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길 잃은 폭군
현대인을 위한 칠죄종
이 글은 <가톨릭평론> 47호(2025년 봄, 우리신학연구소)에 실린 글입니다.
분노, 네 번째 죄종(罪宗)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한 흥분과 영혼의 동요다. 분노는 영혼을 온종일 성나게 하지만, 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수도승들을 죄로 이끄는 악령 혹은 나쁜 생각 가운데 분노를 네 번째에 놓는데,2)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실제 생활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마귀들 가운데 처음의 셋은 탐식의 욕정을 맡은 것, 돈에 대한 갈망을 제안하는 것, 인간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다른 마귀들은 모두 이것들 뒤에 따라오면서 이것들에게 상처 입은 사람들을 공격한다. 탐식으로 넘어진 뒤가 아니면 음란의 영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일이 없고, 음식과 재물 또는 영광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분노에 넘어질 일도 없다. 이러한 것들을 빼앗기거나 얻을 수 없었던 이들은 슬픔의 마귀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가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고 한 솔로몬의 말이 맞다면 모든 악의 뿌리인 돈에 대한 사랑을 근절하지 못한 사람은 마귀들 가운데 첫아들인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컨대 제일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것들에게 먼저 상처받지 않는다면 사람은 다른 마귀를 만날 일이 없다."3)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점차 허영, 교만과 같은 정신적인 것들로 이어지는데, 분노가 네 번째 자리에 있다는 것은 탐식, 음란, 탐욕과 같이 인간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분노가 생겨남을 뜻한다.4) 다른 말로 하면 분노는 즐거움, 쾌락과 연관된다. 찾고 있는 쾌락에 이를 수 없어서 고통을 겪을 때나, 지금껏 누리던 쾌락을 빼앗기거나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울 때 분노가 태어난다. 그때 분노는 괴로움의 원인이라 여기는 것, 아니면 최소한 그런 위협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항한다. 그런데 교회 전통은 이 분노 역시 쾌락의 한 형태로 본다. “분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충족시켜야 하는 일종의 쾌락으로 변한다. 그렇다. 이 마음의 불타오름에는 일종의 쾌락이 없지 않아서 다른 어떤 쾌락보다도, 마음에 더 강한 폭군이 된다.”5)
서울서부지법 폭동
2025년 1월 19일 새벽, 극우 세력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침탈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윤석열 대통령 체포 집행과 구속 영장의 실질 심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이었다. 윤석열 지지자들은 그 전날 구속 영장 심사를 진행하던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공수처 차량 2대를 포위하고 차 유리와 타이어를 파손했다. 일부는 경찰과 기자를 폭행하고 일부는 담을 넘어 법원에 침입하기도 했다. 19일 새벽 구속 영장이 발부되자 분노한 시위대는 경찰 저지를 뚫고 법원 정문과 유리창을 깨부수며 법원 내부로 진입해 영장 발부 판사를 찾았고 기물들을 파손했다. 이 폭동 사태로 가담자 86명이 체포되었고, 경찰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이들 가운데 20, 30대가 46명으로 가장 많다고 밝혔다.6)
우리 현대사 초유의 사태인 이러한 폭동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분노가 바라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폭동에 가담했다 체포된 이들 중 20, 30대가 과반에 이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폭동의 씨앗은 우리 사회에 내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 능력과 삶이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 버린 현실에서 현대인들은 소유와 존재를 등치하며 살아간다. 탐욕을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적 죄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리고 원하지만 더 가질 수 없을 때, 상대적으로 더 가진 사람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하게 된다. 이러한 분노가 기성세대보다는 아직 사회에 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 세대 사이에 더 많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세계화는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많은 이는 몰락하는 한편에 속하지 않기 위해 살인적인 무한 경쟁에 혼신을 다하게 되었으며, 이미 몰락한 이들은 상승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채 무력감과 좌절감을 안고 살아간다. 한데 그것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사람들 은 일상에서 매우 폭력적인 존재가 되었다.7)
분노, 사람을 맹목으로 만드는 힘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쓰여 있는 대로 분노는 의로움을 행하지 못하게 한다. 분노한 정신이 판단을 흐리게 하여 분노가 제안하는 것이 다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화를 잘 내는 자와 사귀지 말고 성을 잘 내는 사람과 다니지 마라. 네가 그의 길에 익숙해져 너 스스로 올가미를 써서는 안 된다’라고 쓰여 있는 대로 분노는 사회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잃게 만든다. 이성으로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이는 그저 짐승처럼 살게 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일치를 파괴한다. ‘분노한 사람은 아수라장을 만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죄들을 끌어낸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화내는 사람은 죄들을 이끌어 낸다. 화는 악한 자들까지도 더 악하게 만들어 분별 없이 불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노가 정신의 평온을 휘저으면 성령께서 그에게 머무시는 것을 막고,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공허하게 되어 즉각 광기를 드러내게 되며 제 생각들의 깊은 근원들이 뒤집혀 표면적인 생각으로 살게 된다."8)
분노는 공격성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안을 향하게 될 때는 자신을 파괴하고, 바깥을 향하게 되면 이번 서울지법폭동에서와 같은 도를 넘은 폭력으로 비화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적 판단을 무력화시키는 분노의 맹목성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맹목성을 부추기는 것이 누리소통망의 역기능이다. 수동적인 정보 소비자를 능동적 정보 생산자와 배포자로 바꾼 누리소통망이 기대와 달리 덜 개방적이고 덜 민주적이라는 점은 이제 분명해졌다.
