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교회 권위주의 비판
5월 10일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선종 1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이들이 '서공석 신부의 신학과 신앙'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날 강창헌 씨가 발표한 서 신부의 '교회론'을 네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이 글은 그 두 번째입니다. - 편집자
2) 교회의 권위주의 비판
서공석 신부는 여러 곳에서 시대착오적인 교회와 신학의 권위주의를 비판했고, 집중적으로 권위주의만 겨냥한 논문도 몇 편 발표했다. 그는 교회 제도가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마련한 것이 아니며, 현재 제도와 관행을 하느님의 뜻이라 주장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확언하면서 권위주의를 유발하는 세 가지 착각과 한 가지 폭력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형이상학적 언어가 일으키는 착각이다.18) 서공석 신부는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포함해 교회 안에 여전히 과거 형이상학적 교리 언어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제도뿐 아니라 신앙 언어도 중세 유럽의 형이상학적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교회를 비판하며 현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형이상학을 요약한다.
“형이상학은 일방적 언어이다. 이분법(二分法)과 우열(優劣)을 정당화하는 언어이다. 이 언어에는 대화가 없다. 가르침과 순종이 있을 뿐이다. … 교계제도가 대표하는 교회는 초자연적 진리를 충만하게 보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와서 배우고 익혀서 그들의 영혼을 구해야 한다.”19)
서공석 신부는 여기서 과거 언어에 대한 해석학적 과제를 무시하고 대화를 묵살하는 우리 교회의 일방통행적 현실을 암시하고 있다.20) 그는 신앙 언어의 출처와 배경 및 전달 과정, 현대적 의미를 중요하게 고려했고 이성적 이해와 설득을 중시했다. 중세 유럽에서 통용되던 형이상학 언어를 고집하는 것은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우리말로 연설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21)
두 번째 착각은 교회와 구원을 혼동하는 데서 온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였기에 구원과 교회가 동의어처럼 인식됐다. 서공석 신부는 구원과 교회를 하나로 묶고 인류를 활동 대상으로 여기면 인류를 외면하는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 종교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종교나 교회는 역사 안에 일어나는 실제적 일들과 관련이 없는, 초자연으로 포장한 신화적 신앙언어를 발생시킨다. 이와 더불어 교회는 스스로가 지닌 신앙고백문, 경전, 전례 등의 상징성을 망각하고, 그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절대적 언어로 착각하고 강요한다.”22)
교회는 사회 문화적 맥락의 변화를 고려해 신앙 언어가 왜곡되지 않도록 애써야 하고, 그 언어는 신앙인들의 일상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신앙언어는 이 세상 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체험을 소홀히 하는 게 아니다. 신앙과 세상의 유대를 끊으면 종교나 교회가 지닌 내적 구조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23) 서공석 신부는 1999년 봄 '예수 그리스도와 권위주의'라는 주제로 개최한 심포지엄 결과물을 묶은 단행본 발간사에서 자신의 비판적 교회관을 명징하게 밝히고 있다.
“교회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교회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 안에는 무교회(無敎會)주의자들의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대한 메시지가 역사 안에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 나라도 구원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우리들입니다. 구원과 교회를 혼동하면 독선과 권위주의가 발생합니다. 독선과 권위주의는 예수께서 거슬러 싸우신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느님과 전혀 무관하고 그리스도적이지도 않습니다. 독선과 권위주의는 하느님을 부정하고 역사 안에 일하시는 ‘성령을 모독하는’(마르 3,29) 일입니다.”24)
세 번째는 교도권(magisterium)을 오해하는 데서 오는 착각이다. 서공석 신부는 오늘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교도권’의 연원을 밝히면서 그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25) 본디 교도권이라는 말에는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이런 뜻은 사라지고 교회 교계 제도가 보유한 권한의 한 형태로 고정되면서 이 단어는 권한을 보유한 사람이나 보유한 집단을 더 강조하게 된다.26) 그리고 이 권한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일은 진리를 위한 것으로 정해졌다. 그 결과 ‘교회를 통치하는 권한’과 ‘진리를 위한 봉사’가 마치 동의어라도 되는 양 퇴색했다. 그러나 “교도권이 권한으로 이해되면 권한이라는 것이 지닌 일반 사회적 기능 위에 안주하고 만다. 교도권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의 신분과 자격을 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결국은 하나의 이념으로 전락한다.”27) 서공석 신부는 계시가 전체 교회를 위해 주어졌
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교회 권위의 교도권적 직능’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 직능이 ‘친교’를 위한 ‘봉사’라고 하며, 신약 성서가 전하는 사도적 권위가 이 두 단어에 담겨 있음을 보았다.
