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민족 구한 지도자, 판관 ‘드보라’

2025-06-30     이미영

이 글은 <공동선>(www.comngood.co.kr)에 함께 실렸습니다. - 편집자

8 대 0 헌법재판소 4명의 여성 재판관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이 만장일치로 내린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으로, 지난 12월 3일 계엄 사태는 123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후 선고일까지 역대 최장 기간인 111일이 걸릴 정도로 심판이 길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헌법재판관들은 핵심 쟁점마다 명확한 법적 근거를 제시하여 별다른 반발 없이 심판 결과에 대한 수용을 이끌어 냈다.

역사적 판결 전후로 재판관 개개인에 대한 여러 분석과 일화가 회자되기도 했는데, 8명 중 절반이 여성이라는 사실도 조명되었다. 1988년 헌법재판소법이 시행된 이후 여성 헌법재판관이 임명된 것은 2003년 전효숙 재판관이 처음이었다. 이정미(2011년), 이선애(2017년), 이은애(2018년) 재판관을 거쳐, 2019년 이미선 재판관이 임명되었을 때는 9명 중 세 여성 재판관이 재직하며, 처음으로 헌법재판관 중 여성의 비율이 30퍼센트를 넘어섰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정정미(2023년), 김복형(2024년), 정계선(2025년) 재판관이 연이어 임명되며, 이번 판결의 8명 재판관 중 절반이 여성으로 구성될 수 있었다. 재판관 중 여성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판결에 여성의 시각, 즉 다양한 관점이 담길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 심판은 그 결과에 따라 내전까지 우려될 정도로 정치적 긴장이 극심했지만, 다양한 관점을 지닌 재판관들이 소수 의견 없이 일치된 판결을 내린 덕분에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큰 위기를 넘겼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판관, 드보라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 사울 임금을 세워 왕정 국가가 되기 전까지 200여 년 동안, 고대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가 느슨한 부족 연합으로 지냈다. 이 시기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서로 단합을 이루지 못하고 지내면서, 하느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등 가나안의 신을 섬겼다. 이에 주님이 진노하시어 이민족의 지배를 받도록 심판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울부짖으면 이들을 구원할 지도자인 ‘판관’을 보내시어 위기를 극복하게 하셨다. 그러다 판관이 죽고 평온해지면 다시 이스라엘은 주님 눈에 거슬리는 짓을 반복했다. 이런 역사가 반복되는 시대를 다룬 구약 성경의 판관기에는 판관 12명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이 중에는 여성 판관도 1명 있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판관 5,7)로 불리는 드보라다.

드보라에 관한 기록은 판관기 4장과 5장에 나온다. 4장은 이야기 중심으로 서술하고, 5장은 영웅시 형태로 된 노래로 나온다. 라피돗의 아내 여 예언자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드보라 야자나무’ 밑에 앉아서 사람들을 재판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초르를 다스리는 가나안 임금 야빈에게 20년 동안 억압받고 있었다. 드보라는 바락 장군을 불러 군대를 모아 타보르산에 가서 가나안 군대와 싸우라는 하느님의 명을 전하며, 하느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셨다고 독려했다. 바락 장군은 드보라가 함께 가야만 명을 따르겠다고 의지했고, 드보라는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적장을 무너뜨리는 영광은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드보라와 함께 전투에 나선 바락 장군은 야빈 군대의 장수인 시스라의 부대를 무너뜨렸다. 시스라는 전투에 패해 도망치던 중 야빈 임금과 동맹을 맺은 카인족 헤베르에게 피신하지만, 헤베르의 아내 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바락의 군대는 승리한다. 판관기 5장은 판관 드보라와 바락 장군이 함께 노래하는 승전가를 전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임금 야빈을 멸망시켜 그 땅은 40년 동안 평온하였다고 노래한다.

판관 드보라가 민족을 이끌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biblepics.co)

이름이 지워지거나 남자를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 지도자

드보라는 억압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해 그들을 억압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러 나가도록 만든 지혜롭고 용기 있는 여성 지도자였다. 드보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재판을 받으러 그에게 갔다는 말로 소개될 정도로 판관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판관기에 나오는 다른 판관들은 주로 재판관의 역할보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때문인지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자로서 판관을 나열하는 성경 구절에서 드보라 대신 장수인 바락의 이름을 넣어, 마치 바락이 판관인 것처럼 드보라의 이름을 지워 버리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여루빠알과 바락, 입타와 사무엘을 보내시어, 사방에서 에워싼 원수들의 손에서 여러분을 빼내 주시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셨소”(1사무 12,11),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히브 11,32)와 같은 구절들이다.

