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자리, 더 잃을 것도 없는 곳에서
[함께걷는예수의길]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38) 복음 묵상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겸손과 희망의 메시지로 읽는다. 높은 자리일수록 겸양의 덕을 갖춰야 한다고 마음에 새기거나,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될 때 꼴찌 자리가 첫 번째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찾으며 위로를 얻곤 한다. 하지만 본문을 더욱 깊이 바라보면 이 해석 너머에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카파르나움에 이르던 길목에서 예수는 “죽임을 당했다 살아나리라”(마르 9,31)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듣고도 모른 척하였거나, 그저 단순한 경고성 훈계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닥쳐올 수난보다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제자들은 어떤 이들이었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직업도 가족도 버린 채 유랑 설교자 예수를 따라나선 이들이다. 부귀와 명예, 개인의 성공만을 기준으로 “큰 사람”의 됨됨이를 셈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보다는 불의하고 억압받는 세상을 뒤집을 힘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가 그런 막강한 권력자로 등극할 줄 믿고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의 태도는 일견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힘이 있어야 세상에 이로운 일도 벌일 수 있고, 영향력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무언가 내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분은 지금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죽음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 제자들을 바라보며 복잡하고 안타까웠을 그의 눈빛이 떠오른다. 거대하고 희망찬 꿈을 꾸고 있는 그들에게 당신의 선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분의 행동을 보자. 뜬금없이 어린아이 하나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신다. 그 작은 아이를 껴안으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9,37) 지위와 권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물론, 타인의 돌봄과 보호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 순위와 서열 시스템 변두리에 있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 9장 35절은 단순히 겸손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기회가 올 것이니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메시지도 아니다. 오히려 “큰 사람”의 의미, 세상의 힘과 권력, 반전의 성공이라는 개념 자체를 뒤흔드는 말씀이다.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얻는 첫째 자리, 강한 자만 살아남는 싸움 자체를 무력화하는 선언이다.
“첫째”와 “꼴찌”라는 말로 번역된 그리스어를 살펴보면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protos)는 줄의 맨 앞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시작과 기원을 뜻한다. 프로토스를 점한다는 것은 권력과 명예를 가진다는 의미이며, 규칙을 정하고 성공을 정의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할 특권을 가진다는 의미다. 꼴찌를 의미하는 ‘에스카토스’(eschatos)는 그 반대편에 있다. 단순히 마지막이라는 의미를 넘어, 공간적으로는 가장 멀리 떨어진 극한의 장소를, 시간상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는 마지막 때를, 물질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로 떠올려 보자면 오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같은 곳이다. 포탄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지고 구호물자도 식량도 통제되었던 아비규환의 전쟁터와 같은 곳이 에스카토스다. 그뿐이랴.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폭염과 가뭄, 홍수로 망가져 가는 기후 재난 현장, 영하의 싸늘한 컨테이너에서 몸을 떨며 잠을 청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숙소, 목숨을 담보로 국경을 넘는 난민들의 핏기 얼룩진 뒤꿈치와 같은 것들이 에스카토스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꼴찌의 자리를 지키며 ‘내가 여기 있다. 세상에서 외면당한 작은 이들, 가장 끝으로 밀려난 이들 속에 내가 있으니, 하느님을 찾거든 이 자리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가 걸은 십자가의 길과 형틀 위에서의 죽음은 에스카토스의 절정이다. 세상의 밑바닥,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치욕의 끝,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최후의 순간이다.
그러나 에스카토스라는 말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이 단어는 ‘종말론’을 뜻하는 에스카톨로지(eschatology)의 뿌리인데, 성경 속에서 에스카토스는 종종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통로, 하느님나라가 열리는 순간이 된다. 궁극적 에스카토스인 십자가는 끝이 시작이 되고,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신비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그분 안에서 처음과 끝이, 프로토스와 에스카토스가 하나가 된 것이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protos)이며 마침(eschatos)이다.”(계시 22,13) 제자들은 스승이 죽음으로 드러낸 에스카토스를 통해 마침내 이 신비를 깨닫고 그들 스스로 에스카토스로 나아갔다. 스스로 또 기꺼이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기를, “천덕꾸러기”이자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를, “세상의 찌꺼기”가 되기를 자처했다.(1코린 4,9)
에스카토스를 거쳐 다시 열리는 세상, 하느님나라는 단순히 권력 질서가 전복된 세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힘으로 유지되는 세상의 규칙을 다시 쓰는 것이 하느님나라의 방식이다. 첫째와 마지막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이며, 순위와 등급을 매기는 경쟁에서 벗어나 모두가 한 식탁에 둘러앉는 세상이다. 큰 사람, 작은 사람 위계가 사라지고 진정한 공동체의 삶이 시작되는 세상, 피라미드가 아니라 원을 그리는 세상, 사다리가 아니라 안전망을 설치하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인종, 젠더, 문화의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 난민과 장애인, 이주 노동자와 성소수자, 홀보듬엄마(싱글맘)와 독거 노인이 그저 불쌍한 존재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그들도 나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을 간직한 동등한 인격체이자 하느님나라의 동등한 일꾼으로 존중 받는 세상, 우리 모두가 같은 부모를 가진 참 식구, 형제자매로 어우러지는 세상을 그려 볼 수 있는가?
그러므로 에스카토스로 나아간다는 것은,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의미는 단순히 다가올 보상을 기다리며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다. 시혜와 자선을 베풀며 영적 공로를 쌓으라는 메시지는 더더욱 아니다. 에스카토스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삶의 태도이자 선택 기준이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때 나 홀로 물러나 뒷자리로 향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의 변방, 뭇사람이 외면하고 꺼려하는 곳에 자리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 자리에는 어떤 직함이나 은행 잔고, 팔로워 수와는 비할 수 없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또 그 자리에 서 있는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얼마나 벅차고 찬란한지를. 그곳에는 하느님나라가 이미 현재형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조민아
신학자.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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