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자유가 내란 일으켰다
자유-민주-평화의 관계에 대해
이 글은 <가톨릭평론> 47호(2025년 봄, 우리신학연구소)에 실린 글입니다.
빛바랜 언어, 자유민주주의
윤석열 검사가 대통령이 된 뒤 공식 석상에 설 때마다 빈번히 내뱉던 말이 있다. ‘자유’다. 자유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현되는지 쉽사리 규정하기 힘든 광활한 세계지만, 그는 자유라는 말을 너무 쉽게, 그것도 아주 좁은 의미로 썼다. 일제 강점기나 독재정권 시절이었다면 결기에 찬 저항적 언어처럼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유라는 말을 도리어 그 반대편 언어처럼 썼다. 많은 국민이 딱히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지 않는데도 그는 자유를 남발하다시피 했다. 아주 값싼 언어로 만든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자유와 민주를 동일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에게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평등 지향적 복지, 균형을 위한 나눔 등은 개인의 자유를, 특히 가진 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의 공정은 ‘가진 이가 어쩌다 베푸는 시혜’ 정도였고, 상식도 자유지상주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균형과 복지를 위한 제도적 분배를 ‘공산전체주의자’의 행위처럼 프레임화하면서, 국민에게 특정 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 주려 했다. ‘반자유주의적’ 야당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야당에 동의하는 많은 국민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다.
급기야 ‘공산전체주의자들’을 척결하겠다며 은밀히 모의한 끝에 불법 계엄까지 선포했다.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국회를 장악하고 반대 세력을 ‘숙청’하려 시도했다. ‘헌법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면서 도리어 전에 없던 헌법 유린 사태를 일으켰다. 그러다 더 큰 자유를 상상할 줄 아는 국민과 국회가 내란 혐의로 그를 구속했다. 그가 무수히 내뱉었던 자유가 자신에게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불행한 사태의 내면에는 윤석열 개인의 왜곡된 자유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이었고, 그의 자유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기회에 자유와 민주의 개념을 정리하고, 자유와 민주의 지향점인 평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민주와 자유, 헌법적 표현들
대한민국헌법(1987년 개정본)에는 민주주의와 관련해 두 가지 표현이 나온다. 그 하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라는 정치적 정체성 규정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한다”(전문)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다”(제4조)는 정체성 구현 자세다. 이 둘을 연결하면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정체성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구현된다는 뜻이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으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민주공화정으로 각각의 ‘자유들’을 보장하면서도 그 자유들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 다른 말로 하자면 평화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의 평화 정신
‘평화’라는 말은 헌법 전문에 한 번, 본문에는 5개 조항에 걸쳐 여러 번 나온다. 전문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항구적인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다고 광범위하게 규정한다.
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제4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제5조 1항),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지닌다”(제66조 3항),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노력하고 수행할 것을.... 선서한다”(제69조), “평화통일 정책의 수립에 관하여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제92조 1항) 요약하면,헌법의 평화 정신은 ‘세계평화’와 ‘평화통일’이라는 핵심어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평화, 특히 전문에 담긴 ‘항구적인 세계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그친 상태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좁은 의미에서 평화는 전쟁과 같은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갈등을 줄여 궁극적으로는 폭력이 없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평화는 다양한 입장들이 충돌과 갈등을 넘어 서로 조화하면서, 개인이 존중받고(개인적 평화) 집단이 조화로워지는(사회적 평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헌법에서는 국내에는 물론 전 세계에도 이런 평화가 계속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민주공화정과 자유민주주의
이런 평화가 가능하려면 국내 정치가 민주적이어야 하고, 세계와 민주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헌법에서는 이러한 민주 정치를 ‘민주공화정’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민주공화정은 국민 스스로 주권자가 되어 자신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선출자와 국민 모두 동일한 법적 통제를 받으며 스스로를 지배하는 정치 형태다.
국민이든 선출된 정치인이든 원칙적으로 동일한 법적 통제 아래 있다. 이 법은 원칙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자유와 평등을 해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재에 의한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해 ‘자유민주주의’라는 복합어가 생겨났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무한히 허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흔히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북한식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민주’보다 ‘자유’를 더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 경쟁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선호하곤 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의 핵심은 민주주의에 있다. 자유도 개인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다. 민주주의 국가는 주권을 국민에게 두고, 자유가 국민 전체에게 공정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통제 장치를 두고 있다. 방임적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보장하되 타자의 자유를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적 가치로 제한하는 자유다. 민주공화정은 그런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 체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종종 자유와 민주의 관계를 오독하곤 한다.
