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교육, 어디서 어떻게 다시 출발할 것인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정기 심포지엄
“평화에 관한 모든 담론과 실천은 항상 특정 형태의 폭력 극복을 암묵적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평화는 폭력이라는 배경 없이는 그 의미가 온전해질 수 없다.... 이처럼 폭력에 대한 분석은 평화 개념의 구체적 내용을 만들어 가는 토대가 되며, 역으로 평화에 대한 기획은 언제나 특정한 폭력의 현존과 그 변혁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12일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갈등과 평화 교육' 심포지엄을 수원교구청에서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갈등 심리와 평화교육'(박주화 박사, 통일연구원), '한국 사회 갈등과 평화교육'(함세정 박사, 숙명여대 교육대학원)을 다뤘다.
‘확신’, 오늘날 평화 교육의 딜레마
개인이 무의식적으로 폭력 구조에 가담할 수 있다는 아픈 성찰에서부터
먼저 '갈등 심리와 평화교육-확신에서 의심으로: 한반도 평화교육의 재구성'을 발표한 박주화 박사는 평화에 대한 무비판적 확신이 평화를 해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는 평화 혹은 평화 교육이 절대 신념이나 교조적 도덕 선언이 아니라, 의심과 논쟁, 구체적 현실에 기반한 탐색, 내면의 성찰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평화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폭력을 묻고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화 교육이 지향할 윤리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성찰에 있고, '평화를 가르치는' 위치에서 타인을 계몽하려 들기보다, 자신 역시 폭력적 구조의 일부였음을 인정하며, 공동체와 함께 새로운 상상력을 만들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화의 개념이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평화에 대한 단일하고 단순한 규정과 그에 대한 확신은 평화 교육이 직면한 첫 번째 도전이 된다. ‘평화란 무엇인가’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평화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다양한 평화 개념이 평화가 갖는 윤리적 절대성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는 “평화는 열려 있고 논쟁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강한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다”면서,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만든다”고 설명하고, 그 대표 사례로 과거의 통일 교육을 들었다.
도덕적 우월감을 기반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설교하는 평화 교육의 경향, 개인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교육은 오히려 학습자에게 무력감만 심화시킬 수 있다. 그는 문화적, 역사적, 지정학적 맥락과 무관한, 평화 구축을 위한 특정 규칙과 원칙, 방법론도 지적했다.
박 박사는 “이 같은 접근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갈등 역학과 다층적인 윤리적 딜레마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단일한 '정답'만을 전제하는 교조적 접근으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다”면서, “평화의 개념 자체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폭력’의 구체적 양상, 작동 기제, 발생 조건에 주목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는 본질적으로 해석이 다양하고 논쟁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규범적으로 절대화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폭력은 보다 구체적 형태와 작동 방식을 지니며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라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현상”이라며, “먼저 폭력의 구체적 양상을 이해하고 그 작동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 오히려 평화 실천을 위한 더 확실한 토대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 교육은 추상적이고 일반화된 '평화'라는 이상을 무차별적으로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공간 속에서 경험되는 특정한 폭력 양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대응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는 “이는 평화 교육의 내용, 목표, 전략, 방법론이 해당 사회가 직면한 갈등의 성격, 역사적 맥락, 그리고 사회정치적 조건에 따라 본질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누구에게, 어떤 폭력에서부터'라는 맥락적 질문 해야
이런 문제의식에서 박주화 박사는 한반도의 맥락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구체적 폭력은 무엇인가,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누구에게, 어떤 폭력에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특히 한반도 분단의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사회 심리적 접근’으로 한반도의 폭력 구조를 내다봤다.
한반도에서 분단의 폭력은 남북 간 군사 대치나 정치적 긴장만이 아니라, 그러한 외부 상황을 해석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심리 구조와 사고방식, 감정 유형, 그리고 행동 양식 속에서도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사회 심리적 접근은 개인의 인식 변화와 내면화된 폭력의 성찰적 자각을 핵심 목표로 삼는 평화 교육의 기본 지향과 자연스럽게 조응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최근 한국 사회가 코로나 세계 대유행을 대응한 과정의 집단 심리 구조와 방식이 한국전쟁 당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75년 넘게 지속된 끝나지 않은 전쟁 상태와 코로나 대유행에서 나타난 주요 사회심리적 특성들은 “안보 중심성과 통제 내면화, 내부 단결의 절대화로 다양성 억압, 적의 상정과 개인적 낙인, 구조적 희생의 정당화”였다. 그는 “바로 이 정당화의 심리적 메커니즘(기제)이야말로 우리가 분단의 구조적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핵심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한반도 평화 교육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분단 폭력의 원인을 타자나 체제, 혹은 이념 대립(진보와 보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 내재화된 폭력성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며, 폭력 유지와 재생산에 무의식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즉 양심화가 진정한 평화 교육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평화 교육은 단순히 '옳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질문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한반도 평화 교육의 구체적 실천 전략으로 “점진적이고 단계적 접근, 체험과 성찰을 결합한 교육 방법론, 다양한 서사와 관점의 균형 있는 제시, 공감과 비판적 성찰의 균형 있는 발달, 평화 교육의 학교만의 과제를 넘어 사회적 사업으로 확장, 교육자의 역량 강화와 지원”을 제시했다.
