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공보(헌법개정안), 되찾은 대통령 직선제 그리고 6공화국

2025-05-27     김지환

이 글은 <씨알의 소리> 295호(2025년 5-6월)에 실린 글입니다.

아디오스! 군사 정권!!

어릴 때만 해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통령이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군인들만 하는 줄 알았다. 반정부 운동에 가담했다가 끌려가면 으레 고문을 받는 줄 알았다. 2000년대 초반에 같이 얕은 산을 오르던 선배가 공황장애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 나중에 들어 보니 고문 후유증이라고 했다. 우리 주위에 어딘가 끌려가 고문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거리엔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고, 짱돌과 화염병이 서로 교차했다. 다 민주주의를 위한 거센 싸움이었지만, 과연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찾아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어쨌든 한국의 시민은 정말 민주주의를 위해 엄청나게 싸웠다.

1986년 2월 필리핀 민중은 손가락 ‘L’ 자(타갈로그어로 ‘투쟁’을 뜻하는 ‘lavan’에서 온)와 노란 물결 속에서 독재자 마르코스를 끌어내렸다. 정말 당시로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뉴스였다. 필리핀의 ‘피플 파 워’는 더는 군사 정권을 용인하기 힘든 한국인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987년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했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절정에 올랐다. 우리 민주주의는 정말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을 먹고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의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으며, 시민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청소년도 ‘파쇼 타도’를 바닥에 낙서하고, 초등학생에게 전두환은 웃음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전두환을 위시한 군사 정권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정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1980년대는 한국 가톨릭교회도 무척 빛난 시절이다. 민주화 운동 국면에서 크게 기여했고,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도 매진했다. 명동 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되었고, 교회는 군사 정권에 팍팍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 시절 서울대교구 주보만 봐도 교회가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주보 하단의 문구는 아주 직접적이다. “‘KBS TV 시청료 거부 운동’은 양심의 요구입니다.” <KBS>의 왜곡 보도에 항의하며 시청료 거부 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교회는 이를 지지하는 정도를 넘어 거의 이끌다시피 했다. 당시엔 시청료 고지서가 따로 있었는데, 받자마자 찢어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시청료 거부 운동에 동참하니 전기료와 통합해 통합 고지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통합 고지서에서 시청료 부분을 떼어 내려면 동사무소에 가야 했다. 좀 번거롭지만 동사무소에 가서 분리하고, 분리된 시청료 고지서를 받고 문을 나서자마자 바로 찢어버렸다.

예전에 아끼는 후배에게 책을 한 권 선물했는데, 그 책 안에 4·13 호헌 조치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지, 그것이 무엇인지 내게 물었다.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의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한 내용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렇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개헌을 골자로 하는 민주화 투쟁은 4월, 5월을 거쳐 6월에 정점에 달했다. 마침내 노태우의 6·29선언이 이어졌다.

1987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노태우의 항복 선언은 기만적인 면이 분명 있었지만, 긴 안목에서 군사 정권이라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종식되어 가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한국 사회의 해빙기가 찾아왔다. 어이없이 금지되었던 노래와 영화 그리고 서적 등이 해금되기 시작했는데, 한국인의 노래 〈아침이슬〉도 그때 해금되었다.

가을부터는 선거의 열기가 뜨거웠다. 공식 후보 포스터는 아니었는데, 노태우의 대중 집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학교 앞 집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교문을 나서면서 눈에 띄길래 막 달려가서 발차기로 포스 터의 노태우 얼굴 부분을 가격했다. 그 때문에 정체 불명의 누군가에게 끌려갈 뻔했다. 다행히 싹싹 빌고 풀려 나기는 했다. 1987년 세상의 공기는 이래저래 활기차게 흘러갔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개헌의 절차였다.

1987년 '국민투표공보'(헌법개정안), 선거관리위원회. ©김지환

국민투표공보, 후불제 민주주의의 중도금 영수증

개헌을 향한 프로그램이 착착 진행되었다. 여야 합의로 개헌안이 만들어졌고, 개헌안은 재적 의원 272명 중 264명의 서명으로 9월 18일 발의되었다. 국회는 즉시 발의된 개헌안을 정부에 이송했고, 정부는 9월 21일 국무회의를 열고 개헌안 공고를 의결했다. 대통령이 개헌안을 공고하면 그로부터 20일 이상 60일 이내에 국회에서 의결을 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따라, 국회는 10월 12일 본회의를 열고 기명 표결을 했다. 이날 표결에는 재적 의원 272명 중 258명이 참여했다. 그중 254명이 찬성, 4명이 반대 표를 던져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개헌안이 국회에서 재적 의원 과반수의 지지로 통과됨에 따라 전두환은 10월 17일 국무회의를 열고, 개헌안에 대한 국민 투표를 10월 27일에 실시할 것을 공고했다.