“교회 안에 가르치는 권위는 신앙 안에 이루어지는 친교를 위한 봉사이다. 모든 사람의 신앙이 올바른 것이 되고 모든 사람이 제대로 된 교감을 갖게 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28)
서공석 신부에 따르면, “교도권이 하는 말은 완성되고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항상 생성되고 시대적인 것이다. … 교도권은 인류가 처한 상황이 달라지면 올바른 신앙을 새롭게 표현하고 교회의 일치를 새롭게 하기 위해 새로운 말을 한다.”29) 서공석 신부는 카를 라너를 인용하며 교도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교도권은 그 자체로 참답다고 평가되는 명제를 너무 성급하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잘난 체하는 것은 … 죄에 물든 인간 조건을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진리를 논하면 위험하고 경솔한 짓이다.”30) 서공석 신부의 모든 신학적 비판의 전거가 그러했듯 교도권에 대한 비판 역시 예수의 복음에 근거해 있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층의 권위주의를 비난하신 분이다. 제관들과 율사들에 대해 예수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닫아버린 사람들이다(마태 23,13). 모세와의 계약이 의미하는 하느님의 함께 계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라고 복음서들 안에서 후렴과 같이 반복되는 말씀은 그들의 독선을 비난하는 말씀으로 들린다.”31)
끝으로, 권위주의가 유발하는 폭력이란 “평등과 자유를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미아(迷兒)가 된 사람들의 폭력”이다.32) 여기서 ‘미아가 된 사람들’이란 서품식을 통해 직(職)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서공석 신부는 직의 수여가 신분의 수여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봉사 기능직의 수여라고 강조하면서 현행 서품 의례 자체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황제나 영주의 대관식 혹은 착좌식을 흉내 내는 의례와 복장, 중세 기사의 수임식(授任式)과 같은 형태의 서품 의례들은 사라져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되기 위해 이 분야의 개혁은 절실하고 시급하다.”33)
그는 교회 안에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권위가 주어지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모든 언어나 관행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단언하면서 신분과 권위를 혼동하는 ‘교회의 일부 계층’의 독선을 본다. “권위는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의 실효성을 높일 때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권위는 순종을 부르지 않고 인정을 부른다. … 권위와 실효성을 신분과 혼동하면서 그 가상(假想)적 권위와 실효성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결국 폭력에 호소하게 된다. 여기서 오늘 교회의 일부 계층에 만연되고 있는 독선의 뿌리를 보아야 한다.”34)
서공석 신부의 권위주의 비판은 사실상 직접적으로 교회의 사제와 주교 등 성직자들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착각을 성찰 없이 유지하는 장본인들이다. “성직자, 사제, 목자라는 호칭들이 존경스러운 인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들리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35) 성직자라는 신분을 통해 권위주의라는 폭력을 내세우는 그들에게서 교회 내 독선의 뿌리를 본 것이다. 그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교회가 오늘을 위한 기쁜 소식을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한다.
“과거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혹은 군주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제도와 조직을 강요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시대 사람으로 다시 퇴보하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기쁜 소식이라야 한다. 교회는 과거의 고정관념들을 청산하고 오늘을 위해서도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36)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바로 “주교직이 교회 권위주의의 진원지”라고 직격하면서, 세상을 외면하면 세상을 위한 복음 메시지가 사라진다고 일갈하고 있다.37) 서공석 신부는 교회의 선포와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준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보았고, 교회가 하는 말에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권위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이 먼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설파했다.38) 가톨릭교회는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도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전통의 어원인 라틴어 ‘tradere’는 ‘전달하다’로도 ‘배신하다’로도 옮길 수 있다. 물려받은 전통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배신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39) 서공석 신부는 우리 시대와 문화에 적합하게 복음 메시지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수고를 접은 가톨릭교회에서 전통의 배신을 읽어 냈다.40)
“하느님은 역사 안에 계시지만 황제나 권력자나 고위 성직자와 같은 모습으로 계시지 않는다. … 피라미드식 제도는 신자들을 저변으로 밀어냈다. 신자들 안에 일하시는 성령이 외면당하면 교회는 그 본연의 성격을 상실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계제도라는 권력구조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성령의 일하심을 봉쇄하고 있다.”41)
각주
17) 같은 책 263.
18) 형이상학적 그리스도론에 대해서는 '오늘의 그리스도론' in "한국 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 II", 75-79 참조.
19) '교회 권위주의의 발생처' in "한국 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 II", 112.
20) “현재의 한국 가톨릭교회는 솔직한 의견 교환이나 공개적 반성, 토론, 비판을 극도로 기피한다. 윗사람은 존경되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순종하는 것이다.” -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문화가 있다' in "종교신학연구 제8집", 355 참조.
21)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문화가 있다', 356.
22) '교회 권위주의의 발생처', 113.
23) 같은 곳.
24) "한국 가톨릭교회 이대로 좋은가? II", 6.
25) '교회 권위주의의 발생처', 114-117 참조.
26) 서공석 신부는 ‘교도권’과 대비하여 ‘섬김과 봉사’를 강조하곤 했다. “오늘날 교계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교도권이라는 낱말은 19세기부터 통용되는 것으로 크고 높은 것을 의미한다. 그 반면 예수가 즐겨 사용하시고 신약성서와 교회 공동체가 오랫동안 사용해 온
복음적인 낱말은 봉사이다. 이 단어는 낮고 작은 것을 의미한다.” - "새로워져야 합니다", 243.
27) '교회 권위주의의 발생처', 114.
28) 같은 글 같은 곳.
29) 같은 글, 116.
30) 같은 글 같은 곳.
31) 같은 글, 116-117.
32) 같은 글, 117.
33) 같은 글 같은 곳.
34) 같은 책 같은 곳.
35)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문화가 있다', 362.
36) '교회 권위주의의 발생처', 118.
37) "새로워져야 합니다", 273-275.
38) 같은 책, 250.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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