윤석열의 진영 논리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은 법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수백 번도 더 외쳤지만, 헌법 제1조에 담긴 ‘민주공화국’·‘민주공화정’이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윤석열이 셀 수 없이 반복한 자유민주주의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기득권 중심적 자유, 그런 자유에 종속된 민주였다.
2022년 9월 세계 각국의 대표자들이 모인 유엔 연설에서는 그는 "자유가 위협받고 있으니 자유의 이름으로 연대해야 한다"며 자유를 21번이나 외쳤다.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할 때의 자유는 사회주의에 대립적인, 진영 논리에 입각한 이념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자유를 반공과 동일시하며 이렇게 말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 운운하는 옛말을 꺼냈을 때, 그의 자유는 세계와 한반도를 이념적으로 편 가르기 하면서 사회주의에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상대적 가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내내 이런 식의 자유만 내세웠다. 이러한 자유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한국에서의 자유와 미·일
한국에서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자유를 좋아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에 모두의 자유를 보장하는 더 성숙한 자유의 경험을 더 해야 하며, 그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도 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주의자들은 6·25전쟁의 영향 속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대항 개념으로 자유주의를 내세운다. 평등 지향의 복지 같은 것은 개인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한다. 기득권이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자유 개념에 더 익숙하다. 이렇게 ‘자유’라는 말은 동일하지만, 그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이 두 가지 자유론은 한국이 서양식 근대의 물결을 수용하는 과정에 동시에 나타났다. 물론 현실에서는 후자 쪽 자유론이 우세했다.
후자 쪽에 가까운 이러한 자유 개념을 한국에 소개한 선구적 매체는 19세기에 창간한 <독립신문>(1896. 4.7-1899.12.4)이다. <독립신문>의 자유론은 ‘개인’이 경제 활동으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에 따른 사유 재산을 한 권리로 보장하는 것, 즉 개인의 사적 ‘재산권’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19세기는 서구에서도 유산 계급이 부상하고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가 자리 잡아가면서 재산권을 자유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한국의 개화주의자들도 개인의 재산권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 개념을 개화의 척도로 삼았다.
이런 자유론을 한국 사회에 이식하고자 한 이들은 대체로 일본 및 미국과 가까운 개화주의자들이었다. <독립신문>을 발간한 주도 세력이 미국 시민권자인 서재필,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견문을 넓힌 윤치호 등이었고, 역시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한 이승만 등이 필자로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구미가 선도하고 일본이 따라가는 새로운 문명이 중요한 기준이었다. 무엇보다 개인의 재산권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 개념을 민족이나 국가주의보다 큰 가치로 여겼다. ‘독립신문’이라는 제호가 중국(청淸)으로 상징하는 구체제에서 독립한다는 취지로 지어진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이 신문은 조선보다 앞선 개화로 서구식 근대의 문을 열어 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보수적 자유와 기독교
개인의 이익 추구와 재산권 보장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는 필연으로 경쟁으로 나타나고,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이런 경쟁적 자유는 이론으로는 사회진화론으로 정당화되고, 국가 단위에서는 식민 지배나 제국주의적 사고로 이어진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런 과정을 비교적 자연스러워한다. 유길준이나 윤치호도 <독립신문>에서 역사는 미개에서 개화로,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한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펼쳤다. 그 문명의 기준은 멀게는 서양이었고, 가깝게는 일본이었다. 이완용은 경쟁에서 밀린 조선보다 경쟁에서 앞서 서양식 문명을 이루던 일본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들에게 서구식 문명의 증거로 여긴 새로운 현상은 기독교였다. 기독교인이던 윤치호는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구라파의 일등 국가들이 착실히 믿고 있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가 조선의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구한말 개화파를 통해 뒷받침되기 시작한 이런 기독교 우월의 논리는 100여 년 이상 교회들을 통해 전승되어 왔다. 이로써 기독교를 서구식 문명의 척도처럼 여기는 흐름을 만들었고, 기독교인이 되어야 미국인처럼 부유해진다는 생각을 확장시켰다. 그 영향을 받은 이들은 경쟁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물질적 풍요를 신앙의 실천처럼 여겼다.
