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인생 바친 운동가, 여운형
오늘부터 한 해 동안 매달 세 번째 화요일에 '시무의 역사학과 강덕상자료센터'를 연재합니다.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면서 조선근대사료연구회 활동과 일본 사회에서 조선사 연구가 갖는 진정한 의미와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평생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이규수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여운형의 삶이 복원되다
노(老)역사학자의 평생에 걸친 끈질긴 노력과 집념이 여운형 평전으로 빛을 보았다.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姜德相) 선생의 "여운형 평전(呂運亨評傳)"(1-4)이다. 1권은 2002년 6월, 2권은 2005년 1월, 3권은 2018년 11월, 4권은 2019년 6월에 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간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평전은 원래 3권 23장 구성이었지만, 4권 26장으로 최종 편집되었다. 후기에 따르면 이미 완성된 초고에 별도로 추가된 내용은 없다. 장절 체제의 재구성에 따른 것이다.
평전은 1권 413쪽, 2권 566쪽, 3권 389쪽, 4권 320쪽, 합계 1688쪽에 이른다. 단일 인물 평전으로는 가장 방대한 분량일 것이다. 2권 간행 이후 3권까지는 13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그 또한 여운형의 삶을 추적하려는 한 역사학자의 진솔한 삶의 자세로 기억될 것이다. 조선 독립에 인생을 바친 운동가, 여운형! 민족을 향한 그의 외침과 진솔한 삶의 모습이 평전 형태로 다가오기에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해방 정국 당시 남북 합작과 좌우 합작을 주장하던 여운형은 그로 인해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남북 분단과 좌우 갈등 속에서 그동안 독립운동사 분야에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관련 연구도 미진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에서는 김일성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었고, 남쪽에서는 김구와 이승만이었다. 여운형은 역사 속에서 마치 반역자 같은 위치에 놓여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강덕상의 여운형 연구는 해방 이전 활동에 집중되었다. 남한과 북한의 여운형 연구 현황에 대한 엄정한 평가 위에서 독립운동사 분야에서의 여운형이라는 시점을 강조했다.
평전은 여운형의 생애를 실증적으로 복원한 역작이다. 인물 평전이라기보다는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독립운동사 연구서다. 관련 자료의 방대한 수집과 치밀한 검증이 이루어졌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지배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민감한 분야는 ‘불령선인’으로 간주된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였다. 강덕상은 일찍이 관련 사료를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朝鮮(1-6), みすず書房, 1966-76)로 편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 1940년대 해방 때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여운형이었다고 회고한다. 강덕상의 자료 수집과 정리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여운형 평전이 탄생했다.
여운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미흡하다. 그에 대해 ‘친일파-공산주의자-기회주의자’로 왜곡하는 흐름도 있다. 2005년 여운형의 건국훈장 수여를 둘러싸고 국가 정체성 시비도 일어났다. 그가 살아온 시대와 관련성을 입증하지 않고 단지 개별 인물의 행적을 묘사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을 배반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평전 발간을 통해 여운형에 대한 기존의 왜곡된 평가가 불식될 것이다.
평전 간행의 의의 가운데 하나는 민족 분단으로 인한 여운형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정당하게 복원한 독립운동사론이라는 점이다. 강덕상도 강조하듯이 그것은 ‘분단이 만들어 낸 허구의 역사인식’(1권, 7쪽)을 바로잡는 작업이자, ‘생애의 실증적 복원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사와의 관련에서 재조명하는 또 하나의 앵글’(1권, 8쪽)이었다. 여운형에 대한 정치적 복권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여운형의 삶의 궤적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통일 없이 우리 민족은 살아 나갈 수 없다!
강덕상의 여운형 연구의 계기를 살펴보자. 강덕상이 여운형이라는 인물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생 무렵인 15살이었다.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 직후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 김달수(金達壽) 선생의 “혁명 도상에 있는 우리 조선에게 더 이상의 손실이 있을까”(金達壽, "呂運亨先生の生涯(上)", '民主朝鮮', 1947년 8월호, 24쪽)로 시작하는 글을 접하고 나서였다. 당시 청소년인 강덕상에게 여운형은 처음 들어 보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역사 연구자의 길을 걸으면서 강덕상은 여운형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다. 독립운동 관련 관헌 자료를 다양하게 수집, 편찬하면서 김달수 선생이 말하는 민족적인 ‘손실’의 의미를 찾아 나섰다. 여운형은 수많은 기라성과도 같은 독립운동가 군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일등 별’이었기 때문이다.
