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동맹 운동가 장용석의 해방 일지

2025-07-15     이규수

장용석이 남긴 편지 22통

조선건국동맹에 몸담았던 청년 장용석(張龍錫)이 일본에 거주하던 김석범(金石範)에게 보낸 22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김석범이 장용석과 만난 것은 19살 때였다. 1945년 봄, 김석범은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결심하고 징병 검사를 구실로 제주에서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서는 조선건국동맹 간부 이석구(李錫玖)의 도움을 받아 선학원(禪學院)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한 청년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편지의 주인공인 장용석이다.

두 사람은 밤새워 조선의 독립을 둘러싼 논의를 하며 평생 동지가 되었다. 조선건국동맹의 울타리에서 두 사람의 삶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장용석의 편지는 1947년 3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이어졌다. 장용석은 평양 출신으로 김석범과 같은 나이였다. 편지에는 해방 후 혼돈 상황에 대한 절제된 묘사와 더불어,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둘러싼 의식과 분단 상황에 대한 애절한 대화가 담겨 있다.

장용석의 편지는 1949년 5월 4일 이후 더는 지속되지 않았다. 이후 장용석의 행적은 불명이지만, 김석범에 따르면 극우 세력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편지에는 해방 정국을 고민하면서 살아온 청년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두 사람이 나눈 애달픈 감정은 당시 상황에 대한 절망에 그치지 않고, 두 사람이 또 우리가 넘어야 할 절망에 대한 역사적인 기억일 것이다.

'제1신' 1947년 3월 3일. ©강덕상자료센터
'제1신' 1947년 3월 3일.©강덕상자료센터

활동가의 삶과 의식

편지 내용을 통해 선학원(조선건국동맹의 비밀 아지트)에서 생활했던 인물들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직 상층부 인물로는 이석구(李錫玖)와 정백(鄭栢)이 등장한다. 편지에는 ‘석구 선생님’ 또는 ‘이 선생님’, ‘정 선생님’으로 표현하면서 근황과 안부를 전하고 있다.

이석구는 운동의 지도자이자 활동가로 가족 간의 갈등과 고뇌 속에서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 본보기였다. 장용석은 조직 활동과 동생들의 희생을 둘러싼 고민을 해결했다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李先生님을 보아라. 28年間이라는 것을 家族을 버리고 國內外에서 祖國을 위하여 싸우시지 안었니! 勿論 내가 어머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不足하여 그런 것은 안이다. 그리고 내가 犧牲하고 동생 두 아이를 工夫시키느냐? 그렇지 않으면 同生 두 애를 犧牲시키고 내가 發展하느냐? 이 문제에 對해서도 나는 良心的으로 마니 苦悶했다. 참으로 마니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解決되었다. 모든 것은 새 出發이다. 나를 위하여 當分間 어버이도 同生들도 집 사정도 모다 잊어버리련다."(<제9신>, 1948년 3월 27일)

(위의 한자 순서대로 이선생, 년간, 가족, 국내외, 조국, 물론, 부족, 희생, 공부, 동생, 희생, 발전, 대, 양심적, 고민, 해결, 출발, 당분간, 동생)

장용석은 동지에 대한 존경심을 수시로 전했다. “내 마음이 괴롭고 외로울 때에 생각나는 동무들! 그들은 언제나 나에게 고마웠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그들이 괴롭고 외로울 때에 생각나는 동무가 되어 있을까? 퍽 의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앞으로 이런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제4신>, 1947년 12월 15일)고 말하는 등, 끈끈한 동지애와 배려심이 엿보인다.

장용석은 편지 곳곳에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다짐대로 ‘바른길, 바르게 사는 길’이었다. 장용석과 김석범, 두 사람은 같은 인식을 공유했다. 통일이라는 “바른길을 찾아서 바르고 맑게 살자”는 다짐이었다. 장용석은 “兄이 언제쯤 祖國에 돌아오시겠는지 무척 보고 싶습니다. ...싸우자! 우리는 싸움에서 많이 勝利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 퍽 반갑게 생각했소. 아마도 나는 兄의 心中에 一大變化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兄! 배움도, 나는 싸움에서 배움과 冊床 위에서 배움과는 千里之差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實踐에서 이를 깨달은 것입니다”(<제1신>, 1947년 3월 3일)라고 반복해서 토로했다. 이들은 스스로가 실천적 청년이기를 바랐다.

