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중국에 다시 서다 13
“내몽골 그 유명한 사라오소골(Chara-Ousso-Gol, 薩拉烏蘇河) 강가에서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지난 3월 리쌍(Licent)이 보낸 전보에서 거기 갈 방법이 없다고 언급했던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상황이 빠르게 변합니다. 우리는 이미 열흘 넘게 여기서 야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께 알려드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 지역을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 1923년 8월 14일 샤르댕이 스승 불르에게 보낸 편지.(“Teilhard de Chardin en Chine: Correspondance inédite, 1923-1940”, Editions Edisud, 2004, p.63.)
중국, 북방에서 보낸 편지
2004년 테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의 서신집이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90년대 초까지, 그의 서신집은 이미 여러 차례 책으로 묶여 나왔다. 간헐적이지만 꾸준한 출판이었다. 거기에 더해 나온 책이니 당연히 새로운 정보가 있을 터였다. 그 대부분이 프랑스 고인류생물학연구소(Institut de paléontologie humaine)에 있던 문서였다. 샤르댕이 마르슬랭 불르(Marcellin Boule, 1861-1942)에게 보낸 편지 모음이다. 샤르댕은 편지를 보관하는 습관이 없었다. 그러니 불르가 보낸 답장은 거기 없다. 하지만 오간 말들을 짐작하기엔 샤르댕의 편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불르는 샤르댕의 스승이었다. 그는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그의 지도 아래 샤르댕이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프랑스 신생대 에오세 초기 포유류와 그 퇴적층’이라는 논문이었다. 1922년 3월이었으니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끝나고 3년이 더 지난 봄이었다. 191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듬해에 불르의 연구실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학위 논문을 내놓은 것이다. 그중 4년은 전장 한가운데 있었다. 참호 속에서 군인으로 싸웠다. 전쟁과 고생물학과 사제로서의 소명. 전혀 어울릴 듯하지 않은 조합이다. 하지만 그 세 가지 합이 샤르댕을 이룬 자양분이었다. 그의 독특하고도 창조적인 사상이 나온 토양이었다.
주구점 프로젝트와 샤르댕
그즈음 파리가톨릭대학(Institut catholique de Paris)이 그에게 자리를 제안했다. 지질학 강의를 맡아 달라는 제의였다. 좋은 기회였으나 걸림돌이 있었다. 그는 고생물학 전공자였다. 지질학 교원 자격이 그에게 없었다. 그는 학사 과정 일부를 다시 이수하고 자격을 얻었다. 대학 측은 그를 곧장 교수로 임용했다. 그러니 1923년 중국 현지 조사를 떠나기 전에, 그는 이미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연구자로서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당시 중국은 세계 고고학계가 이제 막 주목하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에서 고대 인류의 흔적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었다. 주구점(周口店) 유적이 대표적이었다. 오늘날 북경시 팡산구(房山區)에 속해 있는 곳으로 천안문에서 서남 방향으로 46킬로미터 거리다. 차로 1시간 남짓이니 그리 멀지도 않다. 그곳 산에 여러 동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서 선사시대 화석 여러 점이 발견되었다. ‘산정동’(山頂洞)이라 부르는 동굴이었다. 19세기 말부터 고고학적 발견이 있던 곳이지만 발굴이 제대로 이뤄진 건 1920년대 들어서였다. 스웨덴 지질학자 안데르손(Johan Gunnar Andersson, 1874-1960)의 노력이 있었다.
