죽음만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그때만큼 열심히 기도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한 열흘쯤 지나서 풀려났는데, 고문받고 난 뒤 이가 다 빠져서 이가 몇 개 남지 않았어요. 틀니를 했어요.
오: 저도 '서울의 봄' 영화를 봤는데, 신부님 말씀과 그 영화가 자꾸 겹쳐 보입니다. 고문 폭력은 정말 인간의 영혼마저도 죽이는 것 같습니다. 고문은 그 어떤 형태로도 자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 아래서는 너무나 쉽게 이뤄졌어요.
안: 그래요. 고문을 당하면 정신적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고문을 받다 보면, 내가 비록 정의롭고 올바른 일이라 생각해서, 광주 항쟁의 진실을 알린다고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게 아닌가? 떨어진 시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정말 사제로서 이렇게 희생당하는 게 뭔가? 이런 정신적 고통이 심하게 다가옵니다. 서빙고에 같이 갔던 동창 양혼 신부는, 자기가 있던 방은 벽이 전부 핏빛이라 두려웠고, ‘엘리베이터 탄다’라는 게 있는데, 그건 엘리베이터에 태워 떨어뜨리면 불구가 되는 것이랍니다. 우리 신부들은 그런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고문도 무섭고 감방 자체가 지하라 더 두려웠습니다. 옆방에서 들리는 때리는 소리, 우는 소리, 비명은 그 정신적 고통을 배가하죠. 광주 비디오 녹화 때문에 끌려온 정마리안나(정양숙, AFI)의 고문당하는 소리, 고통에 젖은 울음소리는 마음을 찢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었습니다. 이 광주 항쟁 비디오 사건은 전두환 정권 탄생을 앞두고 사제단 주역을 검거해서 겁주려고 더 강하게 나갔던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라!
오: 신부님께서는 박정희, 전두환 두 군부 독재 정권 아래서 ‘가만히’ 있지 않으셨습니다. 시대의 징표에 따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이 살아가셨던 삶을 쫓아가려 했던 행보로 보입니다. 성당 문을 닫아걸고 개인의 구원만을 위한 영적 도피를 거부하시고, 세상으로 길 위로 나가셨네요. 그러고 보면 신부님께서 신학생으로 공부하실 때, 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렸고 이후 세계는 신학적으로 해방신학과 같은 진보적 사조가 나타났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민중신학도 그렇고요. 신부님의 실천적 사제 영성에 있어 바티칸공의회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보는데요.
안: 그렇지요. 답답했던 교회의 창문을 열었던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즘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도 그렇고 아무리 좋은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사제가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서 탈출기의 해방 여정이 시노달리타스 아닙니까. 그 해방의 여정에 모세는 끝까지 하느님 백성과 함께했어요. 사제단의 활동도 하느님 백성과 함께 해방의 여정에 나서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배운 것만으로는 세상의 문제와 가지고 하느님 백성과 함께할 수 없었어요. 주일 미사 강론도 사실 많이 묵상하고 공부해야 해요. 나는 보좌 신부 시절부터 신문 칼럼이나 좋은 글을 보면 모으는 습관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 습관은 여전합니다. 다 남들과 나누기 위함입니다.
오: 신부님을 뵐 때면 늘 책을 옆에 두시고 열심히 모아 두시고 손글씨로 정리하십니다.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은 작업을 하시는데, 아주 오랜 학습 습관이신 것 같습니다.