강덕상의 여운형 ‘찾아 나서기’는 독립운동사 복원 과정의 일환이었다. 강덕상은 평전 집필 이전에 "조선독립운동의 군상"(朝鮮獨立運動の群像―啓蒙運動から三⋅一運動へ, 青木書店, 1984)을 간행했다. 이 책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3⋅1운동에 걸쳐 활약한 9명의 일대기를 정리한 것이다. 강덕상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운형 연구에 매진한 그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에 등장한 사람들은 오늘날 분열된 조국을 생각하며 독립운동을 펼치지 않았다. 지금 조국의 현상을 가장 슬퍼하는 자들은 이들이다. 분열된 상태의 조국은 진정한 독립 국가라 말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통일을 추구하는 하나의 정신적 식량으로 삼으면 좋겠다. 우리는 해방 후 벌써 40년간 분열의 시대를 살았다. 그 아픔은 또한 통일 시대를 향한 진통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그러한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나 또한 이 책을 1920년대로 끝마치고 싶지 않다. 진정으로 독립한 조선을 추구한 사람들을 속편으로 써나가야 한다. 박은식의 표현 방식으로 말하자면 광복사와 통일사가 있어야 비로소 완결된다. 앞으로 30년대, 40년대, 독립과 통일을 바라며 조국과 민족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계속 그려나갈 것이다. 통일 없이 우리 민족은 살아 나갈 수 없다. 역사를 거스르고 있다."
“통일 없이 우리 민족은 살아 나갈 수 없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강덕상은 ‘진정으로 독립한 조선을 추구한 사람들’ 가운데 여운형을 선택했다. 강덕상은 여운형을 세계를 무대로 ‘조선의 독립에 인생을 건 운동가’, ‘식민지기 중국 상하이를 기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가열차게 추진한 운동가’의 표상으로 그려 냈다.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 집필의 궁극 목적은 여운형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서만 분단된 한반도의 민족의식의 심리적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과 통일은 여운형 사상의 재평가를 통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강덕상은 평소 강만길 선생의 ‘분단 시대’라는 역사인식에 깊이 공감했다. 남과 북에서 여운형 연구가 미진한 원인은 민족 분단 때문이라 진단했다.
강덕상은 1986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강덕상은 여운형 묘소와 생가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초라한 수유리 소재 묘소와 무너진 생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강덕상은 여운형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이유는 해방 이후 한국의 ‘분단 사관’이 집약되어 있다고 바라보았다. 북한의 연구 경향도 마찬가지였다.
평전 후기에서 강덕상은 “민족 독립에 대한 수많은 이합집산적 경험의 문을 열어 보고 발견한 것은, 문 너머에 잠자고 있는 것은 계급을 초월한 우리들의 공통의 보물, 민족이었다. 계급을 넘은 민족의 발견이란 무엇인가.... 조선사의 현재는 아직 ‘광복’이 되지 않은 ‘분단 시대’다. 이를 극복하고 나서 비로소 광복 즉 독립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통사’, ‘혈사’의 시대를 여운형 평전이라는 이름을 빌어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세계사의 대국 속에서 독립운동사에 초점을 맞추어 잃어버린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다”(4권, 318-319쪽)고 강조했다.
강덕상은 여운형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여운형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대와 깊숙이 결부된 인물이라 강조한다. 여운형은 결과적으로 민족 통일에서 유일무이한 빛나는 별과도 같은 존재이고, 남북이 여운형의 투쟁 역사를 공유할 것을 제안한다. 강덕상은 여운형 평전을 통해 ‘민족의식의 심리적 통일’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민족운동의 북두성, 여운형
평전은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해방 이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철저한 자료 분석과 검증을 통한 여운형의 삶과 사상이 정연하게 제시되었다. 사료 인용도 풍부하여 관련 연구자에게 도움이 된다. 강덕상은 관헌 당국이 작성한 자료를 ‘반전(反轉)하여 입장을 바꾸어 읽어 내는 작업’(4권, 315쪽)에 충실했다. 2차 사료로는 한⋅중⋅일 3국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개인 기록 등도 활용했다. 자료에 기초한 객관적 정황 분석이라는 역사가로서의 성실한 자세가 돋보인다. 각 권의 주제와 장별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권> 조선 3⋅1독립운동
제1장 구한말, 위기의 시대상
제2장 한국 망멸(亡滅)과 계몽가로의 전생(轉生)
제3장 중국 혁명에 대한 공명(共鳴)과 3⋅1독립운동의 태동
제4장 상하이 임시정부
제5장 3⋅1운동과 5⋅4운동
제6장 무단으로부터 문화 정치로, 조합 교회의 회유 공작
제7장 일본에서의 여운형 활동
제8장 여운형 회유 공작의 실패와 제42제국의회의 혼란
<제2권> 상하이 임시정부
제9장 상하이 거류민장으로서
제10장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의 와중에서
제11장 미국 의원단을 맞이하여
제12장 사회주의로의 모색
제13장 독립 전쟁, 식민지 방위 전쟁
제14장 임시정부 분열의 여러 양상
제15장 극동민족대회로
제16장 국민대표대회
<제3권> 중국 국민 혁명의 친구로서
제17장 ‘한중호조사’의 결성과 활동
제18장 임시 정부 주변의 군사 노선
제19장 레닌 사후, 급전환하는 소련 외교
제20장 중국 국민 혁명의 친구로서
제21장 중국 5⋅30운동으로부터 조선 6⋅10운동으로
제22장 북벌 전쟁과 반혁명의 폭풍
<제4권> 일제 말기 암흑시대의 등불로서
제23장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서
제24장 황민화⋅내선일체화 정책에 항거하여
제25장 일본 정계와의 접근전을 전개하여
제26장 건국 동맹 결성의 여러 양상
제1권에서는 3⋅1운동의 내재적 필연성과 국제성을 중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과의 연동에 주목하여 분석했다. 특히 강덕상은 3⋅1운동의 중국 5⋅4운동으로의 전개 과정과 여운형을 비롯한 김규식과 장덕수의 신한청년당이 수행한 역할과 대일 외교의 유연성을 의식하면서 논리를 전개했다. 2⋅8독립선언은 도쿄발이 아니라 상하이발 도쿄 경유이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김규식을 파견한 것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이었음을 강조했다.