1927년 안데르손은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지 조사단을 꾸렸다. 수년간 애쓴 끝에 얻어낸 기회였다. 거기에 유럽인 전문가는 물론 중국인 학자도 상당수 참여했다. ‘주구점 발굴 프로젝트’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더디게 진행된 조사였으나 안데르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빛나는 고고학적 발견이 있었다. 고대 인류의 두개골이 나온 것이다. ‘북경원인’(北京猿人)이었다. 학자들의 눈이 일순간 주구점으로 쏠렸다. 그리고 이내 세계 고고학계가 뜨겁게 주목하는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과 다르게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발굴이 미미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인류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새롭게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주구점 발굴은 새로운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주구점에 그들 관심이 집중되었던 배경이다. 1923년 중국으로 떠났던 샤르댕도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 그는 협력 자문으로 발굴에 참여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와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가 중국에 가게 된 건 주구점 때문이 아니었다. 주구점 발굴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다. 그를 이끌었던 첫 현장은 훨씬 더 거칠고 외딴곳이었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의 사라오소골 유적이다. 그곳에서 그를 부른 이가 있었다. 에밀 리쌍(Émile Licent, 桑志華, 1876-1952)이다. 직예동남대목구 선교사로 프랑스 예수회의 또 다른 고생물학자였다.
에밀 리쌍, 중국을 향해 가다
에밀 리쌍은 롬비(Rombies) 출신이다. 프랑스 북부로 벨기에와 접한 국경 지역이다. 열아홉에 예수회에 들어갔고 서른셋에 사제가 되었다. 소년 시절부터 그는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09년 사제가 된 후엔 한층 더 깊은 공부로 나아갔다. 1912년 그가 낭시(Nancy)대학에 제출한 논문이 있다. ‘매미목 곤충의 소화관에 관한 해부학-생리학적 연구’다. 동물학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예수회는 그의 연구 활동을 존중하여 해외 선교지로 보냈다.
애초에 그가 가려 했던 곳은 프랑스령 식민지였다. 아프리카나 마다가스카르 등이 후보지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더운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중국 북부는 프랑스와 비슷한 위도였고, 예수회의 거점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직예동남 선교지였다. 그가 속한 샹파뉴(Champagne) 관구가 맡았던 곳이다. 결심이 서자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연구 활동 계획도 하나둘 구체화시켜 갔다.
준비는 2년간 이어졌다. 그가 우선적으로 고려한 활동은 자연사 표본 수집이었다. 중국 북부의 동식물, 고생물, 지질과 광물 표본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사박물관을 만들어 성과를 전시할 계획도 세웠다. 이 분야의 모범이 이미 있었다. 그의 선배 예수회원인 피에르 외드(Pierre Marie Heude, 韓伯祿, 1836-1902) 신부였다. 강남대목구에서 활동한 이다. 1868년 상해에 온 후로 그는 장강(長江) 유역 일대의 생물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외드가 상해에 설립한 자연사박물관이 있었다. 서가회박물원(徐家匯博物院, Musée de Zi-ka-wei)이다. 나중에 진단대학(震旦大學)으로 옮겨 ‘진단박물원’(震旦博物院, Musée Heude)이 된 곳이다. 리쌍은 중국 북부에도 그와 같은 자연사박물관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부터 ‘선교’보다는 ‘연구’를 위한 파견이었던 셈이다. 사실 그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과학 연구는 중국 선교 초기부터 프랑스 예수회가 내세운 주요 활동이었다. 강남대목구 제2대 주교 랑기야(Adrien Languillat, 朗懷仁, 1808-78)가 추진한 핵심 사업이기도 했다.
랑기야 주교의 과학 연구 프로젝트
1872년 8월 랑기야 주교는 기획 회의를 열었다. 상해 예수회 장상인 델라 코르테(Agnello della Corte, 谷振聲, 1819-96)와 공동으로 개최한 회의였다. 거기서 강남 예수회의 사업 방향이 다각도로 논의되었다. 중요 계획 하나가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서가회에 ‘강남과학위원회’(Comité scientifique du Kiang-Nan)를 두고 과학과 문화 선교 사업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4개 분과를 구성하고 각 분과 책임자가 사업을 이끌기로 했다. 세르비에르(Servière)의 “강남전교사”(“Histoire de la Mission du Kiang-Nan”)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Tome 2, p.194) 세부 사항은 아래와 같다.
