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잠깐 계십시오. 잠깐 볼일 보러 나갔다 오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과 헤어지지 않는 만남 이어 가자
누구에게나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그런 첫 만남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한참 전 교종 요한 23세와의 만남이 그랬고, 12년 전 프란치스코 교종과의 첫 만남도 그랬다. 그분과의 첫 만남은 참 강렬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 올린 그분의 사도 권고 ‘복음의 기쁨’(2013)은 어쩌면 나와 그분 사이의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자고 주고받은 정표(情表) 같은 것이었다.
처음엔 그 정표가 그토록 귀했는지 몰랐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 문헌의 제목만큼이나, ‘오늘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에 관해’라는 그 부제도 내게는 평이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포장을 뜯기 전, 제목을 클릭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꼼꼼하게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잠은 달아났고 결국은 밤을 새워 버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차례 울컥했고 또 부끄럽기까지 했다. ‘탈바꿈(transformation)’이나 ‘헌신(commitment)’ 같은 용어를 생각할 때마다 그랬고, 마침내 ‘사목 활동가가 직면한 유혹’ 부분에 이르러서는 정말 읽어 나가기가 괴로웠다. 그 제목이 ‘유혹’이어서 그렇지, 그 내용은 마치 어떤 선배, 어떤 벗, 어떤 형제가, 사랑하는 어떤 이가 나를 찾아와 마주앉아 준엄하게 꾸짖되, 한마디 한마디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마치 그분을 스토킹(과잉 접근)하듯이 거의 매일 그의 집(홈페이지)을 찾다시피 했다. 어릴 적 소풍으로 야외에 가서 보물찾기 하듯 곳곳을 뒤졌다. 그러면서 람페두사에서 거행한 미사 때 강론이나, 사르디니아에서 노동자들에게 행한 연설이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나, 여러 회칙과 권고, 칙서 같은 보물을 찾아냈고 그렇게 그분과의 만남은 12년을 이어 왔다.
그러는 사이 이상한(?) 버릇, 그 집에 있는 여러 방(여러 전임 교종들의 방)을 기웃거리며 그들을 만나는 버릇까지 생겨 버렸다. 그렇게 그분은 내게 다른 좋은 벗과 스승들을 소개해 주신 셈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좋은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참 고마운 분이시다.
이제 조만간 그 집 외관은 바뀔 것이고, 그분은 다른 분들과 함께 동그란 사진 안에 실려 첫 번째 방에 머무르실 것이다. 나는 수시로 그 방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릴 것이고 그분은 거기서 나를 맞이하실 터이니 우리가 헤어졌다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영어 ‘encounter’라는 어휘를 우리말로 옮길 때마다 어려움을 느낀다. 그냥 ‘만남’이라기에는 밋밋하여 억지로 ‘조우(遭遇)’란 말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우연히 서로 만남’이어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작정하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이 어휘를 대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가시던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그 장면들이 떠오른다. 분명 그분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여러 사람을 ‘우연히’ 만나셨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분과 헤어지지 않고] 그분을 따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encounter’란 어휘에는 그 ‘우연한 만남과 필연적 따름’의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억지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나와 프란치스코 교종 사이의 만남이 그런 ‘조우’이길 소망한다. 그래서 그분이 나의 여정에 ‘동반’, ‘동행’이 되기를! 그래서 이렇게 서로 인사할 수 있기를. ‘여기 잠깐 계십시오. 잠깐 볼일 보러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게!’ 하고.
박동호 신부(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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