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과 배려
오늘부터 한 해 동안 격월로 세 번째 목요일에 '오간의 돌봄 일기'를 연재합니다. 아픈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가족, 요양보호사, 의료인과 관계 맺으며,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오은선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설 연휴, 대한민국 반대편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고향 선배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내게 물어본 것이다. 나는 우선 환자가 입원한 호스피스 병동의 전화번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꽤 큰 병원인데도 전화번호를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중앙호스피스센터’ 누리집에 들어가서 겨우 환자가 입원한 병동의 번호를 확인했다. 그 번호를 지인에게 전달했지만, 외국에서 국내로 전화하기가 번거로울 수 있다고 생각해 직접 병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환자의 이름을 말하며, 환자나 환자의 가족과 통화할 수 있는지 물었다. 만약 환자가 통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가족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는지 물었다. 전화를 받은 간호사는 차갑고 딱딱한 태도로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지인의 연락처를 전해 줄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부탁했지만, 이번엔 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환자가 입원했는지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개인정보 보호’를 강조하는 간호사의 태도에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환자와 통화하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환자에게 전달해 달라는 요구마저 매정하게 거절하는 간호사는 개인정보 보호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듯했다. 호스피스 병동의 간호사가 마치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이고, 나는 그 앞에서 약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무적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새해 둘째 날 아침부터 화를 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환자와 가족에 대한 정보 제공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병원마다 정보 제공에 관한 규정에 차이가 있었다. 몇 년 전, 엄마가 아프셔서 지방 병원에서 검사 받았을 때, 나는 검사 결과가 궁금해서 진료협력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를 제공한 후, 담당 간호사에게 연결되어 엄마의 검사 결과와 처방 약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전화를 걸면서도 거절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병원 의료진이 친절하게 설명해 줘서 덕분에 마음이 놓였던 기억이 있다.
요즘 현실은 정보를 제공할 때 점점 더 많은 절차와 제한이 생기고 있다.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은 환자와의 관계를 증명해야 하고, 동의도 받아야 하며, 보건 의료인들은 충분한 설명을 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는 환자 보호와 개인정보 보호 측면에서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규정을 이유로 더 중요한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끼는 날이었다.
그 뒤, 나는 잠시 환자(환자의 가족)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어떤 환자나 가족은 자신의 병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면회를 원하지 않거나, 환자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 그 간호사가 환자 가족들의 다양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정보 보호의 중요성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환자를 돌보는 이들의 친절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쉬웠다.
그러다 문득, 가정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규정을 근거로 환자와 가족을 냉정하게 대한 적이 있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일은 나를 돌아보게 해 주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오은선
의도하지 않게 간호사가 되었지만 어느새 25년 이상 간호라는 일을 하며 늙어가고 있다. 죽음, 돌봄, 가족, 생명윤리라는 주제를 아우를 수 있는 생애말기돌봄에 관심을 갖고 호스피스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가정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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