(한자 순서대로 형, 조국, 승리, 형, 심중, 일대변화, 형, 책상, 천리지차, 실천)

해방 정국을 살아온 청년들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았다. 신국가 건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국제 정세의 변동을 탐지하기 위한 외국의 정보 취득에 민감했고, 많은 독서를 통해 투쟁을 향한 자신의 정체성과 사고를 확립해 나갔다. 분단이 고정되어 가는 엄혹한 환경과 난관을 극복하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실천을 통한 운동의 승리,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청년들은 온몸으로 실천을 통해 현실과 마주했다.

해방과 분단의 상처

해방 정국은 소용돌이의 연속이었다. 해방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분단 체제가 고착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미래가 불투명했고, 절망과 좌절 상황이 이어졌다. 희생된 동지도 생겨났다. 그들은 조선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했을까. 어떤 길을 택했을까. 고뇌의 연속이었다. 장용석은 일본으로의 밀항도 생각하고, 죽음을 예견하면서 조선을 벗어나 문학도로서의 길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의 현실은 그의 다른 선택을 용납하지 않았다. 장용석은 처절한 자성 위에서 새로운 길, 민족을 향한 여정에 나섰다.

장용석은 해방 이후 2년 사이 조선의 현실을 마주한 심정을 솔직히 전한다. “나와 네가 사랑하는 모든 동무들은 모두 退步했다. 前進을 爲한 退步가 아니라 아주 일어날 수 없이 退步해 버렸다. 解放後 滿二年余!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생각해 볼 때에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우리는 좀 더 높이 發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자꾸만 退步하고 있다”(<제3신>, 1947년 11월 20일)고 토로했다. 조선의 현실은 ‘부끄러움’이었다. 조선의 분열에 대한 심정도 전했다. “現實을 見라. 祖國의 現實을. 統一이냐? 分裂이냐? 이때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여야만 할까!”(<제9신>, 1948년 3월 27일)라며 통일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의 조선 상황을 알렸다.

(한자 순서대로 퇴보, 전진, 위, 퇴보, 퇴보, 해방후 만이년여, 발전, 퇴보, 현실, 견, 조국, 현실, 통일, 분열)

해방 후의 상황은 장용석의 결단을 촉구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장용석의 심정을 잘 드러낸 것은 그가 쓴 자작시다. 장용석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청년이었다. 투쟁 속에서 문학과 시를 사유했다. 그는 김석범에게 몇몇 시를 소개하면서 조선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전달했는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내적 동력을 기르기 위해 시의 힘을 빌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뱃 바닥에 태극기 펴놓고
두 손 저어 소리쳐도
물벼락을 퍼부었다니......

나면서부터 바다와 벗하여
미역 뜻고 고기 잡아
어질게 사라온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더냐!

열네명 생목숨이
죄없이 죽어도
말 한마디 못하는 겨레여!

세르비아의 젊은이의 총 한방이
온 세계의 싸움의 실마리가 되었다면
우리의 목숨은 이렇게 값없는 것인가?

나라가 두 토막에 갈리이고
거친 말굽 아래 집밟혀도
우리 모두 벙어리로 사라야 되느냐?

아아! 이 나라가 왜 이리 숨죽었느냐?
이 나라에도 사람 하나 없느냐
사람같은 사람 하나도 없느냐"

14명의 죽음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편지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1948년 6월 미군의 독도 폭격으로 일어난 사건인 것 같다. “나라가 두 토막에 갈리이고, 거친 말굽 아래 집밟혀도, 우리 모두 벙어리로 사라야 되느냐?”는 외침은 당시의 긴박한 정황을 잘 말해 준다. 그것은 ‘슬픈 노래’였다. 그러나 장용석은 좌절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벙어리’로 살지 않고 ‘사람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출발했다. 그 바탕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았다.

해방과 분단은 청년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장용석은 분단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쳤다. 때로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아픔을 맛보았다. 동지들의 체포와 죽음도 목격했다. 전향한 동지들의 씁쓸한 모습도 보았다. 그러나 장용석은 굴하지 않았다. 장용석은 “죽엄이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는 눈감고 죽을 때가 아니기 때문에, 또 죽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좀더 사라야 하겠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죽구 십지는 않다. 아이고 죽겠다. 조끔만 괴로우면 아니 괴롭지 않어도 우리 겨레는 항상 죽겠다는 말을 잘한다. 내 自身도……”(<제17신>, 1948년 7월 18일)라며 투쟁에 헌신했다. 그는 진정한 현장의 영웅이었다.

