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이들 돌보시는 하느님, 그 이름을 지은 ‘하가르’
이 글은 <공동선>(www.comngood.co.kr)에 함께 실렸습니다. - 편집자
아브라함의 두 후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취임식 전 가자 지구의 분쟁을 끝내라고 한 그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스라엘과 하마스 지도부는 극단적으로 치닫던 전쟁을 멈추고 휴전에 전격 합의했다. 이번 전쟁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마스 무장 세력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학교와 병원도 무차별 공습해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생겨났고, 가자 지구를 강제 봉쇄해 식량과 물, 전기 등 인도적 구호마저 차단하는 등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 학살하려 한다는 전쟁 범죄 혐의로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될 정도로 가혹하게 대응했다. 지난 15개월 동안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이 4만 7000명이 넘을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고, 특히 이 희생자 대다수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 특히 어린이와 여성, 노인이 60-70퍼센트에 달한다.
이런 잔혹한 전쟁을 말 한마디로 멈추게 했다니 트럼프의 영향력이 대단하긴 하구나 감탄하려던 찰나, 가자 지구 내 2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주민을 요르단과 이집트 등 주변 아랍 국가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 땅에 미국 소유의 휴양지를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막무가내 구상이 큰 충격을 안겼다. 국제법상 강제 이주는 전쟁 범죄며,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서 가자 지구에 평화는커녕 중동 정세에 더 큰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벌써 모로코와 소말리아 등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상대로 강제 이주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이 지역을 이스라엘이 독점하겠다는 구상, 어쩐지 수천 년 전 성경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이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이야기, 그들을 낳은 하가르와 사라의 이야기 말이다.
광야로 내쫓긴 여종 하가르와 이스마엘
유다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창세 17,5)인 아브라함을 공통의 선조로 여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을 고백하는 성경 전통에서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인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사악으로 이어지는 하느님 축복의 계보에 더 관심을 두기에, 하가르와 그의 아들 이스마엘 이야기는 주변적 이야기, 하느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이야기로 여기며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는 하가르와 사라의 관계를 옛 계약과 새 계약으로 비유하며, 여종인 하가르의 자식들은 노예고 사라의 자식들은 하느님의 약속에 따른 자유인이라며, 하가르를 부정적으로 그리기도 한다.(갈라 4,21-31 참조) 유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도 사라와 하가르의 관계는 정실부인과 첩 관계로, 이사악과 이스마엘의 관계는 적자와 서자・얼자의 관계로 여겨지며, 은연중에 ‘조강지처’인 정실부인과 적자에게 더 마음이 기울어지곤 한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아브람)은 하늘의 별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낳고, 가나안 땅 전체를 소유하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아내 사라(사라이)와는 팔순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다.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사라는 자신의 여종인 이집트 사람 하가르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었다. 분명 사라는 스스로 나서서 하가르를 후실로 들였지만, 막상 하가르가 임신하자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구박한다. 그 구박이 어찌나 심했는지, 하가르는 사라를 피해 광야로 도망친다. 자신이 아브라함을 유혹한 것도 아니고 여종으로서 주인의 명에 따라 임신을 하였건만, 본처의 질투와 원망을 고스란히 감내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집에서 뛰쳐나온 하가르는 광야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난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매정하게도 집으로 돌아가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전한다. 허허벌판 광야에서 임신한 여인이 홀로 생존할 수는 없었으리라. 주님의 천사는 곧 태어날 아기가 큰 민족을 이루게 되리라는 축복의 약속을 하가르에게 전하며,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창세 16,11)라고 말한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 하가르는 86살인 아브라함에게 맏아들 이스마엘을 낳아 준다. 사라의 구박은 여전했겠지만,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은 어머니로서 지위가 그를 보호했으리라. 99살이 된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 표징으로 할례를 받을 때, 13살이 된 이스마엘도 집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받는다. 그런데 이 계약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에 아들 이사악을 낳은 사라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창세 21,6)라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한다. 감히 여종의 아들이 자기 아들과 함께 상속받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어깨에 메고 쫓겨난 하가르와 이스마엘 모자는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을 차마 눈앞에서 보지 못하고 활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목놓아 우는 하가르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다시 나타나, 그 아이를 꼭 붙들라며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전하고, 우물을 찾게 해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살린다.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지은 여인, 하가르
인간 존엄이라는 주제를 두고 연구하는 성서학자 줄리아나 클라센스는 "여성, 존엄을 외치다"(분도출판사, 2021)라는 책에서 하가르의 이야기를 학대와 혐오, 빈곤 등 비인간적 상황에 내몰린 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그는 사라의 구박을 받고 도망치고, 또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굶주려 죽어 가는 하가르의 이야기는 백인들의 노예로 살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의 경험에서 너무도 친숙한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들로리스 윌리엄스(Delores Williams)나 레티나 윔스(Retina Weems)를 언급하면서, 처절한 빈곤과 박탈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을 주장하는 하가르의 저항에 주목한다.
