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강 너머 - 부조리한 구조의 탈북민들

2025-07-22     이동근

이 글은 <가톨릭평론> 48호(2025년 여름, 우리신학연구소)에 실린 글입니다.

부조리한 구조의 난민들

“아버지와 여동생이 북한에서 탈출하다가 이 강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 7년이 지났다고 한다. 예린은 술 한 잔을 강에 뿌리고는 낮게 ‘아버지’ 하고 울먹였다. 강 건너 초소에 북한군이 서성이고 있 어, 크게 소리 내어 울지는 못했지만, 예린의 두 눈에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만주 벌판에서 낮게 불어오는 바람이 채 녹지 않은 눈을 흩날리며 두만강의 풍경을 더욱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두만강, 중국 도문, 2015. ©이동근

북한을 탈출한 예린과 함께 몇 년 전 늦가을 북한의 접경 지역인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인근의 두만강을 방문했을 때 모습이다.

예린은 북한을 탈출한 후 5년 정도를 중국에서 떠돌다 20여 년 전쯤 한국으로 왔다. 북한에서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중국에서 삶은 힘들었고,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한국에 오게 되었다. 희망을 품고 온 새로운 땅이었지만 사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 여러 일을 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고, 지금은 아리랑 예술단의 단원으로 살고 있다. 아리랑 예술단은 탈북민들로 구성된 공연 단체다. 살기가 힘들어 북한을 탈출했지만,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다시 북한의 노래와 춤을 춰야 한다.

주로 지방의 축제 무대나 통일 관련 행사에 초청을 받아 공연한다. 행사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상연 목록과 가수, 무용수, 공연 시간 등 전체의 공연 계획이 결정되고 예행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오른다. 가수들은 특유의 억양으로 북한 노래를 부르고 전문 무용수들은 북한의 춤을 추며, 이따금 한국 가요를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관객들에게 북한에 대한 향수와 호기심을 충족해 주고, 통일에 대한 낭만적 감정을 만든다.

단원의 구성은 절반 정도가 북한의 소년궁전이나 예술선전대에서 전문적인 활동과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단원들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일정과 조건이 맞으면 전국 어디든지 공연하러 가는데 봄, 가을에는 멀리 지방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공연에 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관객들의 태도다. 행사의 내용에 따라 관객들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통일에 관련된 행사보다도 시골의 작은 축제에서 반응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 곳일수록 연민과 호기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관객들과의 친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무대를 내려서면 현실의 삶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험이 없기에 경제 활동도 어렵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다. 더러 성공한 탈북민들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생활이 힘들어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드물게는 한국에서 삶에 실패한 탈북민이 북한으로 재입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통일에 대한 기대감 역시 두꺼운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몇 년 전에는 남·북의 정상이 함께 백두산을 오르며, 분단 70년 만에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 통일에 대한 논의는 더는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는 통일에 대한 의지는 전혀 없는 듯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발을 자행하고 국지전을 유도한 사실마저 탄핵 정국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북한은 자주권을 내세우며 핵을 준비하고, 미국은 북한의 의지를 꺾기 위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주변의 강대국들 역시 자국의 이익과 실리를 챙기기 위해 분주하다. 정치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족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 한반도임을 알 수 있다. 언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부조리한 구조에서 발생한 난민들이다.

철마 한우축제, 부산, 2015. ©이동근

희망과 슬픔이 어우러진 강

1990년대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북한의 기근과 폭정으로 북한에서 탈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의 숫자는 약 3만 3000명을 넘었다. 그들 중에서 북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대략 100여 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대다수 탈북민이 넘어오는 곳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압록강 상류 지역과 두만강 유역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두만강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양강도에서는 압록강으로 함경도에서는 두만강을 건너 탈출하게 된다. 1990년 중반부터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굶주림에 지친 많은 사람이 강을 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이유로 본격적인 북한 이탈 주민들이 생겨나는 데, 강을 넘는 데는 많은 대가가 필요했다. 더러 강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었고, 강을 넘더라도 인신매매와 같은 폭력에 노출되었다. 강을 무사히 넘더라도 중국 내에서 공안에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두만강은 탈북민에게 희망의 강이자 슬픔의 강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예린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한국에 오게 된 경위를 물었다.

