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탄핵과 남태령 집회에서 만난 2030 여성들

2025-01-20     이보나

아마 모두가 12월 3일 밤, 계엄령을 들었을 순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여느 날과 같이 소파에 등 기대어 배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경향신문> 속보 알림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것을 알게 되자마자 유튜브에서 온갖 채널의 생방송을 지켜봤다. 당장 국회 앞으로 달려간 시민이 많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달려온 20대 대학생, 수원에서 바로 국회로 달려갔다는 50대 등. 모인 사람들은 다양했다. 나는 그저 휴대폰 화면으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히 계엄령은 공포된 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이후 나와 배우자는 그 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무기력함을 씻어 내보기라도 하듯 주말마다 시위를 나갔다.

12월 7일, 계엄령 공포 및 해제 이후 첫 토요일. 국회의사당 앞을 가득 메운 인파에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건희 특검법이 부결되자 많은 사람이 자리를 떴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주최측에서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앞쪽으로 오라고 했다. 색색 응원봉에 둘러싸여 여러 케이팝에 몸을 흔드니 기다리느라 얼었던 몸이 녹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전부 나와 같은 2030 여성들이란 걸 알게 됐다. 스크린에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 얼굴 하나하나를 비춰 주었는데, 화면에 잡힌 대부분 2030 여성은 웃으며 휴대폰이나 패드에 전하고자 하는 짧은 글귀를 내보였다. “최애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일 시험이다 빨리 나와라”. 화면에 잡히자마자 노래 가락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까지. 그들의 밝게 빛나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끝내 그 날 탄핵소추안은 부결됐지만 그곳을 가득 메운 그 함성 덕분에 희망을 안고 귀가할 수 있었다.

작년 1월 22일 안전모 없이 공사 현장에서 추락하여 산재로 돌아가신 건설 노동자 고 문유식 님의 딸 문혜연 씨가 발언했다. 매주 열린 집회는 수많은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농민, 장애인과 함께 연대하는 자리란 걸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보나

그 뒤 매주 집회에 참석했다. 가장 기억에 남은 날은 12월 21일과 22일이다.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지만 체포와 구속이 남아 있었다. 21일, 광화문 동십자각 집회에 가기에 앞서 나와 배우자는 아침에 남태령을 향해 가는 트랙터 대오를 목도했다. 우리는 곧바로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트랙터 대열 중 한 분이 손을 흔들어 주셨다. 광화문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남태령역을 도착하기도 전에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버스 기사는 트랙터 때문에 길이 막혀서 더 못 가니 여기서 내려 선바위역까지 걸어가라고 승객들에게 안내했다. 버스에선 한숨 소리와 나지막하게 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나와 배우자는 버스에서 내린 뒤 광화문까지 가는 길에 누리소통망으로 트랙터들이 남태령에서 경찰에 저지당하는 상황을 계속 지켜봤다. 막막했다. 걷는 내내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배우자를 봤는데 눈시울이 빨갰다. "울어?"라고 묻곤 나도 울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 화가 나면서도 무기력했다.

거리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라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안일한 생각이 무색하게 그날 광화문에는 약 30만 명이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하원오 의장이 트랙터를 남태령에 두고 발언하러 잠시 왔다고 했다. 시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의장은 발언이 끝나자마자 남태령으로 돌아갔다. 다양한 시민 발언과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명동까지 행진했다. 명동 거리의 많은 시민도 행진하는 사람들을 향해 환호하고 응원했다. 진행자가 중간중간에 트랙터를 몰고 온 농민들을 자주 언급했다. 모두 그에 함성으로 연대했다. 저녁 7시, 집회가 끝나고 우리는 귀가했다.

1월 11일 집회 중, 옆에 앉아 있던 60대 여성분이 감을 깎아 나눠 주셨다. 이외에도 귤, 쥐포 등 다양한 간식을 받았다. ©이보나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친구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하니, 친구는 밤새 뜬 눈으로 유튜브 '전농TV' 생중계를 통해 현장 집회를 지켜봤다고 했다. 나는 서둘러 해당 채널 영상을 찾아 봤다. 아침 9시였는데 사람들이 빽빽했다. 밤새 그 자리를 농민들과 함께 지켰다고 했다. 어제 눈물만 흘렸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막막할 땐 현장에 가면 되는 건데. 전날 광화문 집회가 끝나자마자 남태령으로 향한 사람이 많았는데. 나와 배우자는 미사 드린 뒤에 바로 남태령으로 향했다. 남태령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었다. 모두 단단히 옷을 여민 채 가방에 깃발이나 방석을 챙겼다. 누가 봐도 모두 남태령 집회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남태령 집회 가시죠?"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 힘내자고 덕담을 나눴다. 출구로 나가는 쪽에는 자원봉사자가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안내하고 있었다. 옆에서 같이 걷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시위 가냐고 물으셨다. 농부의 아들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며, 청년들에게 참 고맙다고 우리에게 핫팩 한 세트를 손에 쥐여 주시곤 먼저 성큼성큼 출구로 나가셨다. 나가기 전부터 함성이 역 안까지 가득 울려 퍼졌다. 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여성들이 다 여기 있구나.