좌절을 넘어 희망으로

장용석은 22통의 편지를 남기고 해방 정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선학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의 일원으로 김석범을 만나 독립의 방안을 고민하고, 해방 후에는 편지로 동지의 인연을 이어 갔다. 당국의 검열 때문에 편지에는 절제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두 사람은 전하려는 내용을 바로 알아차렸다. 단독 선거 이후의 정황은 급변했다. 일본 밀항의 의향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분단의 현실을 목도하고 떠날 수 없었다. 병을 앓으면서도 현실에 대응해야만 했다.

장용석의 편지에는 죽음이 예견된다. 폐병을 앓으면서도 혁명의 의지를 불태웠다. “肺病이냐! 肺病! 내 몸은 왜 이리 弱할까? 그러나 克服할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斷然 이겨야지! 나는 ○○할 때까지 살어야 한다. 지금 나를 어데가서 靜養하라고 한다. 지금이 어떤 때라고? 안가겠다고 했는데도 작구만 가라고 하니 큰일이 아니인가! 나는 참으로 가기 싫어! ○○할 때 까지는!”(<제12신>, 1948년 5월 20일)이라고 결심했다. ○○은 혁명이었다.

(한자 순서대로 폐병, 폐병, 약, 극복, 단연, 정양)

문학도로서의 장용석은 조선 말과 글에 관심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이 민족 교육을 사수하려던 한신교육투쟁과 관련해 1948년 4월 16일에 “조선 말과 글을 지킬 사람은 오직 조선 민족뿐이다”와 ‘조선어’라는 글을 김석범에게 보냈다.(<제10신>, 1948년 4월 16일) 이 글에는 장용석의 생각과 현실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전문을 인용한다.

"나는 확실히 보고 들었다. 일본에서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겨레만이 가지고 있는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또 우리 민족의 제2세의 교육 기관에 폐쇄령이 내렸다는 것을! 이 얼마나 원통한 보도이었더냐. 피로써 지키자! 우리의 말과 글을!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8월 15일 그날! 우리들의 그 환희와 감격은 어떠했던가? 그런 력사적인 이른바 해방은 불행하게도 엉뚱스러운 곳으로 역행하여 민생은 유사 이래의 참담한 구렁에 빠져 민족은 최대의 위기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비운으로는 너무도 비운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해방이 있다면 오직 말과 글의 해방이 있을 뿐인 헐벗은 우리들이다. 불쌍하다면 지나치도록 불행한 우리 민족이다.

놈들에게 짓밟혔던 더러운 발자국, 아직도 씻기지 않고 놈들의 독아(毒牙)에 악물렸던 피자욱, 아직도 싱싱하게 남아 가슴 앞은 이때에 또다시 그들의 침략의 마수가 뻗친다! 아!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이 얼마나 민족의 모욕이며 문화의 압박이며, 력사의 반동이냐? 언어와 민족! 민족과 언어, 여기에 대해서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자세히 더 쓰지 않을련다.

우리는 싸우자! 그리고 쳐부수자! 민족의 생명이요, 피요, 혼인 우리의 말과 우리의 한글을 지키기 위하여! 말과 글을 빼앗기는 날에는 민족도 문화도 국가도 없다. 우리는 재일 동포들의 투쟁을 후원 격려함은 물론 일본 정부에 민족의 이름으로 엄중 항의할 것이다. 나아가 세계 문화인들에게도 여론을 일으켜야 한다.

조선말과 조선글을 지킬 사람은 오직 조선 민족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뻐하라. 우리가 원하고 바라던 《조선말 큰 사전》이 륙권으로 나오게 되어 이미 첫권은 나왔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장만하지 못했다. 한 권에 1,200원. 6권이면 8천여 돈. 서점가면 진열된 사전을 가만히 가서 만져보곤 한다! 한 권에 1,200원 6권이면 8천여 원! 농민이면 두 가마니를 팔아야 살 수 있는 값이다.

좀 싸게는 못 되는 일인가! 벼 한가마니 쯤 팔아서 살 수 있도록 못 할까? 반가운 마음과 못 사서 안타까운 마음 그 도가 정비례한다. 국가가 간행해서 헐가로 보급시키기 전에는 어렵겠지?