유대의 역사를 다룬 1세기 가명의 필로(Pseudo-Philo)가 쓴 "성서 고대사"와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서도 드보라를 소개한다. 그런데 가명의 필로는 드보라가 판관으로 임명된 것은 남자 중 자격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요세푸스도 드보라는 그저 예언자였을 뿐이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는 바락인데, 바락이 하느님께서 맡기신 직책을 드보라에게 넘긴 것이라고 말한다. 요세푸스는 드보라의 역할을 전쟁 승리를 예언하는 정도로만 남기고, 바락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장수로서 활약했다는 기록으로 마무리 짓는다.

전통적 주석가들이나 설교가들은 드보라가 이스라엘을 구한 여성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남성 지도자의 역할을 잘 수행한 예외적 여성으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4세기의 암브로시오 성인은 드보라가 여성의 연약함에 굴하지 않고 남성의 의무를 수행했다며 칭찬했다. 그러나 일부 주석에서는 드보라를 바락의 보조자로 축소하거나, 바락이 겸손한 신앙인이라서 드보라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양보했다며 바락을 더 높이기도 한다. 반대로 바락을 겁이 많고 나약하여 여자에게 의존한 한심한 남자로 보기도 한다. 남자들이 제구실을 못해서 예외적으로 여성인 드보라가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드보라가 예언자요 판관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여성 지도자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여성 지도자를 존중하고 협력한 이들, 이들을 북돋고 아우르는 지도자 드보라

여성 신학자들도 구약 시대에 탁월한 여성 지도자가 있었고, 그의 활약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기며 여성 지도력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표본으로서 드보라를 조명한다. 하느님께서는 성 역할의 구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여성도 지도자로 삼아 하느님의 뜻에 따른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성서 해석에서는 가부장제의 질서에 따라 드보라를 라피돗의 아내로 소개하는 구절에 대해서, 라피돗은 ‘횃불’을 뜻하는 명사의 여성형으로서 남자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에 전혀 없다는 점에서 남편이 아니라 드보라를 수식해 주는 말, 즉 이스라엘 민족을 밝힌 ‘횃불과 같은 여인’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드보라의 이야기에 나오는 또 다른 여성 야엘의 역할도 주목한다. 군대를 이끌던 바락 장군이 아니라 이방인 여인인 야엘의 손에 시스라를 쓰러뜨린 것처럼, 하느님께서 여성을 통해 평화를 이루게 하셨다고 해석한다. 여성인 드보라와 야엘의 빛나는 활약이 담긴 판관기 4장과 5장은 내용상 가장 오래된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드보라와 야엘이라는 여성 인물을 조명할 뿐 아니라, 여성 지도자를 존중하고 그에 말에 귀 기울이며 도움을 청하는 데 거리낌 없는 바락이라는 남성 인물도 재조명한다. 바락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드보라의 영적 권위를 신뢰하고 그의 동반을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지도력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남성 동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동반하는 여성 지도자, 함께 협력하는 바락과 드보라의 관계와 역동성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로운 지도력을 보여 주는 여성 지도자의 활약을 기대하며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이던 구약 시대에 드보라가 여성으로서 판관을 맡은 것도 놀랍지만, 그가 보여 준 지도력은 분명 기존의 남성 판관들과 달랐다. 무기나 군사력의 힘이 아니라 장수를 북돋우고, 이스라엘을 도운 이방인 여인의 공을 인정하고 축복하며, 사람들과 협력 속에 이스라엘 민족을 승리로 이끌었다. 오늘날에도 여성 지도력이 늘어나야 한다는 요청은 성별이 여성인 지도자라는 데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여성의 관점을 반영하여 위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를 이뤄 가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꿔 가는 새로운 방식의 지도력을 기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원 대법관이자, 최초의 여성 유대인계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는 여성의 권리와 성 평등을 증진하기 위해 여러 법률을 개선하는 활약으로 유명했다. 긴즈버그는 대법원이 보수적인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나는 반대한다(I Dissent)”라고 말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이 말은 그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성차별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을 재판을 통해 보여 주었고, 소수의견에 그치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미래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며 불의에 도전하는 목소리를 내라고 독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목을 밟은 발을 치워 달라는 것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지도자로서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이 많음에도, 여성이 그 역할을 맡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성원들 때문에, 또 그런 분위기에 위축되어 용기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드보라가 보여 준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어, 교회와 세상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길 기대한다.

이미영

편집위원,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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