안: 저희가 사제단 활동하면서 그저 현장으로 뛰어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미사를 하기 전에 공부했어요. 공의회 문헌이나 해방신학 이런 것을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우리 활동의 이론적 바탕을 만들어 보았지요. 활동하면서도 공부를 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시국기도회를 하면서 강론을 하고 교우들을 설득하기 위한 콘텐츠가 필요한 데, 그것은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묵상한 내용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70-80년대에 가톨릭 신자가 부쩍 늘었는데, 특히 세상의 문제에 갈증이 있던 지식인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죠. 민주화 운동 유가족이나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사람들이 우리 사제단에 많이 찾아왔어요. 어찌 보면 유일하게 호소할 곳이 당시에는 우리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것이 사실 선교, 복음화 아닐까요. 그 시대가 우리 가톨릭교회의 위상이 가장 높았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은 게다가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신자 수가 급감하고 있지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사제단의 동력도 예전만 못한 것 같고.... 사제단 창립 25주년이 되던 해에 유다인 신학자 마크 엘리스가 와서 강연하면서, 교회의 성직자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가 되면서, 성전의 장사꾼이 되었다고 말했어요. 민주화를 위해 사제단이 이루어 놓은 일, 그 열매는 누가 따 먹었는가. 여러분은 중개자가 난무하는 교회를 떠날 수 있는가 등 도전적인 물음을 던지기도 했지요.
충격적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사제단,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서 반대받는 표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봉헌하러 성전에 가셨을 때, 예언자 시메온은 예수님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래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어머니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고 했지요. 사제의 삶은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감방에 가며 정부에 저항하냐거 했을 때, 신현봉 신부님은 “신부가 그런 일을 안 하려면, 뭐하러 사제가 돼?”라고 반문하셨어요. 사제는 반대 받는 표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시며 확실히 다짐을 받으시고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어요. 사제직은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며 인간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이라, 적당히 슬쩍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사제는 은퇴가 없다! 성가정 생활 캠프를 시작하다
오: ‘반대받는 표적’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신부님이 쓰신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신부님께서는 독서광이시기도 하지만, 책도 여러 권 쓰셨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은퇴 후 사목에도 열정을 쏟고 계십니다.
안: 젊었을 때,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을 자주 갔었어요. 개신교 목사님 설교집은 많은데, 신부들 강론집은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강론을 모아 첫 번째 책 "사랑의 외침"과 "반대받는 표적"을 냈고, 은퇴 이후에는 본당에서 교리를 가르치면서 모아 놓은 자료를 정리해서 "그리스도인 신앙생활", 그리고 나의 삶과 영적 묵상을 담은 "정의와 사랑", 2014년 광화문 광장의 시복식을 보고 감동해서 "한국 순교자의 영성" 등 일곱 권을 냈어요. 앞으로도 대략 세 권 정도 낼 예정입니다. 내 사목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살아 나가고, 그 나라를 진행시켜 완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살아 내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하늘나라에 갈 수 없고 완성할 수도 없습니다. 백정 출신 황일광 복자 말대로,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 살아나아가기 운동을 위해 '성가정 생활 캠프'(www.holyfamilycamp.com)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신앙의 혼돈을 겪는 분들을 많이 봤어요. 이 홈페이지를 열면 나오는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볼게요.
“최후 만찬에서 첫 미사를 올리시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을 기억하고 행하라는 절대 사랑의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우리에게 주님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라’시면서 우리를 파견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 우리 신앙생활의 정체성, 즉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사랑의 계명 실천의 의미가 상실된 오늘날, 온라인으로 우리의 신앙을 연결하기 위해 성가정 생활 캠프(HFC)를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가정 생활 캠프 가족 신청을 하시어, 예수님-마리아-요셉이 이룬 성가정의 가족애를 본받아 신앙의 활력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이제 나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고 내 몸처럼 사랑하신 사랑의 절대 명령을 따르기 위해 주위의 이웃과 친지분들께 권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하여 성가정 생활 캠프의 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사랑의 절대 명령을 따르는 데 앞장서 주셨으면 합니다. 한 가족으로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여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성가정 생활 캠프’ 이야기를 더 하면, ‘영성 강의’와 ‘오늘의 묵상’의 묵상을 통해 교우들과 함께 시노달리타스, 함께하는 만남의 여정을 가면서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40여 년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공동체를 꾸려, 파스카 신앙을 지키듯, 그렇게 온라인 공간에서 '성가정 생활 캠프'를 시작한 것입니다. 많은 교우가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함께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살아 나가기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홈페이지 주소를 치고 바로 접속할 수 있고, 또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창에 ‘성가정 생활 캠프’라 치면 바로 연결됩니다.
