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책임의 시대로

2025-05-19     정형준

흔히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정치 사회 조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1970년대 국가 개입에 대한 자유방임주의를 주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 정치인 레이건과 대처는 이런 기조에 맞춰 공공 서비스와 국영 기업을 대대적으로 민영화하고 세계화와 금융화를 촉발했다. 두 사람이 시도한 정책은 무역과 금융 자유화, 부자 감세, 사유재산 개념 확대로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을 줄이고 시장 자유화를 더 크게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1997년 외환 경제 위기(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 도입되었다. 이후 주요 공기업이 민영화되고, 노동 유연화, 금융 시장 개방, 규제 완화가 촉발되었다. 주요 선진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금융화 여파로 일어난 외환 경제 위기로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확산되었다는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한국 사회에서 그간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경제 성장이란 목적으로 시장자유화를 주창하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한층 더한 사회 정책 전반의 민영화를 주장하였고, 촛불 항쟁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도 각종 시장 규제 완화로 화답해 왔다. 국제적으로 다른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불러온 1990년대 말 경제 위기,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의 대응책으로 여러 대안이 제시된 상황과는 사뭇 다른 일관된 방향이었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마치 1970년대로 돌아간 듯 신자유주의의 미사여구도 복사 수준에서 수행했다.

윤석열은 시장지상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인 "선택할 자유"를 27년간 끼고 읽었다고 주장하면서 몰상식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부정 식품이라도 가난한 사람은 먹을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했고, 임상 시험이 끝나지 않은 약품도 말기 환자들은 쓸 수 있게 정부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후보 시절에도 언급 한 바 있다. 집권 뒤에는 ‘사회 서비스는 시장화’해야 한다고 하고, 시장 ‘자유’를 수백 번 강조해 노동 시간을 늘리려 했다. 국민건강보험은 ‘포퓰리즘’으로 몰고, 연금 제도는 소득 보장이 아니라 재정 중립을 목표로 바꿨다. 대부분 동포인 중국 국적 이주민들은 세금 도둑으로 몰렸고, 사회 보장 제도가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는 불신을 조장했다.

다행히 50년 전 시장근본주의자의 주장과 실패한 그 계승자들을 다시 복제한 정부는 결국 스스로 군대를 동원해 독재를 꿈꾸다 탄핵당했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윤석열과 그 일당은 내란을 일으킨 잘못 외에도 사회 전반을 시장화하려고 한 죄악도 크다. 그리고 탈사회적 관념을 퍼뜨린 죄악도 있다.

책임감

우선 이런 시장주의 첨병, 내란범을 대통령까지 만든 우리 사회의 주류 관념을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은 12월 3일 친위 쿠데타를 지시해 놓고도 지금까지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기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3년간 우리는 이 자에게서 책임지는 리더의 모습을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왜 책임지지 않는 자를 국가 요직에 기용하고 대통령으로 선출했을까?

이런 자들이 승진하고 요직에 기용되었다는 건 그간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고 아랫사람이나 주변에 책임을 전가한 자들이 승승장구 했다는 의미다. 책임 전가를 쉽게 할 수 있는 구조도 문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윤석열이 이태원 참사 이후 말한 책임에 대한 관념에도 녹아들어 있다. 윤석열은 "막연하게 다 책임? 현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책임은 있는 사람에 딱딱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면서 정부 책임이나 국가 책임은 철저하게 회피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조차 세간의 사퇴 촉구에도 옹호하며 결국 3년뒤 쿠데타 시도에 동참시켰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뒤 서울 시청 인근에 걸린 정부의 책임 촉구 현수막.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태원 참사와 같은 거대 압사 사고의 원인은 물론 다양하다. 군중 통제, 사전 예방 교육, 돌발 상황 대응 등등 수많은 쟁점이 있다. 하지만 매년 참사 없이 통제된 군중 이동이 이 당시 작동하지 않은 것은 윤석열 정부의 우선순위 때문이란 것이 명확하다. 소위 ‘마약과의 전쟁’을 통해 사정 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군중 통제보다 마약범 검거를 우선에 놓았다. 여기에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겨 경찰력의 분산도 있었다. 이런 우선순위 결정 문제를 ‘딱딱’ 물을 수 있을 리 없다. 계엄도 ‘고도의 통치 행위’라고 발뺌하는 자들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태원 참사 원인을 직접적 통제 당사자에게만 묻는다면 당연히 일선 경찰, 경찰서장 정도만 해당될 것이다. 국가 권력의 우선순위를 결정한 정책 결정자들은 ‘통치 행위’라는 논리로 다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논리에서는 책임이란 문제는 직접적 당사자들 사이의 문제만 남는다. 즉 모든 사안은 개인과 개인의 사건에서 직접 인과 관계로만 추정하게 된다.