제1분과는 기상 관측소와 관측 회보 출판을 맡았다. 콜롬벨(Auguste Colombel, 高龍鞶, 1833-1905) 신부가 이를 주관했다. 제2분과는 자연사 연구로 외드가 박물관 사업을 주관하고 관련 연구 성과를 출판하기로 했다. 제3분과는 중국 역사 및 지리 연구로 피스터(Louis Pfister, 費賴之, 1833-91)가 주관했다. 제4분과는 중국어 출판에 필요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준비했는데, 초기에는 중국인 신부 두 사람이 이를 맡았다. 마건상(馬建常 혹은 馬相伯, Joseph Ma, 1840-1939)과 마건충(馬建忠, Matthias Ma, 1845-1900) 형제다. (두 사람이 아직 예수회를 떠나기 전이었다. 둘은 1870년대 중반에 예수회를 떠났다.)
과학 연구에 그들이 나선 까닭
문득 궁금해진다. 어떤 배경에서 그런 사업이 추진되었을까. 특히 과학 사업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슈발리에(Stanislas Chevalier, 蔡尚質, 1852-1930) 신부가 남긴 기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나중에 사산천문대(佘山天文台, Observatoire de Zo-sé) 초대 대장이 된 이다. 서가회천문대 역사를 소개한 글(“Histoire de l’Observatoire”)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다소 길고 문장도 뻑뻑하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북경 옛 천문대가 중국 선교에서 이룬 거대한 공헌의 기억. 과학을 통해 중국 지식층의 존경과 신뢰를 얻어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인도하려는 희망. 상해로 점점 더 많이 몰려들기 시작한 수많은 유럽인들, 그 대부분이 개신교도인 이들에게 우리 사역이 더 잘 받아들여지게 하려는 열망.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면서 너무나 쉽고 대담하게 남용되는 자연과학의 독점을 불신자들 손에 그저 내맡겨 둘 수 없다는 절박함. 이 모든 것이 랑기야 신부와 예수회의 상급자들을 천문대 설립으로 이끌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자연 과학 연구를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영광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이 천문대를 만든 진정한 사도적 목적입니다.”
키워드 네 개가 보인다. 기억(souvenir), 희망(espoir), 열망(désir), 그리고 필요성(nécessité) 혹은 절박함이다. 우선, 중국 선교에서 옛 선배들이 과학으로 이룬 성과를 기억했다. 또한 옛 선배의 방법에 따라 중국인을 선교하려 희망했다. 그즈음 개신교의 교세가 중국에서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선교 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길 열망했고, 세속화되는 과학에 현혹되지 않게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도 있었다. 이렇듯 그들의 과학은 ‘영혼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건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다. 외드와 리쌍과 샤르댕의 중국 현지 연구가 모두 그와 같았다.
허타오인, 리쌍의 빛나는 발견
그럼 리쌍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14년 3월 그는 천진(天津)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출발해 시베리아와 만주를 통과한 여정이었다. 헌현(獻縣)에 있던 예수회 지도부는 그를 천진에 머물게 했다. 거기엔 직예동남 예수회 재정사무소(procure)가 있었다. 숭덕당(崇德堂)이다. 리쌍의 연구 활동을 위한 조치였다. 편벽한 시골인 헌현보다는 항구가 있고 북경도 더 가까운 천진이 그에게 훨씬 나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숭덕당 한편에 그의 연구 공간이 마련되었다.
주변이 정리되자 그는 곧장 몸을 움직였다. 1914년 7월부터 그는 황하(黃河) 유역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체계적이고 면밀한 조사였다. 그리고 점점 더 범위를 넓혀 몽골과 티베트까지 나아갔다. 1914년부터 1925년까지 그가 이동한 거리는 5만 킬로미터에 달했다. 그 여정과 조사 기록을 담은 보고서가 있다. “중국 북부, 몽골, 티베트에서의 12년 탐사 기록”(Douze année d'exploration dans le nord de la Chine, en Mongolie et au Tibet, 1914-1925)이다. 1926년 천진에서 출판되었다.