이런 흐름은 100년도 더 지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이 재산권을 중시하는 개인적 권리로서 자유를 내세우고, 기독교회가 이런 자유 개념을 견지하면서 배타성을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문제는 이런 개인의 자유가 현실에서는 타자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구분했다. 소극적 자유는 ‘외부의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상태’ 혹은 ‘내 의지나 행동에 누구도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상태’로서 자유이고, 적극적 자유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태’로서 자유다. 적극적 자유는 자칫 소극적 자유를 침범할 수 있고, 권력자가 자유를 적극 내세우고 정당화하면서 전체주의로 이어질 위험도 있으니, 소극적 자유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현실에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누구도 나에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도 누군가에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은 서로 누군가에게 개입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긍정적 측면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할 도리밖에 없다. 그래야 자유라는 이름의 부당한 개입, 나아가 타자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지 않거나 덜 일어난다. 자신을 통제하면서 타자의 자유를 존중할 때 자신의 자유도 확보된다. 만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면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법의 통제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적 자유의 원리이자 자유가 적용되는 방식이다.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
모든 국민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자유를 충실히 누리기 위해서라도 서로를 인정하고, 적절히 견제하며, 제한적이나마 법 통제를 받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도 ‘민주공화적’ 질서와 상호 순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든 공화든 민주에서 서로 만나며 순환한다. 이러한 공통의 민주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민주주의는 갈등하는 양자의 상위에 있으면서 대립을 넘어 서로 살려주고 포섭하는, 더 보편의 타협적 가치를 지향한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양자 긍정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더 상위의 가치를 함께 찾아내야만 한다. 그 상위의 가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평화’다. 서로를 죽이는 공멸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상생, 그 과정이 평화다.
백범 김구가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라는 말을 했다.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란 각자도생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전체 상생을 위한 자유다. 저만의 눈요기를 위해 꽃을 꺾지 않고, 모두를 위해 공원에 꽃을 심을 줄 아는 자세가 성숙한 자유의 표현이다. 자기 조절과 헌신이 더 큰 자유를 만든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정말 자유민주주의다우려면 그런 자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는 대립의 조화 과정을 겪으며 계속해서 추구해가야 할 과제다.
좌·우 합작의 평화주의
일제 강점기에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백범 김구는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김원봉과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 운동을 함께하기도 했다. 더 큰 자유를 위한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좌·우 합작’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대통령은 이 헌법을 수호할 최고의 책임이 있는 자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고서 자기만을 위해 공원의 꽃을 꺾고 말았다. 만일 모든 이가 꽃을 꺾어 제 집안 화병에 꽂아 두려 한다면, 공원의 꽃은 이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모두가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유도 그렇다. 자기만을 위한 혹은 자기 편만을 위한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가 아니다. 자유는 스스로를 제한하면서 모두를 위해 성심껏 꽃을 심는 데서 그 본연의 가치가 빛난다.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인 한, 그것이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와 대립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필요하다면 사회주의까지도 포섭하면서 이념 갈등을 넘어 상처를 줄이고 조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지속적 과제다.
그 과정을 ‘평화’라고 한다. 평화는 소극적 언어를 쓰면 상처와 갈등, 즉 폭력 같은 부정적 가치를 축소하는 과정이다. 적극적 언어를 쓰면 공평과 조화 등 긍정적 가치를 확대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정치 제도가 민주주의다.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를 겪었던 유럽에서 ‘민주평화론’ 연구가 활발했던 것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신뢰에 근거한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자기의 자유를 내세워 타자의 자유를 억압하려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질서도 흩어놓고, 힘에 의한 평화만을 내세우다가 상대방과 더 심한 적대관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남에게 법을 적용할 줄만 알았지 자신은 법의 통제를 받아본 적이 없고 받을 생각조차 없었던 이는, 결국 자기의 모순과 한계를 스스로 폭로하는 대가로 국가를 극도의 혼란으로 내몰았다. 남의 자유를 강제로 제한하려던 반헌법적 내란 행위는 가까스로 멈춰 세웠지만, 사회는 더 양극화되었다. 자신을 위한 일시적 달콤함에 취해 남도 죽이고 결국 자신마저 죽이는 마약 같은 자유는 더 이상 안 된다. 왜곡된 자유가 민주와 평화를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우리는 윤석열을 통해 너무나 절실하게 배웠다.
이찬수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보훈교육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신학, 불교학, 철학을 중심으로 이십여 년 종교학을, 십수 년 평화학을 강의하고 연구했으며, 아시아종교평화학회를 창립해 부회장으로 봉사하면서, 가톨릭대에서 평화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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