정보는 미국 대기업 두 곳의 비밀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페이스북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중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아늑한 정보 여과 현상으로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다. 반대쪽 사람들이 감히 우리에게 말을 걸면, 그들이 우리가 신성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화를 내면, 우리는 그들을 ‘트롤’(악플러)이라고 부른다. 페이스북이 우리 사이에 투명 벽을 높이 쌓는다면 구글은 벽 양쪽을 검증되지 않은 콘텐츠로 채운다. 구글은 스스로를 정보의 진실성을 중시하는 결정권자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입수할 수 있는 것을 드러내는 플랫폼으로 여긴다. 이런 관점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주의가 열역학 제2법칙만큼이나 타당하다. 그 결과로 ‘가짜 뉴스’가 현대 민주주의 생활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었다.9)
중국인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선거 부정이 벌어졌다든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하는 행동은 저항권이라든가 하는 가짜 뉴스에 현혹된 이들은 이런 주장들을 온라인 공간에서 공유하고 확산시키면서 분노의 대상을 찾게 된다.
분노, 타인과 맺는 왜곡된 관계
분노한 사람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이지만, 분노에 사로잡히면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기쁘게 수용하지 못한다.10)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를 사목적 어조로 이렇게 풀어낸다.
"분노는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악덕입니다. 타인들의 다름, 특별히 그들의 선택이 우리 선택과 다를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가마솥 안에 던져 넣습니다. 다른 사람, 있는 그대로의 타인이 분노와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의 목소리, 의미 없는 일상의 몸짓, 그가 생각하는 방식들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11)
이런 면에서 분노는 타인과 맺는 왜곡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분노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기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라면,1) 탐식이나 육욕, 탐욕과 같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존재와 등치되는 상황에서 사람은 내가 못 가진 것을 가진 사람이나 내 것을 위협하는 사람을 적으로 상정한다. 이렇게 사람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고 더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른바 혐오 범죄나 증오 범죄라 부르는 범죄가 그것이다. 2016년 5월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에 대한 증오 범죄의 예다. 피고인은 “내가 여성들로부터 여러 피해를 당했지만 참았는데, 최근에는 일까지 못하게 되는 등 직업적으로 피해를 입어서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느꼈다. 이렇게 있다가는 내가 죽을 거 같으니, 내가 먼저 죽여야겠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인터넷 기사를 토대로 하여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증오 범죄를 분석한 결과, 피해 집단은 외국인, 여성 및 다문화 가정, 그리고 장애인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성애자에게 욕설을 하는 등 증오적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2)
분노의 본질을 잘 보여 주는 사막 교부의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수도원에 형제가 하나 있었는데 쉽게 화를 내곤 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혼자 생각하기를 ‘이곳을 떠나 혼자 지내야겠다. 그러면 누구와도 관계할 일이 없을 것이고 분노할 일도 없겠지.’ 그는 수도원을 떠나 외딴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 혼자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물항아리에 물을 채워 땅에 놓았더니 항아리가 넘어져 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다시 물을 채워 세우려 했더니 다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세 번째로 물을 채워 땅에 놓으니 또 넘어져 버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항아리를 들어 내팽개쳤다.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는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마귀가 자기를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아, 나는 고독한 삶으로 물러나왔지만 (마귀에게) 공격을 당했구나. 공동체로 돌아가야겠다. 어느 곳에서나 싸워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그는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13)
분노가 찾아올 때 살펴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참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싸움을 할 때 필요한 힘은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올바른 분노
본래 분노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영혼 안에는 분노의 힘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힘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 능력은 인간이 악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악의 공격에 맞서 싸우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 분노의 힘은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정념부를 가리키는데, 플라톤의 영혼삼분설에서는 ‘기개부’에 해당한다. ‘악에 맞선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플라톤의 ‘기개’라는 이름이 더 적합한 것 같기도 하다.14) 교부들은 플라톤을 이어받아 인간의 정념부가 악에 맞서는 힘이라 보았다.