이때 수집한 화석, 광물, 동식물 표본이 상당히 많았다. 숭덕당에는 더이상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 현지 조사 초기에는 주로 지리와 풍토를 살폈다. 수집한 자료는 대개 현존하는 동식물 표본과 민속-인류학 자료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야 고생물 화석과 선사 시대 석기 발굴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성과가 내몽골 사라오소골 유적이다. 오르도스 고원의 동남쪽 지역이다. 1922년 리쌍은 거기서 고대 인류의 앞니 화석 한 점을 발견했다. 이른바 ‘허타오인’(河套人) 화석이었다.
리쌍의 발견으로 유럽 고고학계가 술렁였다. 출토된 지층의 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나온 것으로는 처음이었다. 당시 고고학은 유럽 중심의 학문이었다. 아시아 지역 발굴 조사가 매우 드물었던 때다. 그들은 아시아, 특히 중국에는 구석기 시대 인류가 없다고 여겼다. 그 증거를 보지 못했던 까닭이다. ‘허타오인’ 화석은 기존 관념에 커다란 균열을 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주구점 ‘북경원인’ 화석이 나왔다. 아예 쐐기를 박는 발견이었다.
천진의 리쌍과 파리의 불르, 그리고 샤르댕
그때 내몽골 오르도스 고원에서, 샤르댕을 오게 한 이가 리쌍이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불르에게 편지했다. 불르는 20세기 초 프랑스 고생물학계의 거장이었다. 네안데르탈인 연구에서 그는 탁월한 성과를 내었다. 무엇보다 ‘고인류생물학’(paléntologie humaine)을 분과 학문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립자연사박물관에서 연구한 34년 동안 그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그들이 곧 학계의 중추가 되어 스승의 뒤를 이었다. 샤르댕도 그중 하나였다.
리쌍은 불르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서신이 자주 오갔다. 불르가 그 분야 권위자였으니 자문을 구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화석 표본의 연대 측정이 불가했다. 당시 중국에는 그럴 장비도 기술도 인력도 없었다. 파리에 보내야 했다. 자연사박물관 측도 환영할 일이었다. 그를 통해 현지의 생생한 표본을 받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리쌍은 오르도스 고원에서 나온 것들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내 불르에게 편지했다. 발굴 필요성을 설명하고 요청 사항 한 가지를 전했다. 현지 조사를 도울 전문가를 보내 달라 요청했다. 불르는 이내 화답했고 그렇게 보낸 이가 샤르댕이었다.
샤르댕은 내심 기뻤다. 그는 냉큼 길을 나섰다. 스승의 요청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수년 전부터 리쌍을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둘은 예수회 동료이자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동학이었다. 리쌍이 중국에 온 후에도 두 사람은 연락을 유지했다. 샤르댕은 리쌍의 현지 조사에 관심이 많았다. 중국에서 연구하고 싶다는 뜻을 리쌍에게 일찍이 밝혀 둔 터였다. 그러니 스승의 권유는 그에게도 반가운 것이었다. 연구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리쌍은 직예동남 예수회 소속으로 예수회가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반면 샤르댕은 국립자연사박물관의 파견 연구자 신분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함께 연구하게 된다. 샤르댕에겐 유럽 바깥에서의 첫 현장 발굴 경험이었다.
황하 유역 탐사 연구의 결실
샤르댕이 오자 리쌍의 연구 주제도 많이 달라졌다. 고인류학 현지 조사와 발굴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리쌍이 이미 진행했던 황하(黃河) 유역 탐사 연구를 정리해야 했다. 1924년 그렇게 나온 책이 있다. “황하 유역과 북직예 만의 기타 지류에서의 10년”이다. 원제는 이렇다. “Dix année (1914-1923) dans le bassin du fleuve jaune et autres tribulaires du golfe du Pei Tcheu Ly”. 10년간 그의 발로 이룬 황하 유역 탐사 기록이다. 총 4권으로 1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었다.