이도 역시 자주독립이라야 인민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부이라야만 가능한 것인가 한다. 이와 동시에 옥사하신 항산(恒山) 리윤재(李允宰) 선생의 유저 《표준 조선말 사전》도 나왔다.

이제는 우리의 글을, 우리의 한글을 세계에 소개할 수 있다. 백림 대학 언어학과 학생들에게도 보낼 수 있다. 리극로(李克魯) 선생이 백림 대학에 계실 때에 조선어 사전은 없느냐 하는 물음에 대답하시기를……. 얼마나 어려우셨겠나 생각해 보라. 사전 하나 지니지 못했을 우리의 겨레! 아! 불쌍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힘차게 세워 나가자. 우리의 조국을!"

<조선어>

"일찍 해적의 나라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슬픈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은 밤마다 불을 죽이고 문을 닫아 걸고 가만가만 이불 속에서 그들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에게 아쉬운 민족의 빼앗겨버린 말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 어찌 아일랜드만의 항거하는 몸부림이었으랴?

역시 벙어리되어 말을 잃어버렸던 서른 여섯해 동안 원통해서 눈 감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이 혀끝에 맴돌아 나는 말을 못하고 살아온 우리들이 아니였더냐?

신라 천년의 고운 하늘에 별을 속사기던 말!

고구려의 젊은 영웅들이 천하를 호령하던 말!

아니 오백년 동안 량반놈들에게 무참이 짓밟혔다 나머지 다시 일제들에게 그 앞잡이놈들에게 빼앗겼던 우리들의 말.

작(爵)을 사고 화첩(花妾)을 사고 논밭을 산 놈들! 그놈들을 일컬어 친일파 민족 반역도들이 발굽 아래 또 다시…….

아니다. 우리들의 말 조선말은 우리들 인민의 것이다. 언제나 조선의 이름으로 민족을 지켜온 것도 우리들이다. 또 다른 량반과 ○○(미제–이규수)들에게 조국을 팔려는 놈들 삼가 다시는 속지 말고 우리들의 발과 길이 있어야 할 우리들이 아니냐!"

장용석은 그렇게 쓰러져 갔다. 그의 나이 고작 24살이었다.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식민지와 해방 정국에서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지향한 청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장용석에게서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장용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에서 장용석은 죽음으로 조국에 헌신했다.

'제22신' 1949년 5월 29일. ©강덕상자료센터

죽은 자의 목소리와의 약속

한강 작가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 폭력과 민주화 항쟁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짓밟히고 억눌렸던 인간의 존엄과 목소리를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되살려 낸 작품이다. 한강 작가는 이 소설과 인터뷰를 통해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는가다”라는 질문을 던졌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는 종교적 기적이 아니라, 죽은 자를 기억하는 산 자가 비로소 다시 인간다운 삶을 찾게 되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광주의 희생자들이 단지 희생당한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생은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역사적 뿌리이자 도덕적 기준이라는 뜻이다.

장용석의 죽음은 어떤가? 그가 남긴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8월 15일 그날! 우리들의 그 환희와 감격은 어떠했던가? 그런 력사적인 이른바 해방은 불행하게도 엉뚱스러운 곳으로 역행하여 민생은 유사 이래의 참담한 구렁에 빠져 민족은 최대의 위기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비운으로는 너무도 비운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해방이 있다면 오직 말과 글의 해방이 있을 뿐인 헐벗은 우리들이다. 불쌍하다면 지나치도록 불행한 우리 민족이다.

놈들에게 짓밟혔던 더러운 발자국, 아직도 씻기지 않고 놈들의 독아(毒牙)에 악물렸던 피자욱, 아직도 싱싱하게 남아 가슴 앞은 이때에 또다시 그들의 침략의 마수가 뻗친다! 아!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이 얼마나 민족의 모욕이며 문화의 압박이며, 력사의 반동이냐?

작(爵)을 사고 화첩(花妾)을 사고 논밭을 산 놈들! 그놈들을 일컬어 친일파 민족 반역도들이 발굽 아래 또 다시......

祖國은 부른다. 너같은 젊은 힘을. 그것만을 아러라."

이 영원한 젊은 목소리는 김석범의 소설 속에 다시 형상화되었다. 장용석을 버리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회한, 4⋅3 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살아왔다는 미안한 마음, 결국 동지들을 배반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부끄러움이 김석범의 소설에 담겼다. 해방공간을 살아온 장용석의 목소리, 죽은 자의 목소리와의 약속은 김석범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부설 강덕상자료센터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