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살아 있는 사람, 삶이 아름다운 사람 - 두봉 주교님을 기억하며

2025-04-21     정희완

죽음은 그 사람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그의 빈자리가 차지하는 무게와 크기가 클수록 아쉬움은 더 깊어진다. 나에게 두봉 주교님의 죽음이 그러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주교님과 개인적으로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신학교 교수 생활을 끝내고 안동으로 돌아왔을 때, 주교님께서 만나자고 해서 몇 시간 대화를 한 것이 전부였다. 교구의 공식 행사들과 매년 여름 봉양마을에서 거행되는 주교 서품 기념일 축하식에서 주교님을 뵙고, 일종의 공식적인 말들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주교님과 같은 교구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은퇴 후에도 당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또 교구 행사에서 그분의 소박하고 정직하고 살아 있는 말들을 듣는 일은 작은 즐거움이었다. 쇠락하는 느낌이 드는 오늘의 한국 교회와 우리 교구의 현실 가운데서 그분의 말과 삶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담백하고 잔잔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두봉 주교님에 대한 강한 기억은 신학생 시절이었다. 사실, 신학생 시절에는 주교님과 꽤 많은 시간 속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교구 신학생이면 방학 때마다 주교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그 시절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 방어전’이라고 불렀다. 햇병아리 신학생들이 교구장 주교님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의무 면담에서 우리가 형식과 격식과 예식의 말들보다는 정직하고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말들을 하기를 주교님께서는 늘 원하셨다. 의례적이고 상투적이며 진부한 말들은 고민하지 않고 또한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주교님은 생각하신 것 같다. 그 시절 주교님께서는 교구 신학생들에게 온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살아가기를 요청하셨다. 신학생들에 대한 강한 요구들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주교님께서 당신의 말과 삶으로 늘 먼저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승복할 수 있었다.

신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주교님께서 교구청에서 당신과 함께 지내 보자고 요청하셨다. 그 당시 교구 신학생들은 다양한 현장 체험을 해야 했다. 나에게 주어진 현장 체험의 장은 교구청과 주교님 자신이었다. 두 달 동안 교구청에 살면서 주교님을 가까이 지켜 볼 수 있었다. 교구청 일정 때문에, 주교님과 단둘이 식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주교님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건방지게 표현하면, 그 시절 우리는 일종의 대화 친구였다. 서로의 속생각을 거침없이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주교님은 솔직하셨다. 주교님은 형식과 가식의 말들을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감 없이 나에게 말하셨다. 지금 돌아보면, 봉쇄 수도원의 수녀님들께 고백 성사를 주시고 난 후의 실망감과 봉쇄 수도원에 대한 당신의 솔직한 생각들, 여자 교사가 결혼하면 교사직을 떠나야 하는 당시의 학교 사정들에 대해 다소 전통적이었던 주교님의 입장들, 당신의 후임 주교 선출을 둘러싼 주교단의 속사정에 대한 실망과 분노 등이 기억난다. 주교님은 현실을 숨기지 않으셨다.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바로 그 현실의 토대 안에서 복음적 해결을 모색하셨다.

젊은 시절 두봉 주교 모습. (사진 출처 = KBS News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생각, 성찰, 대화

생각을 잃어버린 사회다. 생각과 성찰보다는 감정과 욕망이 앞선 시대다.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사유는 사라지고 왜곡된 신념들만 광장에 난무한다. 타자가 공존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경쟁 상대로만 여겨진다. 타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와 분노 감정이 사회에 가득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과 공동선에 대한 식별보다는 내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에 대한 계산과 판단이 더 중요하다. 이기주의적, 물질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다.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대화를 나눌 수 없고, 대화를 나누지 못하면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렵다. 교회는 살아 있는 말들의 공동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우리가 살아 있는 말들을 나누지 못한다면 말씀의 공동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말들을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하고 성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말들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살아 있는 말이란 단순히 화려하고 유려한 말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말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사실, “종교적인 말은 매우 독특한 유형의 진리 진술”이다. 종교적 “진리 진술에 있어서 참은 내가 하는 말로 그 말을 듣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다.”1) 사제는 말씀의 선포자다. 사제의 말들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두봉 주교님은 당신의 말과 삶으로 보여 주었다.

정체성에 관한 질문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기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사는 사람과 그냥 사는 사람은 다르다. 물론 우리 생의 대부분은 그냥 살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예민한 태도로 살아갈 때 아름답다.

두봉 주교님은 우리가 사제와 사목자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또 그 정체성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사제가 단순히 직업적 종교인, 종교 관리자로만 살아간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 사제가 누구인지, 사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관한 질문과 성찰을 던지며 사는 일은 중요하다.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성찰이 정체성 확보를 더욱 가능하게 한다.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칠 줄 아는 사제직, 신앙을 양성하는 교육자로서의 예언자직, 통치와 관리가 아니라 헌신과 봉사의 왕직에 충실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질문과 성찰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때 사제는 사제다운 존재가 되어 갈 것이다.

지난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난 두봉 주교의 영정 사진. (사진 출처 = KBS News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사명을 의식하고 목적을 지향하는 삶

삶의 목적이 있을까. 그저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모든 삶은 저마다의 목적과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것에는 분명 그 어떤 목적이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목적을 이루고 지향하기 위한 사명이 존재한다.

두봉 주교님께서 신학생 시절 면담할 때 자주 들려주었던 성경 구절이 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1코린 9,26) 사제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사제의 사명이 무엇인지 늘 기억하고 그것을 잘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라고 늘 요청하셨다.

사제 삶의 목적과 사명은 분명하다. 복음화 또는 하느님나라의 구현이다. 선교와 사목의 모든 행위는 결국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위해서다. 물론 그 완성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단지 참여할 뿐이다. 사제와 교회의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 늘 상기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단순히 성사 집전자와 본당 관리자로 살아가는 것은 차이가 있다. 본질적 사명을 의식하고 근본적 목적을 지향하는 자세와 태도가 사제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거듭 절감한다.

세상은 점점 어두워지고 교회마저도 점점 길을 잃은 모습이다.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과 물질적 기쁨에 몰두하고, 교회와 신앙인에게서도 복음의 기쁨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이다. 하느님이라는 말과 개념은 광장에서도 자주 들려오지만, 정작 교회와 신앙인에게서도 하느님의 성사적 현존을 잘 찾기 어렵다고 말하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신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힘으로써 버려진 것이다/ ···· / 신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계곡 아래 희미한 불빛들만 위태롭게 깜박일 뿐”.(나희덕의 시, '카즈베기에는 저녁이 오고'에서)2)

사람이 성사이며 징표다. 사람은 말, 자세와 태도, 살아가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말이 살아 있고 삶이 아름다운 사람이 더욱 그리운 시절이다. 두봉 주교, 김장하 선생, 문형배 재판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길 희망한다.

1)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 트뤼옹, "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이세진 옮김, 복복서가, 2025, 112-114.
2) 나희덕, "시와 물질", 문학동네시인선 229, 문학동네, 2025, 62-63.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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