반향은 생각보다 컸다. 무엇보다 프랑스 학계가 크게 반겼다. 파리지리학회(Société de gégraphie de Paris)와 프랑스 인문 아카데미(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가 모두 상을 수여했다. 그 책은 앞서 언급한 “중국 북부, 몽골, 티베트에서의 12년 탐사 기록”(1926)과 더불어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927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을 받았다. 그해에 중국 정부가 수여하는 5급 훈장도 받았다. 그의 연구를 프랑스와 중국이 모두 인정한 것이었다.
리쌍의 야심작, 북강박물원
연구가 쌓일수록 수집한 표본도 늘어 갔다. 숭덕당은 이제 더는 자리가 없었다. 표본을 보관하고 전시할 공간이 필요했다. 연구를 위해서도 새로운 공간이 절실했다. 박물관을 지어야 했다. 리쌍이 오랫동안 꿈꿔 온 일이었다. 중국에 오기 전부터 그가 품고 있던 기획이었다. 그즈음 직예동남 예수회가 야심 차게 추진한 사업이 있다. 천진에 예수회 대학을 세우는 일이었다. 천진공상대학(天津工商大學, L'Institut des Hautes Etudes industrielles et commerciales)이다. 거기에 박물관도 함께 짓기로 했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북강박물원(北疆博物院)이다. 리쌍이 심혈을 쏟아 이룬 박물관이었다.
천진공상대학은 당시 중국에 있었던 천주교 대학 세 곳 가운데 하나다. 상해 진단대학(震旦大學, 1903)과 북경 보인대학(輔仁大學, 1925)이 나머지 두 곳이다. 공상대학은 1923년부터 1951년까지 운영되었다. 그때 건축이 지금도 남아 있다. 천진외국어대학 본관과 그 주변 건물이다. 북강박물원 역시 거기 그대로 있다. 규모가 제법 크다. 북루(北樓), 서루(西樓), 남루(南樓) 세 개 동을 차례로 짓고 각 동을 다리로 연결했다. 1928년 5월에 박물관 문을 열었다. 남루가 채 완공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전시된 표본 수는 식물류가 20,000점, 동물 표본이 35,000점, 암석과 광물 표본이 7,000종이었다. 희귀 동물 화석도 적지 않게 전시되었다.
그 많은 표본이 거기 있었던 이유가 있다. 리쌍은 광범위한 표본 수집 네크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북부 각지에 있었던 선교사들이었다. 그는 북부의 모든 선교지 교회와 연락을 유지했다. 소속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현지 조사 때마다 그곳 교회를 거처로 이용했다. 또한 표본 채집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어 선교사들에게 배포했다.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이들이 표본을 손상 없이 보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효과는 컸다. 오르도스 사라오소골 유적이 바로 그 지역 선교사의 제보로 얻은 정보였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다. 현지 조사 기록에서 리쌍은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밝히고 있다. 감사의 뜻이리라.
북강박물관이 개관한 이후, 수많은 학자가 거길 다녀갔다. 박물관만을 보기 위해 천진에 들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일반인에게는 신기한 화석과 표본이 가득한 곳이었고, 전문 연구자들에겐 국제적 협력 네트워크로 연결된 작업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리쌍과 샤르댕이 머물고 연구했던 집이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두 사람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에게도 집이 있었을까. 대지를 누비며 인류의 첫 모습을 찾아 헤매었으니, 그가 서 있던 대지가 그들 집이 아니었을까. 내몽골 그 유명한 사라오소골 강가, 바로 거기 말이다.
오현석
가톨릭대학에서 종교학과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한 북경의 풍경에 이끌려 훌쩍 서해를 건넜다. 북경대학 일어일문학과에서 19세기 동아시아의 프랑스 예수회 자료를 뒤적이다 박사논문을 냈다. 북경에 있는 화북전력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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