국민 투표를 실시하기 전에 이 소책자가 투표권을 가진 모든 가정에 배달되었다. '국민투표공보: 헌법개정안', 순 한자투성이며 알아먹기 힘든 문구투성이지만, 앞으로 헌법이 이렇게 바뀔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문건이다. 국민은 그 내용을 쭉 살펴본 뒤에 헌법 개정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를 투표하면 된다. 개정안의 내용을 꼼꼼하게 못 보았더라도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한다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동의할 만했을 것이다. 이른바 대한민국 제6차 국민 투표로, 유권자 93.1퍼센트의 압도적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은 확정되었다.

질기고 질긴 민주화 투쟁으로 얻어낸, 1971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진 대통령 직선제를 되살리는 것을 포함해 민주화를 향한 제도적 진전을 확인해 준 승리의 징표였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87년 체제’의 중요한 시작이기도 하고, 3공화국 말기에 태어난 내가 네 번째 공화국을 맞게 한 문건이기도 하다. 1987년 그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나는 선거권이 없어 그때 투표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많은 이를 설레게 하는 정치적 행사가 분명했다는 것을 그 열기와 참여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어 ‘죽 쒀서 개 주었다’는 자조와 절망이 뒤범벅되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시대의 도도한 흐 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말 이 나라의 헌법은 권력자들에 의해 너덜너덜해졌는데,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으나, 투쟁의 성과로 누더기가 된 헌법을 그나마 바로잡아 가며 만들어진 것이 6공화국을 만든 87년 헌법이다. 일반적으로 광복되자마자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를 아무 노력 없이 받은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미 대일 항쟁기부터 한국인은 왕정을 넘어 민주정을 훈련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시민 선생의 ‘후불제 민주주의’론은 이런 우리의 민주주의 문제를 돌아보는 데 몇 가지 영감을 전해 주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불제 민주주의’로 전제한다면, 지난 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초인 지금까지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대가를 지급했다. 모든 가정에 배달된 이 문건 '국민투표공보: 헌법개정안'은 한국 민주주의가 중도금을 치르고 받은 영수증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번 비상 계엄 정국에서 ‘빛의 혁명’을 겪으며 한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완납했다고 생각한다.

87년 헌법으로 탄생한 6공화국은 적어도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했으며, 한국은 아시아에서 명실상부한 선두적인 민주 국가가 되었다. 이 6공화국하에서 우리는 이제 아홉 명째 대통령을 맞을 준 비를 하고 있다. 아마 이처럼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기까지 겪은 고난의 길 때문에, 한국의 시민은 의원내각제보다 대통령제를 더욱더 선호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비상 계엄 상황에서 힘을 발휘한 87년 헌법, 그럼에도 새로운 헌법을 향해

87년 헌법은 분명 어느 정도 타협의 산물이었는데, 대통령 직선제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탄생과 관련해서도 의미가 깊다. 이번 비상 계엄 친위 쿠데타 정국에서 헌법재판소는 내란을 제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헌법재판소는 파시즘에 신음했던 독일의 표본을 따랐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박근혜 파면을 비롯해 일정한 효능감을 안겨 주었다. 헌법재판소는 세계에서 비교적 모범 사례로 여겨졌지만, 이번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잠시 위기를 맞으면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6공화국 헌법은 분명 우리가 쟁취한 우리 역사의 옥동자요, 정상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었다. 하지만 이 헌법으로 상징되는 87년 체제를 넘어서자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이어졌다. 노동권, 생존권, 환경권, 여성의 권리, 소수자의 권리 등 좀 더 섬세하게 살려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며, ‘실질적 민주주의’를 더욱더 강력하게 담보하는 그런 헌법을 기대할 때가 되었다. 이런 지점에서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아찔한 순간으로, 현 헌법 체제를 위협한 사건이었다. 내란 세력의 분탕질은 그 자체로 엄청난 역사적 반동으로, 다행히 시민들이 잘 막아냈지만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내란 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죄와 숙청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 과제를 완수한 다음에야 비로소 새로운 헌법을 향한 논의가 힘을 받을 것이다. 이 얼마나 여러 면에서 낭비가 아니겠는가? 검찰 출신의 무능하고 잔인한 자를 대통령으로 뽑는 바람에 우리가 정말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내란을 진압한 ‘빛의 혁명’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에 대한 잔금을 다 치렀노라고. 게다가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새로운 예형을 창출했다.

김지환(파블로)

<가톨릭평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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