"제가 북한 나오게 된 계기는, 어머니가
92년도 그때부터 어머니가
다발성 신경근 신경염이란 병으로 손도 하나도 못 움직이고
그냥 누워만 계셨어요.
아프다 보니까 제가 가장 아닌 가장이 되었었고
병간호를 하다 보니까
97년도에 1997년도에 누가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중국에 가면 돈을 어느 정도 버는데,
엄마 약값도 벌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그 말만 믿고, 3개월만 내가 고생하고 오자
중국 오면 식당에서 일을 하든, 산에 가서 벌목을
하는 그런 게 많았어요.
그때 당시에 그래서 한 3개월만 일하면
엄마 약값도 벌 수 있고 좀 괜찮아지겠다 싶어서 무작정 따라나섰는데
그게 인신매매의 길이었어요.
중국 두만강을 건너서 오니까 하얼빈이라는 곳에
몸무게 한 130킬로그램 되는 남자한테 저를 단돈
그때 당시 중국 돈으로 8000원이었는데 한국 돈으로 100만 원
거기에 팔아서
100만 원에 저를 팔아가지고 들어갔더니 말도 모르겠고
농사만 짓는 완전 시골
거기 가서 이제 이 사람이 네 남자 되는 사람이다
남편 될 사람이라고 하는데 쳐다보면서 엄청 많이 울었어요.
아, 내가 이렇게 살려고 여기 온 거 아닌데, 이런 사람 만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그러고 후회도 많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거기서 2년 6개월이란 생활을, 진짜 살면서
지금 제가 나이는 많이 안 먹었는데
2년 6개월 삶을 살면서 제일 힘들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제 거기서 아기를 낳게 됐고
지금 이쁜 딸 한국까지 와서 살고 있는데, 딸애를 낳게 돼서
2년 6개월 삶 속에서 우리 딸이 축복이었고
거기에서 1년 365일 동안 안 맞은 날이 거의 없었어요.
술 중독이 온 분한테 팔려 가다 보니까
2년 6개월 되는 때에는 내가 도저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나의 길을 찾아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겨울에 눈이 이만큼 허리까지 왔어요.
길도 못 찾고 논두렁을 도망쳐서 온 것이 청도였어요.
청도까지 길에서 귀인을 만나서 청도까지 왔고
청도에서 한국분들을 많이 접하게 되다 보니까
아, 내가 한국에 가야지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싶어서
한국 가는 길을 많이 모색했었어요.
했는데 한번은 모색을 하고 출발했는데
그 베트남 국경에서
거의 국경 넘다가 잡힌 상황이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됐고
근데 또 그 감옥살이, 도문 변방까지 가서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그 안에서 또 귀인을 만났어요.
해서 3개월만 감옥살이 하고 나왔죠, 거기서
그러다가 한 달 만에 다시 제가 잡힌 길을 통해서 베트남을 거쳐서
캄보디아 거쳐서 태국 거쳐서
우리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었고
지금은 한국 사회생활 이제 만 15년째에요.
어머니는 2006년도에 뇌출혈로
혈관이 안으로 터져 돌아가셨고
한국에서 돌아가셨다는 걸 들었고
우리 둘째 같은 경우는
제가 한국에 데려오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탄광에 들어갔다가
굴이 무너져서 시집도 못 가 보고 죽었다는 소식 들었고
그리고 아빠하고 막냇동생은
제가 한국 모셔 오려고
사람 보내고 탈출하는 도중에 길에서 지금 행방불명되셔서 아직도
소식은 모르고 있어요.
좀 살아 계셨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 보면
제가 그래서 전화번호도 안 바꾸고 있거든요.
언젠가는 내 전화번호 아니까 오지 않을까
근데 이제는
돌아가신 거 같아요."

얼마 전 예린에게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빛바랜 평양 개선문 사진을 배경으로 부모님과 동생들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북한을 탈출한 뒤에 찍은 사진이라 예린의 모습은 없다. 그 사진 속에 자신의 모 습을 넣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진 속에서라도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동근

사진 작가. 여러 구조적 요인에 의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탈북인, 비전향 장기수, 결혼 이주민 등 경계인들과 접경 지역의 사회문화적 풍경 등 경계에 관한 작업을 오랫동안 진행했다. 요즘은 일제강점기 시절 남은 적산과 적산의 흔적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찾아가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