하가르는 사라의 구박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을 때, 또 아들과 함께 내쫓겨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느님의 천사를 만났다. 하느님은 이집트 출신의 이방인이며 비천한 여종 신세였던 하가르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돌보신다. 클라센스는 하가르가 주인의 구박을 피하고자 도망친 행위, 죽어 가는 아이를 멀찌감치서 보며 목놓아 울부짖으며 흘리는 눈물이 하느님을 만나게 했다며, 하느님은 곤경에 처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분이라는 구약 성경의 중심 관점과 통한다고 해석한다.
한편, 필리스 트리블은 "공포의 텍스트"(도서출판100, 2022)에서 하가르가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같은 축복,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16,10)라는 약속을 받은 성경 속 유일한 여성 인물이며, 아들에 대한 예언을 들은 최초의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하가르는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느님을 “당신은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창세 16,13)라고 스스로 이름 지어 부른 놀라운 여성이다. 자신의 주인인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알려 준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구박받다가 도망친 이방인 여종마저도 돌보시는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면서 스스로 고백한 하느님의 이름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신학자들이 하가르의 신앙 고백을 통해 노예로 살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의 삶과 신앙 체험에 주목하듯, 오늘날 한국의 신학자들은 이 땅에서 인간의 존엄을 빼앗긴 채 고통받는 여성들, 이주 여성, 북한 이탈 여성 등을 하가르에 비유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들에게 인내와 희망의 용기를 주신다는 믿음을 하가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어 불렀다.
이사악도 이스마엘도 모두 축복하신 하느님
하가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느님은, 사라의 고통도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사악을 낳기 전까지 사라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이라는 사회적 지위는 있었어도,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으로 고통받는 여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노인이 되어 출산의 희망이 사라진 사라에게 이사악이라는 아들을 낳게 하여 큰 기쁨을 안겨 주신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받은 축복은 사라의 아들 이사악에게 이어졌고, 사라는 여러 민족이 되고, 여러 나라의 임금들도 그에게 나올 것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
하느님의 축복은 사라와 이사악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가르와 이스마엘에게도 같은 축복이 내렸다. 하느님은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고 그가 자식을 많이 낳아 열두 족장을 낳고,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다.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사라의 요구에 아브라함이 언짢아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이스마엘도 돌보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가르와 이스마엘이 쫓겨난 사건을 하느님의 버리심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민족을 세우는 또다른 약속으로 그리고 있다.
오늘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보고 있노라면, 이스라엘의 어머니 사라와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가르가 모두 죽어 가는 자식들을 지켜보며 애통하게 울부짖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느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구박하고, 내쫓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저마다 번성하며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이리라. 가자 지구가 분쟁의 땅이 아니라 두 나라가 각기 나라를 세워 서로를 인정하며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는 국제 사회의 권고처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평화의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미영
편집위원,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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