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여자, ‘하와’

2025-02-20     이미영

이 글은 <공동선>(www.comngood.co.kr)에 함께 실린 글입니다.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경전은 신앙의 근거가 되고 삶의 지침이 된다. 수천 년 전에 쓰인 경전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의미를 주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말씀을 오늘 현실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해석과 실천이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을 그렇게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하느님 뜻을 식별하여 그에 따라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원천으로 읽어 내는 데 관심 있다. 특히 여성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성주의 성서 해석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힘을 얻고자 한다. 그러한 나의 성경 읽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눠 보고 싶다.

어처구니없는 계엄령 원인, 그 여자 때문?

2024년 12월 3일 밤, 뜬금없는 비상계엄령이 나라를 뒤집어 놨다. 다행스럽게도 3시간여 만에 국회 본회의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어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지만,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 표결이 곧바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나날이 거세졌다. 도대체 이 비상계엄령이 무엇 때문에 내려졌는가 여러 분석이 쏟아지는 가운데, “나 사랑 때문에 ○○까지 해 봤다”라는 질문에 ‘계엄’이라고 답하는 풍자 글도 유행처럼 회자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김건희 특별법’ 표결을 앞두고 부인을 구하기 위해 계엄까지 한 게 아니냐는 말이 그저 우스개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임기 전부터 윤 대통령의 부인을 둘러싼 구설수는 끊이지 않았다. 그의 사생활, 학력 위조 및 허위 이력, 주술 행위, 주가 조작, 명품 가방 수수, 공천 개입, 각종 특혜 의혹 등 하루가 멀다 하게 쏟아지는 여러 의혹에 실제 대통령은 부인이 아니냐는 비판이 계속 있었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 중에서도, 대통령은 괜찮은 사람인데 여자를 잘못 만나서 욕먹는다고 그 부인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남자를 잘못되게 하는 나쁜 여자, 성경은 태초부터 그런 여자가 있었다고 그리는 듯하다. 모든 인류를 원죄에 빠뜨린 여인으로 불리는 하와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남자보다 열등하며, 남자를 죄짓게 만드는 여자?

하와의 이미지는 주로 창세기 2장과 3장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하느님께서는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에덴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하느님은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여자를 지으셨다.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는 간교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 금지된 나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다. 하느님은 뱀과 여자, 남자를 각기 처분하시며, 여자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고, 남편이 너의 주인이 되리라고 명하신 뒤 에덴동산에서 내치셨다.

그리스도교 전승과 문화는 오랫동안 하와 이야기를 여성에 관한 일반적인 이미지로 그려 왔다. 여성은 남성을 위한 보조적 존재이며, 악에 빠지기 쉽고, 다른 이까지 죄짓게 하며, 자녀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몸은 타락으로 인해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이고, 남편을 주인처럼 섬겨야 하는 게 하느님이 정해 주신 질서라고 보았다. 하와에 대한 이런 이해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빚어졌고 그다음에 하와가 빚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아가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1티모 2,12-15)

하와. (이미지 출처 = Flickr)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여자와 남자

성서 본문을 수사학적 비평 방법으로 분석하는 필리스 트리블은 1978년 출간한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유연희 역, 알맹e, 2022)에서 창세기 1-3장 본문 비평을 통해 하와에게 덧씌워진 오명을 하나씩 벗겨낸다. 트리블은 그 실마리를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라는 구절에서 찾는다.

창세기에서 사람 창조 이야기는 2장뿐 아니라 1장에서도 나오는데, 창조 순서나 방법, 기간이 서로 다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는 것은 타락에 따른 벌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려주신 축복이었다. 트리블은 이러한 관점으로 창세기 2장과 3장도 다시 꼼꼼히 살핀다.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남자가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며 기뻐하듯, 동일한 본질성과 일치를 드러낸다. ‘협력자’라는 표현은 부수적이고 종속적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할 때도 같은 표현을 쓰듯 적극적 동반과 도움을 의미한다. 동등한 존재로서 남자와 여자는 외롭지 않게 서로 기댈 짝을 만나 공동체를 이루고, 한 몸이 되어 에로스의 기쁨을 나눈다.

뱀이 유혹하는 장면에서도 여자만 있던 것이 아니라 남자도 “함께” 있었다. 그는 아내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제지하거나 자신에게 건네는 열매를 거부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오히려 여자는 그 열매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워” 보여, 그 지혜를 구하고자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한다. 하느님이 왜 열매를 따 먹었냐고 물었을 때도, 남자는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라며 하느님과 여자를 동시에 탓한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동반자를 일러바치지는 않는다. 하느님이 내린 뱀과 남자에 대한 판결에는 “저주”라는 말이 언급되지만, 여자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남자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판결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빚어진 비극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하와

인간의 기원 및 죽음과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창세기 이야기를 두고, 이 경전을 읽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한 ‘원죄’의 책임을 주로 여자인 하와에게 돌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도 아담과 하와가 이블리스(사탄)의 유혹을 받아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맛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하와가 먼저 그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건넸다는 이야기는 안 나온다. 사탄이 먼저 유혹한 것도 아담이요, 알라의 명령을 망각하고 그 열매를 먼저 먹고 하와에게 건넨 이도 아담이기에, 그 책임을 남자에게 돌린다. 알라와의 약속을 잊은 실수를 한 아담은 곧 회개하고 용서를 빌었고, 알라는 그를 용서하여 땅을 관리할 대리자로 세상에 보낸다. 추방이 아니라 파견이다. 같은 이야기를 놓고도 여성을 탓하지 않는 쿠란과 비교하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읽기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동등한 관계로 창조되었던 남자와 여자는 불순종 죄를 지어 하느님의 판결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죽음과 고통의 운명 속에 살아가게 된다. 이때 남자가 여자에게 붙여준 이름이 ‘하와’다. 창조 때 사람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듯(창세 2,19-20 참조), 남자가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수천 년 동안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존엄성을 빼앗긴 채, 때론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수많은 여성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하와’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로, 모든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게 한 근거요 토대가 된 태초의 여성을 기억하게 한다. 여자 없이 인류 역사도 있을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잊고, 너무나도 오랫동안 모든 고통과 불행의 탓을 여자에게만 돌리며 비난하고 차별해 오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민주주의 지키는 광장 중심에 선 여성들

2016년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라며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다. 어리석은 여자가 대통령이 되어 정치도 제대로 못하면서, 비선 실세인 최순실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2024년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외치는 시민들은 내란을 일으킨 그를 비난하지만, 그를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인을 더 크게 비난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여자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한 참담한 현실 앞에, 시선을 돌려보면 다른 여성들이 눈에 들어온다.

2016년의 ‘촛불 소녀’가 2024년엔 응원봉 든 ‘2030 여성’이 되어 광장에 돌아왔다는 칼럼도 나왔듯이, 지금 민주주의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 중 상당수가 젊은이, 특히 20-30대 여성이다. 최근의 선거 분석에서 보듯 현재 한국 사회 2030 여성들은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집단으로 나타난다. 총을 든 군대와 경찰 앞에 화염병을 던지며 비장하게 싸우던 1970-80년대의 시위 문화와 달리, 광장에 선 오늘의 젊은 여성들은 케이팝 가사에 시위 구호를 담아 응원봉을 흔들며 유쾌하고 평화롭게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여자들은 이 땅에서 반만년 동안 사회적 약자로서 저항하며 살아왔기에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여자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 ‘덕분에’ 더 힘차고 단단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영

편집위원,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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