그래서 윤석열이 말한 ‘현대 사회’란 곧 ‘개인 책임’만 있는 사회다. 개인 책임에는 이태원에 수많은 사람이 올 것을 알고 간 희생자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들은 손쉽게 군중 밀집이 예상된 곳에 왜 갔냐며 이태원 희생자들을 탓할 수 있었다. 이런 문제는 세월호 참사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이들에게는 참사 희생자는 피해자가 아니고 책임을 져야 할 개인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사고 체계를 따라가 보면 12월 3일 국회로 간 군인들도 모두 각자 책임이 있다. 윤석열의 말대로 ‘군이 부당한 지시 안 따를 거란 전제’라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 명령을 따른 지휘관과 수행한 군인 모두 각자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그리고 책임지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는 논리인데, 막상 채 상병 사망 사고의 부당한 외압을 거부한 박정훈 대령은 항명 혐의로 재판 중이다. 이 또한 개인 책임이다.

필요와 책임

이런 기이한 ‘책임론’이 가능한 이유를 굳이 더 파헤쳐 볼 이유는 없다. 우리는 세상을 혼자 살 수 없고, 가족, 친구, 직장,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 때문에 누구보다 ‘순수한 개인 책임’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 있고 상호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질병도 수많은 결정 요인의 결과로 먹거리, 주거 환경, 노동 조건, 공동체 등의 상호 관계 속의 결과다. 그래서 하물며 각자가 겪는 질병도 순순하게 개인 책임일 수 없다. 담배 회사나 주류 회사에게 책임을 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도 수많은 노동의 집결체다. 나는 진료하는 의사로 환자들에게 필요한 존재인 만큼, 환자들도 내가 일할 일터를 제공하고 내 생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상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서로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공동체와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책임을 질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책임 의식 결여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혹은 사람은 인격이 아니라 대상일 뿐이라는 감정에 대한 논리적 반응이다. 내 주변의 동료는 수단이고 내가 도움을 주기 때문에 남아 있는 대상들이라면 내가 책임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런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책임 의식을 잃어버린 영혼 없는 인간들의 사회가 조장된다.

윤석열과 그 일당은 자신의 배우자와 극소수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는지 모르겠으나, 사회는 물론 자신의 부하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이들을 아직도 지지하는 극우 정치에 호응하는 다수 시민이 있다. 윤석열을 단죄하고 그 일당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법적 책임만으로 극우 정치의 지지자들이 사라질까?

이들은 사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와 동료가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하는 사회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나 불평등의 원인을 야당 대표, 이주민, 좌파 등으로 대상화 할 수 있는 이유도 즉자적으로는 가짜 뉴스나 허위 의식 때문이겠으나, 심층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불필요가 촉발한 책임감 결여에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상호 존중과 필요가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되는 승자 독식, 각자도생의 사회가 만든 참혹한 의식이 극우 정치과 ‘윤 어게인’이다.

45년 전 비상 계엄을 재현하려 한 윤석열과 쿠데타 세력은 단순히 그 조직과 동원 물자 그리고 그 관계망만 발본색원한다고 완전히 제거되진 않는다. 상호 공존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길러진 한국 사회 엘리트들과 그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극우 엘리트들은 언제든 나타나고 권력 부근에 머무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개인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우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윤석열과 그 일당들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가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에 대한 필요를 책임의식으로 공유할 사회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형준

재활의학과 전문의,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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