"공격성, 분노, 미움 등의 힘은 죄에 저항하려는 하나의 목적으로 경비견처럼 문을 지켜야 한다. 이 경비견들은 인간 내면에 덫을 놓아 하느님께서 주신 보화를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는 강도, 원수에 맞서 제 힘을 사용한다."15)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을 들어 보자.
"분노가 올바른 정도로 표출되는 것은 때로 좋은 일입니다. 불의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 사람, 약자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깊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사람일 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일 수는 더더욱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가 있습니다. 단순한 분노라기보다 내적인 움직임, 거룩한 분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생애 동안 여러 번 이런 것을 보여주셨습니다.(마르 3,5 참조) 그분은 결코 악에 악으로 응하지 않으셨지만 당신 마음속에서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셨습니다. 성전 상인들 앞에서 그분은 강한 예언적 행동을 하셨는데 이는 분노가 아니라 주님의 집을 위한 열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마태 21,12-13 참조)"16)
우리 사회의 특징이라 할 탐욕을 거슬러 부가 더 정의롭게 분배되도록 하려는 노력,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려는 열정, 자기 생각을 강화할 뿐인 매체 환경에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려는 지향에 분노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 요컨대 주님의 집, 하느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싸움에 거룩한 분노가 필요하다. “가장 위대한 영광의 호칭은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쟁을 죽이는 것이고, 전쟁이 아닌 평화로써 평화를 유지하거나 준비하는 것입니다.”17)
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67쪽.
2) 에바그리우스는 ‘분노’와 ‘슬픔’의 순서를 경우에 따라 바꾸기도 한다.
3)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악한 생각", 1.
4) 에바그리우스는 인간의 영혼을 세 부분, 즉 이성부(loghistikon)와 정념부(tymikon), 욕망부(epitymetikon)로 나눈다. 이는 그리스철학 특히 플라톤에게서 온 것인데, 영혼의 이성부는 존재 혹은 실존과 관련되며 여덟 가지 악령 가운데 ‘헛된 영광’과 ‘교만’이 공격하는 부분이다. 정념부는 마음과 관련된 유혹, 곧 ‘슬픔’ ‘분노’ ‘아케디아’가 공격하는 부분이며, 욕망부는 육체와 관련된 유혹인 ‘탐식’과 ‘음욕’과 ‘탐욕’이 공격하는 부분이다. 허성석, '프락티코스에 대한 해제', "프락티코스"(분도출판사, 2011), 35쪽.
5)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사제직", III, 14.
6) '2025년 서울서부지방법원 습격', 2025.2.22.
7) 김진호, "극우주의와 기독교"(홀가분, 2024), 30-31쪽.
8) 대 그레고리우스, "욥의 도덕", V, 78.
9)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친애하는 융커위원장에게', 지그문트 바우만 외, "거대한 후퇴"(살림, 2017), 328-329쪽.
10) 황인수, "칠죄종, 일곱 가지 구원의 길", 성바오로출판사, 2019, 113쪽 참조.
11) 교종 프란치스코, 2024년 1월 31일 강론.
12) 윤종행, '증오범죄의 동향과 대책', <서울법학> 31권(2호)(2023.8), 144-147쪽 참조.
13)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VII, 33.
14) “예컨대 욕구가 어떤 사람에게 이성을 거슬러 행하도록 강요할 때, 그 사람이 스스로를 꾸짖으며 서로 다투는 둘 중 어느 한편을 두둔하듯 이성의 편에 서서 그런 강요에 분개하는 경우 말일세.” 플라톤, 박문재 옮김, "국가", 현대지성, 2023, 440b쪽.
15)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동정론" XVIII, 3.
16) 교종 프란치스코, 2024년 1월 31일 강론.
17) 아우구스티누스, 서한 229,2.
황인수
성바오로수도회 사제. <가톨릭평론> 편집위원. 책 읽기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며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사는 것과 배우는 것, 노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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