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노래 꽃이 잎이 될 때
세상을 채우는 많은 소리들이 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협잡의 소리, 자기가 더 잘났다고 우기는 소리, 그런 귀가 아픈 소리 너머, 가느다란 하지만 희망찬 소리들도 있다. 다른 존재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들리는 새소리, 새잎이 모습을 드러내는 소리, 첫걸음을 내딛는 서툴고 설레는 발자국 소리, 이런 소리들은 커다란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온 땅으로 퍼져 간다. 그리고 퍼져 나간 소리는 생명을 주고 기쁨을 준다. 나에겐 부활의 소리 같다.
부활의 소리는 오월 같아서, 이제는 꽃을 떨구고, 그 꽃자리에 잎을 틔우고, 생명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 오월에는 생명을 묵상하게 된다. 저 꽃자리에 생명을 틔우는 잎을 보면서, 저만치 깊이 진 나무의 생명을 만난다. 거리를 산책하다, 가로수의 새로운 잎을 바라보며, 이 잎이 쓰게 될 역사를 경이롭게 상상한다. 그리고 저 새 생명들이 살아갈 세상이 조금은 덜 아프기를, 새 생명을 돌보는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 안식을 얻기를 기도하게 된다.
어쩌면, 아직도 내 마음은 꽃이 진 자리, 빈 무덤가를 맴돌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 분의 교황이 세상에 던진 생명의 메시지가 아직도 생생한 건, 그분의 메시지가 생명에 관한 것이었고, 가진 것 없는 자에 대한 위로였기 때문인 것 같다. 성모 대성당에 묻히길 원하셨던 교황님은 교황으로서 치르게 될 화려한 장례를 금지하셨고, 자신이 지니신 돈은 백 불이 채 안 되는 돈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신비로운 건, 떠나신 교황님의 메시지가 우리들 마음엔 더 새롭게 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는 방식도 이렇게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마음의 소리를 통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부활 기간 동안, 우리는 부활하는 예수님의 목소리,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그분이 평화를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젊어서는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뛰어다녔어도, 이젠 팔을 벌리고 내게 둘러지는 띠를 띠고, 누구가 되었던 그 누구가 원하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 시기가 된 제자(요한 21,18)에 대해 듣는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나를 부르는 곳, 나를 부르는 거친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음성을 듣는다. 이 새로운 소명의 시간은 분명 연꽃을 만나고 오던 그날의 기억으로 시작될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갈 길이 잘 보이지 않고, 내가 열심히 한 미션이 무언가 성과도 없으며, 바보짓을 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밤새 고기를 잡아도 한 마리 건져 낸 것이 없는 것 같은 회의감이 밀려올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불러오던 그 익숙한 사소함으로 "와서, 아침을 들라"고 하신다. 내가 참 좋아하는 부활 사화 중 하나인데, 연꽃을 만나는 순간이다. 밤새 일하고, 별 뾰족한 수확 없이 맞이한 아침에, 와서 일단 아침이나 먹고, 푹 잠을 자라고 하는 내 엄마의 목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활 사화에 나오는 예수님은 여성적이다. 거기다 직접 우리에게 다가와 빵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내어 주신다. 그러고 보니, 갈릴래아 근방의 식당에서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던 베드로라는 물고기도 생각난다.
그렇게 연꽃을 보고 가는 마음으로 그들은 공동체를 시작한다. 외로움과 소외, 그리고 서로를 돌보는 그런 공동체를 시작한다. 예수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이제 잎을 틔우는 그럼 시점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갔던 교회의 이야기를 듣는다. 부활 기간 동안 우리가 읽게 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생명이 시작되는, 신비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가꾸는 새로운 삶의 서곡이 시작되기 전의 고요한 움직임, 마치 나비가 날갯짓을 시작하는 그런 시점 같다. 이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더 깊이 알아가고 식별하고 따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 시점은 사랑받는 제자라는 꽃이 부활을 살아내는 잎새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새롭게 시작되는 공동체에는 성모님이 계신다.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모는, 교회를 건설하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성모시다. 그런 점에서, 5월에 우리가 성모님을 매일매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부활의 날에 생각하게 되는 성모는, 자신의 이해를 넘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아들을 사랑으로 키우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당신의 아들을 너무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일 뿐 아니라, 예수가 가신 모든 길을 함께하셨고, 이제 부활의 증인으로 제자들과 함께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길을 간 공동체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다. 부활 후, 그저 생존을 위해 다시 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간,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변변치 못하고, 또 지친 제자들에게 다가와, 아침을 준비하고 부르시는 어머니 같은 요한 복음서의 예수님에게서,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로서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만난다.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고, 소리 내지 않아도 진리는 퍼져 나간다. 그래서 나도 아카시아 꽃향기 바람에 날리는 오월 속으로 성큼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아침을 차려 주고 싶은 욕망을 발견한다.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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