평화교육,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시큰둥한 반응들
필요한 것은 현장 깊숙이 있는 시선
'단순한 해답 벗어나기: 지금, 여기의 평화 교육을 위한 전환'을 발표한 함세정 박사는 2018년 이래 가장 높은 사회 갈등에 처한 한국 사회에서 평화 교육은 갈등을 풀어 없애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방안 중 하나라고 말했다.
"북한을 분단이라는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던 전통적 관점에, 세계 시장에서의 위치라는 차원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된다. 한국은 '봉준호와 BTS의 나라', 즉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주체로 이해되는 반면, 북한은 ‘세계시민사회’라는 공동체에 성원권이 없는 존재로 이해된다."
함 박사에 따르면, 점점 삶에서 마주치는 한국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 현상은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한민족 담론에 근거한 통일 논의가 벽에 부딪히면 통일의 경제적 논리로 눈을 돌리지만, 그 역시 연약하다. 이주민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칭송은 다시 건강보험 재정을 파탄 내는 문제적 집단이라는 인식으로 변한다.
그는 ”강자의 위치를 성찰하고, 폭력적 사회 구조와 문화를 반성하자는 기본 논의조차 반발과 반동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역차별’ 담론은 불평등에 대한 반대라는 단순한 해답을 흔드는 대표적 도전이 되고 있다“며, ”불평등과 폭력의 구조가 현실 맥락과 복잡하게 얽힐 때, 일반론으로서 평화 교육은 현실에 발디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구체적 맥락 위에서 인식된 갈등과 폭력은 오히려 교육의 필요와 가능성을 두텁게 만들 기회일 수 있다“며, 울산의 ‘아프간 특별기여자’ 정착 과정을 소개했다.
‘아프간 특별기여자’는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점령하면서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에 이주한 아프간인과 그 가족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난민’을 대신해 한국 정부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을 위해 일해 준 이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조치로 탈레반 정권의 박해와 보복으로 위험에 처한 이들을 한국 정부가 특별히 보호하고 정착하도록 지원했다.
함세정 박사는 ”울산에서의 아프간 특별기여자 정착 과정은 지역 사회 내 갈등이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고, 서로 공존하며 살아갈 가능성을 어떻게 모색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녹록지 않은 상황이 있었지만 이들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역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울산시 교육청의 적극적 기조와 지역 산업의 요구, 그리고 시민 사회의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정착 초기 특별기여자 자녀 85명은 지역 사회와 일부 학부모의 반발로 예정된 3월 2일에 입학하지 못하고, 수차례 협의를 거쳐 3월 21일에야 첫 등교를 할 수 있었다. 혐오와 역차별 논란, 가짜 뉴스가 뒤섞이며 갈등은 심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교육청은 교육감의 확고한 입장 표명과 함께, 직원과 교사로 ‘진입 TF(특별 전담 조직)’를 꾸리고, 초기 '일방적'이라는 평가에도 지역 학부모에게 지속적으로 설명회를 열어, 그들의 우려를 경청하고 대안을 함께 모색하는 과정을 거쳤다.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만들고, 교육 관련 주요 실무자들은 해당 사안과 관련된 가짜 뉴스에 대한 분별력을 키우며,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교육을 여러 차례 이수했다. 현지 기업의 지원 참여와 다문화센터, 선주민 가족들이 이주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고, 다각적으로 운영했다.
그는 "이때의 평화 교육은 전통적 교실 교육과는 달리 현장의 맥락과 요구에 맞춰, 형식적 틀과 비형식적 접근을 넘나드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여러 참여와 교육 프로그램이 복합적으로 이뤄지면서 만남 자체가 평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며, "울산의 사례는 평화 교육이 지역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이 공동의 목표를 탐색하고, 어려운 소통을 이어 나가며, 구체적 실천으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임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거시적 관점에서 문제를 조망하려는 새의 시선이 아니라, 현장에 깊숙이 있는 '벌레'의 시선이다. 사회 전체의 평화라는 추상적 구호보다는, 지금 여기의 관점이 필요하다. 분단과 통일을 다루는 평화 교육의 고난은 지금 여기의 현장을 만들기 쉽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함세정 박사는 연구를 위해 만난 20대들이 평화·통일 교육을 과거에 고정된 서사이거나 또는 막연한 미래라고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통일 교육이 이처럼 현재성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를 ‘답’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이 복잡한 만큼, 평화를 향한 여정 역시 단일한 경로가 아닌 복수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해답, 최종적인 해결을 경계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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