12월 22일. 남태령역 출구 나가는 길. ©이보나

출구로 나오니 온갖 간식과 핫팩, 물 등, 시민 개개인의 나눔으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간식 필요하신 분들 가져가세요! 붙이는 핫팩 있습니다! 물도 챙겨 가세요! 김밥 있습니다!" 자원 봉사하는 분들이 열심히 양옆에서 소리치며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 활기에 얼떨떨한 채 엄청난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계속해서 일관된 구호를 외쳤다. "차 빼라! 차빼라!" 경찰 버스는 트랙터가 가는 길을 벽을 치듯이 둘러싸고 있었다. 시민들은 쉬지 않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에 맞춰 몸도 움직이며 활력을 잃지 않았다. 그 와중에 피자 한 판을 머리 위에 얹은 채 "피자 드실 분!" 하는 여성 청년과, "핫도그 드실 분!" 하며 큰 봉지를 든 여성분이 시위대 사이를 지나다녔고, 어디서 왔는지 김밥이 가득 든 봉지도 사람들 손과 손으로 전달되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경찰 버스가 늦은 오후쯤 되어 물러났다. 모두가 환호했다. 와! 우리가 이겼다! 시민이 승리한다!

남태령역에 모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다함께 “차 빼라! 차 빼라!“를 함께 외쳤다. ©이보나

현장에 있던 시민들이 먼저 사당까지 행진하고, 그 대오를 따라 트랙터가 행진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벅찬 마음을 안고, 환한 얼굴로 행진했다. 나는 행진의 가에 있던 터라, 트랙터 앞에 서 있던 농민들과 손뼉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차갑고 단단한 손. 그 손들과 내 손을 맞댈 때마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우리 모두는 농민에게 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떠올렸다. 이런 방식으로도 화합할 수 있는 거구나. 이전까지 깊어지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 세대 갈등, 도시-지방 간 갈등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화합되는 것을 보며 성령의 움직임을 느꼈다.

사당역으로 행진하는 중에 전봉준투쟁단의 많은 농민과 손뼉맞장구를 치고, "투쟁!"을 외치며 연대했다. ©이보나

최근 이 일련의 과정들이 매우 신선하고 놀라웠다. 탄핵안이 가결되면 또 묻힐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계속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계엄령 이후 계속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행동했다. 그런 사람들을 따라 현장에 나가면 희망을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모두가 2030 여성들에 대해 얘기했다. 여성 청년들은 이전부터 촛불소녀, 젊은 여성 등으로 불리며 항상 의외의 인물로 여겨지곤 했다. 그때와 지금 계속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다른 것은 사람들이 이제 우리를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닌 주축으로 본다는 점이다. 꺾이지 않는 마음, 저돌적인 행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치지 않고 현장에 끝까지 남아 있으며 그 상황을 즐길 줄 안다는 것 자체로 2030 여성들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징표가 되었다. 나 또한 30대 여성 청년으로서 이들에게 고마웠다. 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체념하기보단 그 자리에 나옴으로써 연대를 몸소 보여 주는 여성들 덕분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어두울 때, 아주 캄캄할 때 빛은 더욱 빛난다. 최근 우리나라의 계엄령 이후의 일들이 전부 그렇게 느껴졌다. 아주 캄캄한 시기이지만 우리는 더 밝은 빛을 보고 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2025년 올해는 희년으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두려움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기쁘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고 요청했다. 두렵고 무기력했던 이 시기에 우리는 연대를 통해 희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시위에 나갈 때마다 나는 이 기억들, 이때 느꼈던 감정들이 무기력할 때 나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 있든지 이 일들을 소중히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쓴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윤석열 대통령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아직 절차가 더 남아 있지만 희망을 안고 기도한다. 우리 모두의 일상 회복을, 정의 실현을.

이보나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관심이 많으며 이러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가톨릭 청년들과의 교류의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하는 30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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