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키에(錦絵)를 통해 본 근대 일본의 조선 인식
니시키에, 일본 역사 왜곡의 시발점
니시키에는 일본의 전통적인 다색 목판화(우키요에)를 말한다. ‘니시키’는 ‘비단’을, ‘에’는 ‘그림’을 뜻하므로, 직역하면 ‘비단 그림’이다. 니시키에는 에도 시대(18세기) 후반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했으며, 다채로운 색상을 사용하여 인쇄한 고급 목판화다. 초기 우키요에가 흑백 또는 단색에 가까웠던 것과는 달리, 니시키에는 여러 개의 목판을 사용하여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었기에 더욱 정교하고 화려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국민 국가 형성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신화에 기초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신국(神國)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니시키에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미술뿐만 아니라 뉴스나 광고용으로도 활용되었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사회가 요동치면서 청일⋅러일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니시키에는 값싸면서도 보도성이 있는 대중 매체로 일본 국민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가장 인접한 조선에 대해, 일본은 신화에 나타난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의 기억을 소환하여, 에도 시대 조선통신사로 상징되는 선린관계의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니시키에에 나타난 조선 인식은 그대로 근대 일본의 서민들이 지닌 이미지로 고착되어 갔다.
니시키에는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하고, 일본 근대 미술 문화의 발전, 나아가 현재의 애니메이션 문화에까지 이어지는 맥락을 고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문화 자료다. 동시에 니시키에는 근대 일본이 침략 지배한 이웃 민족들에 대한 적대와 멸시를 드러낸다. 니시키에는 비문자 역사 자료로서도 매우 귀중하다.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자료라기보다, 니시키에에 묘사된 이미지를 대중이 어떻게 내면화했는지, 그것이 이후의 역사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고찰하기 위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강덕상자료센터는 니시키에를 약 400점 소장하고 있다. 조선과 관련해서는 진구황후의 삼한정벌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비롯해 정한론, 강화도 사건, 임오군란, 갑신정변, 김옥균 암살, 갑오 내정개혁운동, 청일전쟁, 러일전쟁 관련 니시키에를 망라한다.
이들 자료에 대해 강덕상은 “조선을 주제로 한 니시키에가 당시 일본 국민에게 어떻게 비춰졌는가, 니시키에를 통해 이웃나라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의식했는가”(강덕상, "니시키에 속의 조선과 중국-막말 메이지 일본인의 시선", 이와나미서점, 2007)라는 문제의식을 제시하면서, 니시키에가 근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의식을 고찰하는 데 필요한 가장 전형적인 자료라고 지적했다. 강덕상은 니시키에가 일본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니시키에는 무엇을 그렸는가?
니시키에에 드러난 조선 인식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에도막부 후기부터 대외적 위기감이 심화되면서 천황의 권위가 급격하게 올라서는데, 이와 병행하여 일본의 ‘황위’를 해외에 떨쳤다고 전해지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라는 전통적인 조선관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니시키에는 이런 동향에 편승하여 그림 소재로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를 빈번하게 등장시켜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부추겼다.
둘째,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 임오군란 등과 같이 조선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 속에서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 횟수가 감소하고, 대신 문명화된 일본에 비해 야만적이고 몽매한 조선상으로 대체되었다. 니시키에 속에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이 줄었다고는 하나, 일본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신문에서는 정한논쟁, 강화도 사건,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떠올리게 하는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 니시키에 속에서 진구황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신문을 비롯한 대중 매체에서는 여전히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면서 조선을 일본으로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셋째,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묘사하는 니시키에에서 조선인, 중국인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단계적으로 본다면 청일전쟁기까지 니시키에에서 조선인을 멸시 대상으로 삼던 것이 청일전쟁에서는 중국인으로,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인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림 속 주인공은 근대화된 장비를 갖추고 용감하게 전쟁에 임하는 일본 병사들이며, 대조적으로 패주하는 오합지졸의 청나라 병사나 러시아 병사를 주변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모든 니시키에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이처럼 니시키에는 일본 대중에게 제국 일본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게 하면서 조선, 중국, 러시아에 대한 멸시관과 우월감을 심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넷째, 니시키에 속에서는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부터 한국강점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오랜 역사적 숙원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듯이, 만화를 비롯한 대중 매체 속에서는 진구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황위를 해외에 떨친 영웅으로 다시 등장했다.
메이지 일본의 조선 멸시관은 전통적인 조선관의 확대 재생산, 문명화에 의한 문명론적 우월감, 일본 민족의 일체감을 강조하는 배타적 내셔널리즘 형성이라는 세 요소의 밀접한 상호관계 속에서 뿌리를 내려갔다고 할 수 있다. 니시키에는 실로 이 세 가지 요소를 그대로 반영하여 표출했다. 그런 점에서 니시키에에 나타나는 조선 표상은 근대 일본의 배외적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고 국민 통합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니시키에가 의미하는 것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른바 문명 발전은 타자에 대한 침략, 지배 과정과 깊이 결부되었다. 제국주의 국가가 자신을 ‘문명’, ‘개화’, ‘선진’의 위치에 놓고, 타자에게는 ‘야만’, ‘미개’, ‘후진’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할 때, 미술, 사진, 영화 등의 시각 매체는 큰 몫을 했다. 이런 이미지는 대중의 무의식에 침투해 타자에 대한 우월감을 만들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그저 상위 권력이 서민들에게 강제했을 뿐만 아니라, 서민 쪽에서도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니시키에가 큰 인기를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근대 일본에서 시각 이미지로 대중에게 침투해 내면화된 ‘타자상’을 발견해 내는 일은 그런 ‘거울’에 비춰 봄으로써 일본 국민이 근대의 왜곡된 ‘자기상’을 발견하고, 그 극복 방향을 모색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뛰어난 예술성과 타자에 대한 멸시의 동거. 니시키에는 근대 자체의 양면성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며, 일본과 아시아 민족들에게 근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드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부설 강덕상자료센터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