오: 신부님께서는 성가정 생활 캠프에 사제로서 마지막 열정을 쏟으시는 것 같습니다. 후배 사제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많이 나눴는데, 마지막으로 후배 사제들에게 한말씀 해 주신다면요.
안: 우리 후배 사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항상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도전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흔히 사제(sacerdos)를 ‘알테르 크리스투스’(alter christus), 또 다른 그리스도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이 완전함으로 향하는 길이 사제직의 도전이며 완성입니다. 그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먼저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으로 사는 삶도 올바르지 않으면서 사제직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오: 신부님 말씀은 사제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인간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사제직 수행의 첫걸음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곧 신망애 삼덕을 닦는 일이고요. 이런 비유는 어떤지 몰라도, 얼마 전 '서울의 봄' 영화에서 전두환은 "너는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대로 사제에게도 적용되는 말인가요.
안: 그래요. 신부가 그에 해당하는 말을 들으면 덕행을 닦는 사제가 아니지요. 완전한 덕행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사제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아요.
오: 제2의 그리스도, 사제직의 완성, 완덕을 향한 도전. 특히 ‘도전’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인데요. 사제직을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안: 그래요. 도전해야 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죠. 예수님과 같은 사제는 은퇴가 없어요.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처럼 사제들에게서는 양 떼 냄새가 나야 해요. 그런데 요즘 본당 신부들은 공무원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어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 입은 이웃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매만지고 치료해 주는 것이 왜 정치적이죠. 왜 애덕 실천을 정치적이라 하지요. 오늘 만나면서 하고 싶은 말은 사제는 하느님 사랑에 있어서나 인간 사랑에 있어서나 실패하기에 십상이라는 거예요. 마누라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사랑의 대상자가 없어요. 그래서 사랑이 추상적일 수 있고 사랑의 실패자가 되기 쉬워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기름을 들고 깨어 있는 슬기로운 열 처녀같이 되어야 합니다. 즉 늘 깨어 있어야 해요. 사실 이러한 내용을 매주 강론 쓰듯 정리해서 홈페이지에 올려 놓고 있어요.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거지요. 아무튼 55년을 사제로 산 선배로서, ‘먼저 인간이 되지 않으면 사제로서도 완성될 수 없다’라는 말을 해 주고 싶고, 평생을 신부로 살았으면 사제 냄새가 나야 하고, 앙떼 냄새가 나아야 하는 거죠. 미사 끝에 우리는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고 말하죠. 미사가 끝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일상에서 예수님처럼 살라는 말이지요. 성체 성사는 예수님처럼 나의 몸과 피를 내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사제직에 도전하는 삶입니다.
오: 마지막으로 올해 시국기도회 다니시면서 느끼신 소회가 있다면요.
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제로서 도전 의식을 갖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묵상도 열심히 해서 풍요로운 사제단의 시국기도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 신부님, 오늘 즐겁고 행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이 쓰신 책 "정의와 사랑"에 인용한 글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어느 평화운동가가 외로이 백악관 앞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자, 기자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뀔 거로 생각하냐고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려고 이 일을 하는 겁니다.”
안충석 신부 약력
1939년 11월 28일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출생
1958년 중동고 졸업
1967년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사제 수품
1967-1972년 천주교 용산・종로 성당 보좌신부
1972-2010년 천주교 동대문・이문동・금호동・아현동・사당동・고척동・일원동본 성당 주임신부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설 활동
1976년 명동 3.1 사건으로 불구속 입건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하여 서빙고에 8일간 수감
1994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준) 공동위원장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상임대표
- 장준하특별법제정 시민행동 공동 상임대표
- 안중근평화연구원 원장
- 천주교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등 역임
2025년 7월 27일 선종
오민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전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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