제2권은 상하이 임시정부 성립과 조선독립운동의 국제성, 특히 중소 양국의 영역 안에서 전개된 특성에 주목하여 양국의 국익 외교와의 이해관계 위에서 복잡하게 전개된 혼돈의 실상을 규명했다. 혁명 러시아와 중국의 시선, 특히 조선독립군과 일본의 간도 출병이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의 결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군벌로 인해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둘러싼 각 세력의 내분과 미숙한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는 ‘민족이란 된장 균과 같은 것으로 돌리면 돌릴수록 접착력을 발휘하고 다시 단결하여 떨어지지 않는다’(4권, 314쪽)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했다고 강조한다.
제3권은 레닌 사후, 국익 외교로 전환한 소련과 중국 혁명 사이에서 전개된 독립운동과 쑨원의 북벌 전쟁이 ‘만주’로 확장하던 시기에 중국 혁명의 성공을 위해 전력으로 협력한 여운형 등의 사상과 행동, 또 중국 5⋅30운동에서부터 조선의 6⋅10운동으로의 전개와 북벌 전쟁 참가에 주목했다. 제4권 전반부는 이른바 합법 내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정치가로서의 여운형의 모습을 서술했고, 후반부에서는 일본 우익의 거두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 등 일본 정계와의 접근전 양상을 규명했다. 새로운 자료 발굴을 통해 여운형과 오카와와의 관계를 새롭게 재조명한 것은 연구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민족 분단 극복을 위한 공통 자산의 발견
강덕상은 평전을 통해 일관되게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여운형을 통해 남북 분단 극복과 통일의 방향성을 전망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강점 이후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각지로 망명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으로 헌신했다. 각 세력은 국제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다. 여운형의 신한청년당 창당도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였다. 여운형을 매개로 한 신한청년당의 활동을 중시하지 않고서는 윌슨에게 보낸 독립 청원문이나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 나아가 국내의 독립선언서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 세력은 각자 거주하는 국가와 지역이 달랐고, 출신 성분이나 이념 사상에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차이를 극복하고 운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민족이라는 입장이었음을 강조했다. 여운형의 역사적 평가는 민족이라는 틀을 통해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덕상은 평전 집필을 시작하며 ‘연구 대상과의 거리’(1권, 9쪽)에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는 나중에 보면 필연의 연쇄이겠지만, 시대 분기점이나 각 운동이나 사건과 관련해서는 그때그때의 선택 사항이 있다. 강덕상은 여운형이 선택한 길은 적어도 해방까지는 틀리지 않았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민족의 운명을 개척한 인물이었음을 논파했다. 여운형 연구의 최고 가치는 민족 분단 극복을 위한 공통 자산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여운형의 3⋅1운동 이후의 일본 방문과 1940년의 오카와 슈메이 등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일관된 해석을 내린다. 여운형은 일본 방문과 제국호텔에서 한 연설을 통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조선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달변은 일반 청중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여운형은 ‘자치’라는 화두를 꺼내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의 정당성을 설득하면서 ‘조선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로 이어진다’는 전망을 제시했다고 강조한다. 또 오카와와의 만남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여운형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운형은 오카와에 압도되거나 잔심부름꾼이 아니었고, 지배와 피지배의 틈바구니에 존재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여운형은 지배자의 힘을 이용하면서 당당하게 평화를 향한 조연을 해낸 인물이었다. 오히려 오카와가 여운형을 만나고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은 후학들에게 새로운 분발을 촉구한 것이기도 하다. 집필 과정에서 알게 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2권 간행 이후 3권이 간행되기까지 13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다. 강덕상이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설립 준비와 초대 관장으로서 사회 활동에 전념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무거운 병마와 싸우던 시기였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강덕상은 생사를 넘나들며 의사에게 부탁했다. “앞으로 2-3년 시간이 필요하다. 여운형 평전을 마무리하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강렬한 바람이었다. 제3권과 제4권의 교정은 병마와의 싸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필자의 여운형 ‘찾아 나서기’ 작업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여운형 평전은 역사학자 강덕상의 성실한 삶의 자세를 보여 준 한 편의 대하드라마이기도 하다.
이규수
동농문화재단 부설 강덕상자료센터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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