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달리타스 구현이 위기 타개의 지름길”
[인터뷰] 바티칸공의회 폐막 60주년 기념 EAPI 원장 정제천 신부
필리핀에 있는 동아시아 사목연수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 그 뒤 60여 년 동안 아시아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사목 및 신학 양성과 수련에 있어 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해 왔다.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 피터 판, 마이클 아말라도스, 펠릭스 윌프레드 등 뛰어난 신학자들의 강의와 논문을 통해 아시아 신학을 전파하는 요람이기도 했다.
예수회 정제천 신부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동아시아 사목연수원(이하 EAPI) 원장직을 맡아 봉사해 오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예수회가 운영하는 아테네오 드 마닐라 대학 안에 있는 EAPI 원장실에서 공의회 폐막 60주년을 맞아, 공의회의 의미와 2023-24년 시노드의 연관성에 관한 주제 중심으로 진행했다.
<지금여기> : EAPI의 실질적 역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관련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소개 부탁합니다.
정제천 : 1950년대에 본토에서 추방당한 중국관구 소속 예수회원들이 필리핀에서 지내면서 전례 및 교리교사 학교를 개설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교회를 꿈꾸던 이들은 때마침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크게 고무되어 공의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아시아 복음화의 꿈이 보편 교회의 꿈을 만나 EAPI가 탄생한 것입니다.
<지금여기> :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원장을 맡아서 지난 3년여 동안 직무를 수행하셨습니다. 그간의 소회와 경험, 특히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간단히 나눠 주기를 바랍니다.
정제천 : EAPI는 필리핀 예수회 대학인 아테네오 데 마닐라 경내에 있지만, 편제상 필리핀 관구 소속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구(처음에는 ‘동아시아 지역구’라 불렀다)의 공동 사업입니다. 현재 필리핀 2명, 베트남, 인도네시아, 한국에서 각각 1명씩 파견되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코로나 역병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때라서 처음 6개월을 프로그램 없이 지냈습니다. 그 덕분에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프로그램 준비를 잘할 수 있었지요.
올해 1학기 프로그램에 등록 인원이 68명입니다.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 혼자 일한 것이 아닌데요, 동료들과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제 마음을 울리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관대한 이에게 한없이 관대하시다.” 그리고, “야훼 이레!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신다.” 만일 필리핀이 아니라면 “중도 포기, 조기 귀국” 등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방인을 환대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합니다.
<지금여기> : EAPI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대표적 정신인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곧 ‘적응’과 ‘쇄신’에 응답해 지난 60여 년 동안 사제, 수도자, 평신도의 사목적, 신학적 양성과 훈련에 있어 ‘아시아의 허브’ 구실을 해 왔습니다. 그 관점에서 EAPI의 주요 공헌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격변하는 현 시대 상황이 EAPI에 변화를 요구한다면 어떤 것인지, 그 사목적, 신학적 변화 방향에 대한 고견을 청합니다.
정제천 : EAPI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해 왔습니다. 하나는, 기숙형 프로그램을 통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EAPI는 일반 학교보다 신학교와 수련원에 더 가깝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프로그램에 참가한 인원은 최소 7000여 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단지 학생이 아니라, “참가자”로서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치유와 화해,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참가자들의 내적 외적 변화는 괄목할 만합니다. 이들의 체험을 저는 “하느님나라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생활 영역과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그 정신을 얼마만큼 적극 실행했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별 문제라서 EAPI의 기여도 평가는 조심스럽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적 맥락에 따른 신학적 지평을 여는 데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로 신학 잡지 발간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EAPI 설립 이전 1963년부터 발행한 <EAPR>(East Asian Pastoral Review)이라는 잡지가 계간지로 2016년까지 발간되었습니다. 현재는 독자가 줄어들어 인터넷 잡지로 전환해 연 2회 EAPI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적 맥락에서 보편 교회의 꿈을 실현하는 신학적 지평을 열어 가는 역량 있는 저자들이 함께해 주기를 소망합니다.
<지금여기> : 지난 2023-24년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는 ‘공동협의적, 공동협력적 교회’(synodal church)를 이루기 위한 전 교회적 노력이었다고 보입니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계승 또는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는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보시는지요?
정제천 :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두 기둥은 원천 회복과 현대 적응입니다. 이번에 열린 “시노달리티를 위한 시노드”는 이러한 공의회 정신을 내면에서부터 구현하는 노력이라고 여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회의는 구성원들의 활발한 참여가 반영된 초대 교회의 의사결정 과정을 보여 줍니다. 시노달리티는 더 많은 교회 구성원을 의사결정 과정에 초대하자는 것으로써 교회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 추세에 맞는 시의적절한 의제입니다. 이제 교회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필리 2,7) 스승 예수님을 눈앞에 모시고 자신의 2000년 전통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EAPI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실천과 함께 시노달리티의 이론적 실천적 전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여기> : 시노드 결과(제안 및 권고 사항)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적 상황, 특히 그리스도인이 줄고 또 사제 및 수도자 성소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맥락에서 받아들일 때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정제천 :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를 구현하는 것이 이런 위기를 타개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시노달리타스를 구현하려면 권한 배분과 참여적 의사결정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가 그것을 원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상의 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의존해 온 껍데기를 벗겨내고 우리의 진짜 모습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거쳐서 아시아에 전파되었는데, 저는 만일 아시아로 먼저 전파되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상상해 보곤 합니다. 불교와 유교, 힌두교가 자리 잡고 있는 아시아 대륙에서 가톨릭교회는 좀 더 겸손하고 이웃 종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모습으로 자라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교는 초기 교회 때에 소수 종교였습니다. 역사의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지금여기> : 시노드 제안 사항 가운데 평신도를 포함하는 ‘통합 양성’에 대한 언급이 2023년 1회기의 ‘종합 보고서’와 2024년 2회기의 ‘최종 문헌’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이를 아시아 지역 교회가 적극 수용한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지, 그와 관련해 EAPI의 양성 시스템이나 방식이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정제천 : 평신도 양성이 활성화되고 교회를 평신도의 눈으로 보는 신학자가 많아지면 우리 교회가 좀 더 활발하고 건강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EAPI는 주교의 추천서를 전제로 하여 평신도의 참가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지금여기> : EAPI 원장 임기가 남아 있는 시점에서 앞으로의 전망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정제천 : 아시아에는 외국인에게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허용하지 않거나 제약을 가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가 대표적이며 여타 이슬람 국가들도 그러합니다. 저는 그런 나라들에 더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EAPI를 찾아오는 사제 수도자들을 돕는 한편, 우수한 강의를 여러 언어의 자막과 함께 디지털화하여 배포하고 싶습니다.
(정제천 신부는 그동안 EAPI를 '동아시아 사목연구소'라고 번역하였지만, 사실 EAPI는 그 설립 목적과 활동 내용은 연구보다는 연수 기능에 더 부합한다면서 '동아시아 사목연수원'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따라서 이 글을 비롯해 앞으로 EAPI 번역은 이 제안을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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